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중목사' 김현봉 2

好學 2012. 2. 19. 20:25

'중목사' 김현봉 2

 

 

검은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의 -

                                                          김현봉 목사 생애와 사상

                                                                                                                           이영호 목사
                                                                                                                 (전 현대종교 편집인 겸 편집국장)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단성 여부와 관련해서 손꼽히는  인물들이 있다.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리 주현교부 이 모 씨의 나체춤 사건을 기억하리라고 본다. 나체춤을 추었다는 이모씨가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빡빡 머리에 늘 흰 고무신을 신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는 아현동의 김현봉 목사였다. 그런데 이 김현봉이라는 목사가 교분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바로 맨발의 성자라는 이현필 이고, 한국에서는 종교 다원주의의 시조라고 불리는 유영모와 어울리는 사람이 이현필 이였으며, 이들에게 커다란 감화력을 끼쳐 본을 남긴 사람은 이세종이라는 분이었다.

 

본지는 그동안 유영모, 이현필, 이세종, 전라기인 거두리 이보한의 발자취를 간추려 소개한바 있다. 이글에서는 김현봉 목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특별히 물량주의가 교회안에 팽배한 현실적 상황에서 여기 소개하는 김현봉 목사의 검소한 복음 주의적 삶을 면밀히 살펴 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 김현봉 목사의 생애


 김현봉 목사는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태어났으나 성장은 서울 서대문에서 했다. 위로 형님 한분과 누나가 한분 있어 삼남매였는데 형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러시아 영으로 가고 누나도 시집을 가 청년 시절에는 낙원동 무관에 나가서 검도와 유도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그러던 중 세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예배후 목사가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 라고 말하자 “예” 대답을 하게되어 그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가게 된 것이 계속 나가게 되었다.1)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과연 내가 이나라를 위해 할일이 무엇인가?” 로 고민 하다가 ‘독립운동’을 결심해서 1912년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을 들고 중국의 서간도 땅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학교를 세워 한국인 2세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얼마후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그곳에서도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후 일본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는데 그때 그의 복장은 중국복장에 길게 댕기를 내린 상태였었다.2)

 

 그는 출감후 러시아 영내의 한인노회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1923년 이었고 김현봉의 나이 40세였다. 김현봉의 신학생 시절은 키도 작고 말도 잘 할줄 몰라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으나 남다른 학생이었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조용한 구석을 찾아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못하는 운동이 없어 신학교 시절의 복장은 정구복장 차림이었다. 그는 재학중이면서도 경기도 시흥군 일대 여러 교회들을 돌보며 공부를 했고, 1928년 제23회 평양신학을 졸업을 한후 서울로 오면서는 남대문교회 오순영 목사의 추천으로 공덕리교회를 맡게 되었다.3)

 

 윤남하 목사가 소개한 이때의 시무교회는, 시흥군 서면 하안교회(현 광명시 하안동), 부림말교회(현 안양시 관양동 동은교회), 삼성교회(현 군포시 부곡1동), 모래말교회(현 영등포구 도림2동 도림교회) 가리봉교회(현 구로구 가리봉동), 군포교회(현 군포시), 학천교회(현 안양시 부림말교회에서 약 3키로 가량 덜어진 곳), 양평교회(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4가) 시흥 구읍교회(현 구로구 시흥1동 시흥교회) 였는데 김목사는 이렇게 주일 하루에 9교회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렇게 하면서 신학교 입학한지 5년만인 1928년에 신학교를 졸업했다.4)

 

김목사는 6.25 사변때 본의 아니게 39일 간의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6. 25가 터지자 급한 김에 한강을 넘지못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우선 삼각산으로 피난을 갔었다. 김목사도 삼각산을 헤매다가 자그마한 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는 이굴을 자기 피난처로 삼아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양식을 아껴 먹으면서, 솟아나는 샘물을 생명수로 삼아 지내게 되었는데 식량이 다하자 자연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근처에는 인민군의 군화발소리가 들리고 그래서 소리내어 기도할수도 없었고 기침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런 금식기도를 39일이나 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굴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그의 몸은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미라처럼 되어 부인 박천선 사모 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유엔군의 1.4 후퇴로 대구를 거쳐 창녕교회서 戰時 목회를 하다가 1953년 11월 17일 상경하게 되었다.5)

 

 1995년경부터 김현봉 목사가 1965년 소천해 장례 주례를 하기까지 했던 이병규 목사가 펴낸『김현봉 목사 강도집(설교집)』에 <김현봉 목사님의 이력서>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1884년 출생, 1906년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3인과 함께 집회 출석(입신 22세), 1910년 한일합방때 일제의 감시 받음, 1912년 양정의숙 법과 졸업후 배화학교 교편생활하던 도중 일제의 더해가는 감시를 피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소개장 들고 중국으로 망명(1912-23년),

 

1912년-23년 간도 및 북간도와 아라사(러시아 영토)를 두루 다니며 애국운동과 학교  교편잡고 인재양성에 용력(用力). 연해주 해삼위에서 거주했음(망명생활), 1923년 귀국시 서울역에서 체포되어 투옥됨(39세), 누님과 생질이 보증서고 보석함, 1923년 출옥해서 평양신학교 입학(39세), 1927년 43세시 평양신학교 23회 졸업,

 

1923년-27년 평양신학 재학중 평북 정주교회, 관악 보림말교회, 시흥 구읍교회, 조사시무, 1928년 목사 안수받음(44세), 1928년 6월 16일 16세 연하인 세브란스 간호원 출신 朴天善 양(1924년 진명여학교 졸업. 1944년 간호원직 사면)과 결혼. 1932년 3월 30일 성수주일 문제로 공덕교회 사면, 7인과 더불어 아현예배당(교회) 개척개시(48세),

 

1953년 고려파 38회 총회에서 제명됨(69세). 이후로 교회 자유의 개교회의 특성을 살려 교회가 부흥됨. 1950년-1953년 삼각산 동굴에서 39일 동안 금식케된일 있음, 영성이 놀랍게 신장되고 영력있는 강도 말씀에 교인의 수가 늘어남(경남지방에서 피난생활), 1964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사경회 인도하심, 1965년 3월12일 오전 9시경 자택에서 별세(81세-동년1월 흥암교회 사경회 도중 졸도하셨음)

◎ 유족 및 친척: 형님 김현의, 누님 각1분(3남매) 생질 김창선 등.

◎ 취미 및 운동: 정구, 유도, 격권.

◎ 동지 및 친구: 김도태, 변영태. 어학: 중국어, 러시아어 능통.6)


 

2. 아현 예배당 목회


 본지에 기고했던 윤남하 목사의 아현예배당 탐방기에 의하면, “김목사의 키는5척 5촌쯤 되는데 먹물들여 해입은 옷이라 여름인고로 중의 적삼 조끼, 게다가 단추단 두루마기를 입었다.” 고 표현하고 있다.7) 그 무렵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이었던 28세의 처녀 박천선과 결혼을 하였는데 때는 김현봉의 나이 44세였다. 결혼 직후 그는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2년 3월 31일(수) 그는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아현동 37번지에서 일곱사람을 데리고 아현예배당 개척예배를 드렸다. 그 교회를 개척한 아현동 37번지는 소나무가 꽉 들어찬 공동묘지였는데 정부에서는 이나무들을 베어내고 서울 장안의 빈민들을 이지역으로 이주 시켰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새끼줄을 쳐서 땅 10평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곳에  개척한 예배당은 방 2칸, 마루 2칸, 건너방 1칸을 헐어내어 사용하게 되였다.8)

 

 김현봉 목사는 공덕교회에서 약 1년간 목회를 하던중 자기의 뜻을 펼칠수 없어 독립교회를 세우기로 마음 먹은 것인데, 이때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는 일곱 사람들은 김목사 내외, 장모, 그리고 오응렬, 구영식, 김정은 집사 또 경상도 사람 오씨 등이었고, 그때는 1932년 3월 31일 수요일 이었다고 한다.9) 이병규 목사가 기록한 이력서에는 김현봉 목사가 개척한 날이 3월 30일이라고 하는데 윤남하 목사는 31일(수) 이라고 하고 있다. 30일 31일의 차이는 누군가가 잘못 들은데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1918년 일제가 우리나라에 신사를 들여오고,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고, 그후 전국 각지에도 신사를 세웠다. 1930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신사참배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게 심각한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인데, 마침내 1938년 제27차 장로회총회에서 심사참배를 가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신사참배 통지서가 배달되면 교인들에게 일체 광고를 하지 않았고 김목사 혼자만 알고 지내는데, 이사실을 알게된 일본 형사가 김현봉을 찾아왔다. 그때 김목사는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양쪽에 변을 담아 지고가고 있었는데 형사가 부르자 가다 말고 땅만 쳐다 보고 있었다. 형사는 그의 하고있는 일과 누더기 차림의 모양새를 한참동안 쳐다 보다가 말없이 가버렸다고 한다.10)

 

『좁은길로 간 사람들』의 저자 엄두섭 목사는, 아현교회에는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교회간판, 종각.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도 없었고, 김현봉 목사와 교인들은 사치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들복던 그시절에도 아현교회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한다.11) 이교회에 없는 것 여러 가지를 앞서 말했거니와 다시 덧붙여 말하는 것은 300여명이나 모이는 교회에 장로가 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제직도 처음에는 세웠고 제직회도 있었으나 모이면 의논이 백출하여 김목사의 뜻에 맞지 않는 지라 하루는 교회앞에 “나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완전한 집사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대로 있고 그렇지 못한자라고 생각되거든 다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여 전부 사표를 받았다. 그런데 다 사표를 냈는데도 백 모 집사 하나만 사표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후부터 일체 집사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대신 헌금 걷을때, 주일학교 선생을 반장이라고 불러 그들이 헌금을 걷는데만 수고 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김 목사에게 헌금 일체를 계산도 않고 맡겨 버리고 만다.12)

 이교회를 탐방한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예배당 안을 휘 둘러보니 기둥만도 스물네개. 교인들은 약 300여명. 남자는 머리를 깍았고 여자들은 쪽을 지어 파마머리는 구경할수가 없었다. 남자들의 옷은 그당시 흔해 빠진 서양 구제품 양복이요 여자들의 옷은 검정치마에 흰저고리 뿐이다. 들러보니 강대상이 없고 피아노도 풍금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의자도 없으니 교인들은 전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강대상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h 형 의자가 하나 놓여있어 그위에 떡하니 두다리를 개여놓고 양반식으로 목사는 앉아 무릎위에 성경을 펴놓고 한손에는 파리채를 들고 앉아 있었다”13) 고 한다.

 

이집은 본래부터 성전으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집 한 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식구가 늘면 동편으로 늘리고, 식구가 더 늘면 서편으로, 또다시 남편으로, 북편으로 늘려 놓았으니 도무지 성전 같지가 않았다. 이교회 증축공사(?)도 전문가에게 시키지 않고 김목사 자신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틈으로 바람이 몹씨 불어오고 비올때에는 이음새 자리로 비가 새기 때문에 양푼들을 늘어 놓고 물을 받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14)

 

윤남하 목사의 예배 참관기에 따르면 “그날 성경 말씀을 하시는데 문제나 포인트가 있었는지 잘 기억되지 않고 오직 본문 강해 설교를 하시는데 재미있는 곳에 이르면 10분, 15분씩 강의를 하신다. 어린애 우는 소리가 없고 사담하는자 조는자가 신통히도 없다. 그대신 파맇 리 한마리가 날아오면 손에든 파리채로 탁! 하고 때려 잡는다. 또 여름이라 더운때여서 졸음이 오면 눈깔사탕이라도 빨아가면서 졸지말고 예배를 드리라고 권한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신앙적 삶에 초점을 두고 설교와 목회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15)

 

 윤남하 목사의 글에 의하면 “이교회는 김현봉 목사 혼자의 독자 강단이라 남을 세우지 않는다. 그대신 부흥회가 없으나 1년에 두 번씩 1월 15일부터 5일간. 8월15일부터 5일간 관악산에 있는 벧엘기도원으로 전원 인솔하고 가서 자기 혼자 다 인도, 주장, 지휘해 버리고 만다. 그런때에도 여름이라 더위에 조는 사람이 생길까봐 졸리거든 사탕을 물던지 땅콩이라도 까먹어 가면서 졸지 말고 예배드리라 한다. 또 강해후 헌금까지 하는데만 거의 두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설교중에나 기도중에 일체 ”아멘“ 이나 ”할렐루야“ 가 없고 웃음 소리나 기타 아무 소리도 없이 정숙하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두시간여의 예배인데도 지루하지 않는 듯 하다. 참으로 신통하다.”는 것이다.16)

 

 윤남하 목사의 탐방기에 의하면, “오전 예배는 장장 3시간이나 걸렸고 예배 마친후에 가까운 곳에 사는 교인들은 집에가서 점심을 먹고 오고, 안가는 사람들은 그대로 눌러앉아 구수 한 그릇씩 나눠 먹고 오후 2시 예배에 참석한다.” 고 한다. 요사이 도시교회들의 저녁 예배가 거의 오후 예배로 변했으나 그당시 오후 예배는 아현 예배당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듯 하다. 이에 대해 김현봉 목사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려면 하루종일 드려야 될터인데 저녁예배로 드리게 되면 오전 예배후 부터는 맘대로 지내다가 저녁예배 참석이 부실할뿐 아니라 세상에서 오염된 그 정신으로는 거룩하게 예배드릴수가 없기 때문이오” 라는 것이 김목사의 판단이었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