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중목사' 김현봉 3

好學 2012. 2. 19. 20:27

'중목사' 김현봉 3

 

 

검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의 -

                                                            김현봉 목사 생애와 사상

                                                                                                                           이영호 목사
                                                                                                                 (전 현대종교 편집인 겸 편집국장)


 

3. 중매와 결혼식


 김현봉 목사의 결혼 이야기는 너무도 특별하다. 공덕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사는 되었으나 교회는 총각목사라고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공덕교회로 소개한 세브란스 구내에 있는 남대문교회 오순영 목사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조건은 두가지 (1) 간호원 이어야 하고, (2) 얼굴이 못나서 시집가지 못하는 처녀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목사는 적당한 규수가 있어 맞선 보기로 양쪽에 연락을 하고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도록 했는데, 맞선볼 처녀에게는 걱정이 하나 있었다. 혼자 나서 가기 가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닌지라 들러리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가려고 하니까 다 자기보다는 얼굴이 잘생겼는지라 잘못하다가는 혼처를 빼앗길 염려가 있어 고심끝에 자기보다 더 못나 시집 못가는 간호원 하나를 데리고 맞선을 보기로 했다. 이래서 처녀는 친구를 데리고 약속된 장소에 미리나와 있는 김목사를 만났다.

 이때 김목사는 같이 따라온 그 못난 처녀를 유심히 주목 하더니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다. “저는 이 간호원 친구예요” 하고 대답하니 “당신은 결혼 했오?”  “하도 못생겨서 데려가는 사람이 없어 아직 못 갔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말을 들은 김목사는 정작 선보러온 처녀는 제쳐놓고 들러리로 따라온 처녀에게 “당신 나하고 결혼 합시다.” 청혼을 해서 결혼을 하게된 것이다.

 이 처녀가 사모 박천선(1901-1987)이었는데 얼굴은 빡빡 얽었다. 그는 일찍이 황해도 신천 가난한 과부의 외동딸로 얼굴과는 달리 천성이 착한 이였다. 이때 김목사는 44세요 부인은 28세였다. 김목사 부부는 33년간이나 동거했으나 금욕생활을 굳게 지켰다. 김목사는 늘 성직자의 생활은 성생활을 초월하여 깨끗이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 더 낫다고 가르쳤을뿐 아니라 자신이 이를 철저히 실행했다.18)

 윤남하 목사가 벧엘기도원에 가서 한 청년을 간호하는 처녀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목사님이 적당하게 생각되시면 교회에 광고하기를 결혼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날 몇시에 교회로 다 모이라 하신다. 그에 따라 처녀 총각들이 모이게 되면 성경 말씀으로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말씀으로 간곡히 가르치신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 김목사의 명령에 따라 절대 순종 하도록 명하신다. 그리고 모여 앉은 남녀들을 죽 둘러 보고서는 총각과 처녀를 지명하신다. 그리고선 둘이 결혼 하라 명하시면 그것으로 중매는 끝이난다.” 고 한다.

 그리고 약혼식은 반대하였고 결혼식만 하도록 가르쳤다. 동시에 위와같은 약혼은 됐어도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는 결코 따로 만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다. 한번은 자기교인 결혼식에 어느 목사가 따라 왔다가 “목사님은 뭐하려고 따라왔오” 하여 그 목사는 몹시 무안해 한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어디까지나 허례허식을 멀리했다. 그래서 드레스는 물론 화관쓰는 것 까지도 철저히 배척한 것은 물론 경제적 이었다.

 윤남하 목사의 이교회 탐방기에 이르면, 김목사가 위자에 앉아 파리채를 휘두르면서 광고를 하는데 “우리교회에서 누구든지 결혼식을 하고 내게 주례를 받으려면 그날 결혼할 신랑 신부는 헌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국수 세그릇 준비하여 신랑 신부 주례목사가 한그릇씩 나눠 먹도록 간소히 할것(나중에는 주례자용의 국수 찬그릇 까지도 생략했다.) 그리고 화관이나 너울도 절대 사용하지 말것. 그게 싫으면 우리교회에서는 예식을 말고 다른 곳에서 할 것” 이라고 광고했고, 또 “우리교회에서 장례식이 있어 내게 집례를 원하려 하면 시신을 수례에 싣고 화장터(그당시 화장터는 지금의 벽제가 아니라 홍제동 이었다.) 까지 영구차를 빌리지 않고 걸어가면 내가 가서 집례해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른곳에 가서하라”고 까지 광고했다고 한다.


 

4. 그의 일상생활


 김현봉 목사의 목회 생활은 남달랐다. 저녁 9시쯤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다음날 아침 6시쯤에 집에 들어와 냉수 마찰을 하였다. 그리고 8시면 심방을 나갔다. 후에는 저녁 6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1시에 기상해서 바로 식사를 하고 묵상하다가 통금이 해제되자 마자 연세대학 뒷산 봉원사 쪽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의 일상생활은 규칙적인 생활임과 동시에 다른 생활을 해오신 분이다.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오후 5시에는 잠자리에 들고 아침밥은 새벽 3시에 먹고나서 오전 4시에(그당시는 밤 12시부터 통행 금지가 시작되어 오전 4시에야 해제가 되었다.) 문밖에 대기 시켜둔 택시를 타고 연세대 뒷산에 올라가 기도와 성경을 읽고 명상으로 근 9시까지 지내다가 집에 와서 9시가 되면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가 되면 저녁을 먹는 생활을 했다.” 고 한다.

 그의 생활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윤남하 목사가 기술한바에 의하면, “그의 밥상에는 언제나 팝밥 한그릇(그는 팥밥을 즐겼다.)과 김치 한접시, 된장국 한그릇 외에는 더올려 놓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홍당무가 몸에 좋다고 하여 즐겨 먹었다. 동시에 건강에 좋다는 시금치와 사과도 맛있게 먹었다. 그의 밥상을 봤을때 인도의 간디처럼 철저한 채식주의자임을 알수 있다.”하며 또 사탕도 즐겼다고 한다.

 김목사는 교인들이 신앙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완전히 자립하도록 애써 가르치고 힘을 다했다. 그는 남의 도움을 절대로 빌리지 않았다. 자기 일은 끝까지 자기가 하기에 죽을때까지 건강을 유지했다. 매일 냉수 마찰을 했고 자기등의 때를 벗길때에도 남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81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심지어 이발 기계를 사가지고 자기 머리까지도 자기가 해결을 했다.


5. 김 목사의 구제생활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이곳은 서울시 공동묘지 이기도 할뿐 아니라 서대문 근처 빈민굴에서 화재를 당한 사람들을 몰아넣고 한 사람에게 10평씩의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한 빈민촌이었다. 생활비는 세브란스 병원 박천선 사모의 수입으로 충당할수 있었으나 김목사 자신도 나무틈 곳곳에 땅을 일구어 거기에다 채소를 심고 호박, 가지 등을 심어 찬거리는 자급할수 있었을뿐 아니라 이웃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으면서 살아갔었다. 교인이 하도 없으니 예배시간 전까지 문밖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한번 듣고 가시오” 하고 강권전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차츰 교인이 늘어가자 벽을 털어 예배당을  늘림과 동시에 작은방 여러개를 만들어 나그네들도 들어와 자고 가도록 했다.

 나중에 교인수가 백여명이 넘게되자 헌금은 최소한도로 교회비용을 쓴후에 모으고 모아 방이 여러개 있는 집을 샀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방에 기거하게 했는데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1. 생활이 펴질때까지 이곳에 살 것.  2. 돈 만원을 주면 고운소금 장수를 부지런히 할 것.  3. 언제나 주일은 꼭 지킬 것.  4. 수입의 십일조는 꼭 바칠 것.  5. 구제품 우유통에 꼭 성미를 바칠 것. 이래서 서울시내 고운소금 장수들은 거의 아현예배당 신자들이었다. 이같이 하여 사들인 집이 40여호나 되었다. 김목사의 목회방법은 복음 전파와 구제사업이었다. 그는 교회돈을 제직들이 거두어다 주면 그대로 받아 벽장 속에 넣어 두고서 의지할곳 없는 교인들을 살필 집을 사는데와 구제하는 데만 적극 사용하였다.


6. 영향을 받은 사람들


김목사로 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특히 김목사의 정신을 이어 그 정신대로 목회를 하는 목사 내외가 있다. 그는 안병모 목사와 정귀실 사모다. 정귀실 사모는 이화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온 약제사이다. 안목사는 예전부터 다니던 동대문 밖 동신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김현봉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꼭 한번 안수를 받고 싶어서 김목사로 부터 안수기도를 받고나서 부터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에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김현봉 목사가 “우리교회에 나오시오” 하는 말에 “예”라고 대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남편과 함게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군목을 사임한후 부부가 충실한 김현봉 목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지금은 이화대학교 입구 건너편에다 신촌예배당이란 간판을 걸고 교회를 인도하고 있다. 안목사도 머리를 빢빡 깎았고 허름한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사모도 머리는 쪽지고 값싼 무명옷을 입고 김현봉 목사의 신앙정신을 따르고 있다. 이교회 역시 십자가도 없고 피아노나 성가대나 강대상이나 종탑도 없다.

 

 윤남하 목사가 말하는 추종자들은 또 있다. 김목사 사망후 1,200여명의 교인중 반수 이상되는 680명을 데리고 창광교회를 세운 이병규 목사가 있고, 150여명을 데리고 신촌에배당을 세운 안병모 목사가 있으며, 150여명을 데리고 염천교회를 세운 이한영 목사도 있으나 본교회에 그대로 남은 교인들도 있다. 그러나 본교회는 김목사 식대로 머리를 까고 검소한 옷을 입고 예배하는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이 네곳중에 가장 양적으로 발전한 곳은 창광교회로 교인 2천여명이 넘는다. 김목사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 숫자상으로 세계제일의 유년 주일학교를 지도하는 부산의 총공회파의 교주인 백영희 목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정신병자가 휘두른 칼에 맞아 새벽예배를 인도하다가 1990년에 순교를 했다.


7. 마지막 임종과 장례


1964년 12월에 김현봉 목사는 감기 기운이 있는데도 아현동 집에서 목욕을 하다가 쓰러지면서 뒷머리를 땅에 부딪혔다. 그때 마침 흥암교회로 사경회 인도차 떠나려던 참이라서 식구들이 몸이 불편하니 집회를 연기하도록 전보를 보내려 해도 안된다고 우기면서 예정대로 출발하였다. 당시 흥암교회는 교회노선 대립으로 내분이 일어나 있었다. 김현봉 목사는 그 교회를 맡고 있는 조사로부터 사정 이야기를 밤늦게까지 듣고 김조사를 훈계하고 어려워도 그 교회에 더있으라고 권면하며 함께 부등켜 안고 울었다. 그런데 그이튼날 새벽 3시반에 김조사가 방문을 노크해 봤으나 숨소리는 들리는데 대답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요위에 앉아 벼개를 의지하고 기도하다가 쓰려졌는데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간신이 위기는 넘겼으나 이로부터 3개월후 1965년 3월 12일 9시 50분 김현봉 목사는 주의 부름을 받았다. 장례식은 그를 따르던 이병규 목사가 집례했고 시신은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커에 실어 끌고가 화장 했다.

 김현봉 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썻다. 신촌 창광교회를 섬기면서 계약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이병규 목사가 있다. 또 동지의 한사람으로 부산의 고 백영희 목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바지, 저고리를 입고 삭발하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철저히 김현봉 목사를 닮아 보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안병모 목사와 이한영 목사라고 할수 있다. 
 

【참 고 도 서】

1. 이병규 편.『김현봉 목사 강도집(설교집)』염광출판사 간. 2004.(김현봉 목사 사진)

2. 엄두섭 편.『좁은 길로 간 사람들』 소망사 간. 1985. p.185-190

3. 엄두섭 저 영  맥』 은성 간. 1989. p.103 - 164

4. 엄두섭 저.『호세아 닮은 성자』 은성 간. 1987.

5. 정봉기 《김현봉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장로회신학대학 2001 석사논문.

6. 《현대종교》1991. 10월 김현봉 이야기. p.68 - 82

7. 현대종교》1991. 11월 김현봉 이야기. p. 188 - 197 (김현봉 목사 사진)

8. 현대종교》1992. 01월 김현봉 이야기. p. 196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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