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韓民族은 고비마다 運이 좋았다

好學 2012. 6. 17. 17:36

韓民族은 고비마다 運이 좋았다

                                                                                                                                             

安秀吉
서울대학교 名譽敎授 / 本聯合會 理事


TV 등 대중매체를 陰性的으로 장악한 左派들의 10년 가까운 언론 조작이 效果를 나타내기 시작. 드디어는 아무도 노골적으로는 左派 배척을 못하고, 思想문제를 거론하면 오히려 ‘색깔론’으로 保守가 斷罪되는 雰圍氣여서, 작년 가을 大選이 다가왔을 무렵에는 한나라黨에까지도 우직하게 社會主義路線 反對를 내세우는 志士는 드물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에 ‘進步’, 또는 ‘革新’이라는 ‘받아들여진’ 基盤에 올려지고, ‘守舊 꼴통’이라는 ‘嫌惡用 이미지’에 등 떠밀린 듯 모두가 다 ‘선진국’구호에 이끌리고 <‘守舊’ 딱지가 무서워> ‘改革’에 항복하여 마치 레밍 쥐(Lemming)와 같이 줄을 지어 水邊을 향해 달리는 척 해야 했다.
朴槿惠는 黨 代表 자리에서 떠났고, 改革派가 黨紀를 잡는 다고 한나라黨 내부에서 ‘뼈대 있는 右派’는 당내 少數로 밀려 사실상 힘을 잃어 除去돼가고 있었다. 

左派가 機會있을 때마다 손을 보아 間接가공한 사회분위기와 TV 등의 제반 ‘告發’프로그램 등에 의해서 ‘社會不滿’과, ‘지나친 批判’이란 否定性向 體質로 길러진 ‘386 세력’과, 그 배후 들(골수 左派)에 의해서 열린우리黨의 黨員들은 물론, 한나라黨과 ‘朝․中․東’ 등 保守言論까지도 名分과는 달리, ‘改革’을 指向하는 척 해야 했고, 나아가서는 左派가 언론을 거의 支配하고, ‘누릿꾼 인터넷’의 댓글 들을 ‘神託’條로 매일 報道하는 것을 容認해야 했던 것이다. 한나라黨은 이미 ‘保守’의 旗幟를 거의 否定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단 左翼은 學窓時代 몰래 모여서 마르크스/레닌을 輪講(參與者가 교대로 講讀하는 세미나-)하곤 했던 자기네들의 本性을 나타내는 대에는 愼重해서, 政權을 잡고도 한참동안 左派性向을 드러내는 일을 뒤로 미뤄가며, 국민을 洗腦하는 준비段階를 착착 밟아 전체 사회 여론이 左派受容으로 바꿔 가는 熟成의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洗腦된 그들 左派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당시에는 40년간을 ‘反共’으로 다져졌으니 당연히 保守이고> 가난했던 옛날을 잘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大衆은 그 때 당연히 擧皆가 ‘보수성향’이였던 것이다.

DJ-MH 時代에 左派들은 10년을 걸려 <先進標榜>매스컴의 도움을 받아 ‘保守의 무리’들이 하는 모든 批判을 ‘색깔론’으로 구석에 몰아붙일 수가 있었다. 그 때 한나라黨을 포함해서 政治界는 ‘保守의 뿌리’인 국민, 즉 ‘Silent majority : 말없는 대중’에서 떠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言論 등의 분위기에 속아 國民의 <너무나도 빤한> 뜻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지난 여름과 가을 무렵, 국민이 그리고 在鄕軍人들이 울분을 못 참아 서울의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들은 한나라黨이 나서 줄 것을 기대했으나 한나라黨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해서 言論, 行政, 政黨 內의 左派들이 사람들에게 ‘現實’로 통용시킨 거짓 心象인 ‘改革과, <거의> 統一’의 ‘假象’을 믿으며, 몇 개 寸鐵殺人級 캐치프레이즈(‘權威主義 정치’, ‘물갈이’, ‘차때기腐敗政黨’, ‘밀어붙이기’, 그리고 ‘강부자/고소영’, ‘백골대 復活’ 등)를 만들어 인터넷 등을 통해 流布시킨 다음, 時機를 봐서 그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이 ‘現實일 수 없는 虛像’이 조금씩 조금씩 ‘大勢(?)’로 行勢하기 시작하곤 했고, 國民은 그것이 眞實이 아님을 알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는 黙民’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눈치만 보면서 상기 ‘造作된 虛像’이 ‘현실(?)’로 행세하는 것을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고 自己들의 생각은 내밀지 못했고, 이 가장 흔한 ‘保守’의 國民感情을 代辯해 줄 政治人들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盧武鉉의 ‘市民’이 아닌 ‘一般國民’ 들은 어림잡아 전체 인구의 75%는 넘었을 것이다.

‘市民革命은 繼續된다’ 고?

‘노사모’모임에서는 “지금도 市民革命은 계속된다”고 말하면서도 “당신의 색깔을 보여라”는 朴槿惠의 公開質問에는 대답을 못했던 盧武鉉이 드디어 “나는 中道左派요”하고 말한 것은 상기 ‘實在’로 통용시킨 ‘虛像’과 ‘假象’으로 한국사회 거개가 ‘염색, 즉 洗腦’가 된 다음부터였다.
40년을 ‘반공교육’을 받은 全體國民 앞에 盧武鉉은 朴槿惠의 질문을 받고 1년 반을 묵히다가 겨우 눈치보아가면서 ‘中道左派’라는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그 때쯤 되면 ‘TV를 통한 國民加工이 잘 進行’됐을 터이니 ‘時機가 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昨年 말 大選 때 大勢는 한나라黨 편에 있는 듯했지만 그 뒤에 흐르는 도도한 흐름은 여전히 大多數 ‘保守의 國民’이었고 黨내 386세력을 무시 못했던 한나라黨의 ‘갈팡질팡하는 무리’의 事態 把握力으로서는 그 絶對多數인 國民의 保守希求의 뜻을 理解 못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全體國民들이 한나라黨에게 바라는 것이 ‘保守의 主唱’이라는 사실 앞에 눈을 가리고 左派와 함께 ‘革新’을 예찬했던 것이다. 한나라黨은 <뒤에서 386세대를 조종하던 左翼이 조성해낸 假象과 公論(?) 흐름을 보느라> 갈팡질팡했고 당내 386세력에 등 떠밀려 金容甲 등 보수의 ‘뼈대 들’을 내쳤던 것이다. 그 후 한나라黨은 사과도 수박도 아닌 ‘群小 카멜레온 우굴거리는 주머니’꼴이 되고, 作家 李文烈은 한나라黨에 절망했다.

保守의 劇的인 부활

大選 두달前에 李會昌과 沈大平이 나서서 “保守黨”을 당당히 내 걸어 죽어가는 ‘국민의 氣’를 再点火한 것은 그들의 現實的인 功勞였지만 奇蹟으로 分類할 만도 한 큰 事件으로 이렇게 해서 國民은 希望을 되살려 大選투표장에 가게 됐던 것이다.
盧武鉉과 KBS, 그리고 특히 MBC의 실수는 ‘朝中東’(‘조중동’은 또 하나의 陰害目的의 캐치프레이즈)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체절명의 벼랑 끝으로 밀어붙여 결국 大選이 임박했을 때 ‘양심을 거둬치우고’ 發惡級 論調로 싸우게 만든 데에 있다. 知識階層들이 ‘公定과 冷徹 指向’을 접고 억지스럽게 싸웠고, 역시 危機感을 갖게 된 ‘점잖은 75%’도 지난 날 개을렀던 발과 입을 움직여 친구들, 이웃들과 친척들에 發說하고 설득하기 시작해서 드디어는 投票 歷史上 드문 다수표로 李明博 候補者를 選出해냈던 것이다. 
一般國民들도 <어쩔 수 없는> 자기들의 보수 性向을 들어내고 이웃을 說得했고 위기감으로 平常時에는 ‘차마 심한 소리는 못하’는 그 本性 들을 떠나 이미 ‘公正하지도, 점잖지도’ 않는 모양으로 억지를 해가면서 그래도 결국은 大選勝利를 거두게 된 것이다. 참다못해 국민의 입이 열린 것이다.

大選 勝利가 10년을 절망했던 韓國民의 시초의 奇蹟이다. 

그러나 大選 完敗 속에서도 左派의 전략은 迅速했다. 그들은 그러한 事態를 발판으로 時間이 걸려도 다음에 勝利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全敎組의 策士들만해도 1000명을 넘는다는 소문인데> 그들은 다음 단계인 國會議員 總選에서 保守거물 들을 ‘나이 먹었다’고 몰아내 “실질적인 政治的소득”을 높이려고 劃策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의 左右싸움을 접고 그 다음 布石으로 世代 對立을 겨누었던 것이다. 
도대체가 그렇고 그런 보통 사람들 일부 연령층을 끊어내(斷) ‘386’이라는 ‘로고’로 다른(異) 것으로 만들어냈을 때 이미 그들과 그들 背後세력들은 “불편한 中間層과, 保守信念 先輩”들을 밀어내고 ‘早期 世代交替’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앞 세대를 밀어내고, 學窓시대부터 미리 ‘洗腦해놔서 자기네들에게 편리한 年令層’으로 交替시키겠다 뜻으로 이와같이 ‘過去의 영향을 完全단절하겠다’는 作戰의 壓卷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같은 해에 <동시에> 교체해 斷絶을 크게 하자는 盧武鉉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잽싸게 總選 때 保守巨物 및 多選 國會議員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음흉하게 손을 썼다.

‘물갈이’구호에 속은 公薦審査委員長들

총선 出馬를 위한 열린우리黨(그 후 左派정당들을 통합해서 지금은 ‘통합민주당’)과 한나라黨 公薦심사위원장 들은 政治初步者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귀속에 먼저 投入된 洗腦자료는 ‘물갈이論’이었다. 嚴正한 사람들 귓속에 이러한 一般通用의 클리쉐(cliche, 익숙한 通用字句)를 슬쩍 끼워 넣어 그들에게 ‘嚴正함’에만 注意를 집중시키고 그 그늘에서 한국 立法府 60년 역사를 통해 얻게 된 國會 經驗/遺産의 가장 중요한 ‘웃국’을 걷어버리겠다는 策略이었다. 따라서 ‘엄정’印象과 함께 얻어질 公薦者 名單은 다른 뜻에 있어서는 左派의 ‘숨은 前進’이 될 뻔한 것이다.
그것은 國會를 세워 논 체 去勢해버리자는 그들의 오묘한 戰略이었다. ‘물갈이 論’을 기조로 삼은 審査란 사실 國會를 <젊은世代를 여러 가지 형태로 ‘실속’驅使하고 있는> 左派의 支配下에 두게 만든 궁리였던 것이다. 
國會의 全體機能을 國會議員 들이 완전히 터득하고, 國會를 본연의 ‘對政府 牽制機能’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민주정부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할 기회가 많았을 多選議員이 絶對的으로 필요했던 것인데 大前提가 잘못 부여된 심사위원장 들은 그러한 잘못된 기준에 따라 ‘공정(?)한’ 審査를 했고, 그래서 國會議員을 <地域區民을 代表한다는 本來의 機能을 망각하고> 政黨의 이해관계로만 加工한다는 陰性的 ‘꾸데타’가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란 원래 나라전체나 政黨의 打算이 아닌 ‘지역구’를 爲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자기들 路線에 가까운, 그러나 ‘選出가능성이 가장 큰’ 후보를 선정해야 하는 것이고 ‘선출된 國會議員들을 어떻게 끌어들이고 활용하느냐?’는 다음 문제였다.
豫定대로 됐더라면 국회가 全般的으로 ‘물갈이’가 되고 그렇다면 국회가 386세대로 채워지고 평균연령은 내려갈 뻔했다. 그것은 ‘彈劾政局’의 덕을 입어 386세대가 대거 들어섰던 前例에 따라 또 하나의 左派의 勝利로 될 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兩黨이 <다 비슷비슷하고> 함께 ‘全幅 改革’을 꿈꿨던 階層이 뽑히게 되고, 결국 386 및 그들을 부리(使役하기)는 政治家 들의 완전승리가 될 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黨利만을 위해서 國會議員 입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으로 地域區民들의 民主主義구현을 위해서는 성립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國會내에 <나이가 어려> ‘假象’ 民意나, ‘조작된 通論’을 갖고 間接操縱을 할 수 있는 386세대 人員數가 많게 된다는 양상만을 봤지, 推薦된 후보가 選擧에서 敗北하는 危險性은 못 보았던 것이다. 각각의 地域區의 民心을 얻고있는 사람을 추천해야 나중에 손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물갈이’라는 엉뚱한 ‘뜻’을 가진 ‘黨의 생각’ 만에 沒入된 것이다.  

끝내 모르고 지난 커다란 危機들

그래서 ‘물갈이論’을 기조로 삼은 그 公薦審査는 한국 保守指向 國民의 역사에서 가장 큰 危機였던 것인데 크게 주의를 끄는 일 없이 進行이 됐다. 多數국민들은 大選에 이겨 勝利에 도취했다가 總選出馬 公審委 때 KO를 당할 뻔한 것이다. 言論은 그 다음 節次인 ‘국회議長 심사’ 때 ‘안강민 꾸데타’를 이야기하지만 總選을 위한 ‘公薦審査’가 사실은 한나라黨 및 保守性向국민을 위해서 더 큰 危機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 地域區에서 絶對的으로 當選自信이 있는 人士들은 그 審査結果에 만족하지 않고 脫黨한 후 無所屬 등으로 出馬해서 결국은 <한번은 떠났던>자기 黨으로 후일에 돌아오게 됐다.
그 결과 ‘물갈이論’을 슬쩍 먼저 바닥에 깔았던 左派들의 뜻과는 반대로 새로 뽑힌 國會議員들의 平均年齡은 오히려 올라갔다. 국민은 놀랍게도 386후보들을 내치고 自己가 원하는 후보들, 그리고 믿을만한 年齡層을 뽑았던 것이다.
이것이 (쉽게 나타내지는 않으나) 국민들이 賢明했던 탓으로 얻게 된 제2의 기적인 것이다. 公審委의 ‘一生一代’의 실수를 國民이 되잡아준 것이다. 이것을 두고 ‘偶發 成福’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眞實은 각각의 選擧區에서 한 표 한 표 잘 뽑음으로 해서 국민이 이룩한 成果임을 認定해야 할 것이다.
제3의 기적은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일어났다. 근소한 票差로 保守性向의 孔교육감이 이겼지만 우연히 이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危機感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機能이 작용해서> 必要한 만큼 투표자 動員이 된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다. 그 때 라이벌은 敎育區 선거를 정치이슈化해서 투표전날에는 ‘쥐의 윤곽과 꼬리’를 그리(畵)고 그 안에 이명박을 뜻하는 ‘MB’를 써넣고, 주변에 19개의 비수 모양을 그려 넣어서 ‘찔러 죽이자’는 煽動을 했다고 하니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이것은 大選과 總選에 이어 保守大衆이 만들어 낸 3차례의 勝利임을 사람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奇蹟은 세 번 일어난 것이다.
우리 국민은 결국 세 차례 ‘意思’를 뚜렷하게 표명해줬고, 이에 따라서 깨닫는 바가 있는 左派政客은 차차 政界를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 중에는 “黨에서 누군가가 責任져야 하기”에 不出馬하고 政界에서 물러선 김한길, 大選이전에 물러선 李海瓚/金槿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해진 孫鶴圭 등이 있어서 그들은 앞으로는 政治의 여러 궂은 꼴들을 안 보게 됐으니 지금 남아서 固執을 부리고 있는 群像에 비해서 똑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사회혁명’이라는 젊어서의 꿈을 이룩하려고 지난 10년 별의별 社會改革 ‘實驗’에 全力投球를 한 사람들이다. 깨끗하게 물러서게 된 그들의 運命은 그래도 좋은 편이어서 앞으로 機會性 再發만 없다면 그 諦念은 尊敬할만도 하다.

龍 받치는 뻘 개천과 뜻 있는 泥田鬪狗

韓國民이 지난 一年間의 역사는 奇蹟의 연속이었다. 한나라黨은 국민이 생각하는 그러한 黨은 아니었는데도 李明博을 保守性向 대통령으로 公薦해서 국민이 원하는 ‘光復’을 얻게 해줬지만 그 후로는 계속된 不協和音을 내면서 시류를 못 읽은 ‘北韓방문’ 提案 등 <合議되지도 못한> 소리를 내기도 해서 이제 와서는 그들이 어떻게 李明博을 保守國民에게 선물하게 되었는지 疑訝하게 만들고 있다. 
혹시 그것이 그들의 ‘偶發成福’이었을망정 그래도 그들의 공로는 컸다. 그들은 ‘기댈 수 있는 큰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泥田鬪狗의 韓國 黨爭의 역사와 來歷은 결국은 그 百年河淸의 混濁속에서 反對黨과의 均衡을 攻防하는 데에 쓰이는 主된 堡壘이고, ‘머리카락을 네 갈래로 가르는(split a hair into four)데 세월을 보내는’ 黨爭의 긴 역사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러한 ‘攻防싸움’을 해야 한다는 뜻에 있어서 지난 몇 달 동안 다시 크게 寄與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攻防의 어려운 均衡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行政府가 自信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에 결국 그러한 泥田鬪狗 같은 정당들間의 均衡이 行政府가 일하는 데 크게 寄與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保守를 강하게 내걸지 못하고 거의 ‘進步’ 旗幟를 따라갔던 한나라黨이었는 대도 결국 ‘保守의 정권’을 창출했고, 總選을 통해 <새 大統領 側近인> 두 李氏가 걸러진 것 역시 새政府가 全敎組나 左派와 決裂할 수 있는 動機가 된 것인데 이것은 모두가 사람들이 깨닫지는 못했던, 그러나 아찔했던 危機들인 것이다.      “이기고 있으면서도 제 발로 걸어 나가 降服하는 사람들(voluntarily surrendered)”로 이름 붙여져 있었던 南韓의 <主人 잘못만나 漂流했던> 保守國民들에게 政黨들 間의 偶發性連續의 情勢흐름이 終局的으로는 놀라운 光復을 가져오고 만 것이다.  

60년마다 찾아오는 光復

이제 檢察을 포함해 全體 公務員들이 이명박의 생각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해서 눈사람效果가 시작되고 있으니 앞으로 安心해도 될 것이다. 이제는 左派들이, 이 ‘右를 향한 改革’흐름을 막아가며 ‘지난날의 假象’을 다시 造成해가면서 社會主義性向 改革을 試圖하기에는 上記한바 눈사람 加速은 이미 붙어버린 것이다. 公務員들이, 그리고 言論들이 서서히 새 政府의 政策方向으로 따라 흐르고 加速을 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나라黨을 키우고, 한나라黨 生理에 忠實해서 (혹시) 選出이 됐더라도 ‘출발했을 새정부(가상)’의 活動이 지금의 與黨-野黨間아옹다옹으로 限界가 될 뻔한 또 하나의 大選候補가 끝을 보지 못한 것도 우리의 跳躍을 위해서는 역시 하나의 奇蹟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看過하기 쉽지만, 이와 같이 考察해보면 지난 해 우리 韓民族이 걸어온 고비마다가 사실은 奇蹟의 連續임을 깨달을 수가 있다.
2008올림픽 季節에 全世界가 놀라게 된 것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韓國選手들 젊은 ‘肉體’들의 빛나는 勝利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