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辱이 욕을 부른다

好學 2012. 4. 27. 22:19

 

辱이 욕을 부른다

 

 

내가 자랄 때는 흉악하고 징그러운 욕을 일상용어로 알면서 듣고 자랐다.

내 주변 어른들에게 `미친×`이나 `지랄한다` 정도는 너무 고운 말이었다.

많이 듣던 욕으로는 `쎄(혀)를 만발이나 빼 토막낼 ×`이라는 말이었다.

지금 들으면 몸이 떨리는 것이지만 마냥 예사로 듣는 말이었다. 욕은 상대를 얕보거나 무시하고 부모를 저주하거나 잔인하게 죽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 고향에서는 친근감의 표시로 더 진한 욕을 했고 더러는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기 표현에 익숙하지 않아도 둘러 욕으로 관계형성을 하면 상대도 친절의 또 다른 말의 표현으로 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것인가. 왜 욕이 발달했는지, 지금 청소년들이 왜 욕을 뱉기 시작했는지, 특히 남성들이 더 욕을 하는지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욕이라는 것이 진정의 가면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러다가 입버릇으로 발달해 잘못 기능을 하다가 미움이나 저주나 인격모독으로 변절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문디자슥`은 말을 터는 첫 번째 인사이기도 했다.

거기다 성과 관계가 되는 비유로 깊게 들어 가는 것이 욕이었던 것이다.

궁금하고 관심이 있는 부분을 실제 경험하기는 어려우니 욕으로 변질시켜 간접경험으로 유도하는 심리적 현상이 욕일 때가 많지 않았을까.

인간이 가진 말은 인간의 가장 특권이며 선물이다.

이 소중한 말의 사용법에 요즘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 욕은 가뜩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나이가 주는 초조감으로 괴로울 때 욕으로 받는 상처는 몸에 마음에 잔인하게 저장되어 성격 형성에까지 방해를 할 것이다.

특히 요즘은 그 욕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니 이상하게도 입안에 맴돌고 뱉으면 이탈 현상도 경험하면서 미묘한 쾌감도 느끼는 욕을 내용도 모른 채 사용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곱고 좋은 말은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청소년들 욕은 가장 먼저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에게 상처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두 개 꽃나무를 각각 다른 방에 놓고 한쪽은 낮은 음악을 흐르게 하고 한쪽은 욕을 시간마다 퍼부었는데 욕을 들은 꽃나무는 결국 시들어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무기가 없을 때 나무를 자르는 방법도 흉한 저주였다.

"우리는 너를 싫어해.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며칠 많은 사람들이 욕을 퍼부으면 나무가 실제로 시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폭언이 생명에 끼치는 영향은 이런 것이다.

경기도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시간에 욕의 어원을 짚어가는 욕 수업을 했다. 욕을 알고 부끄러웠다는 학생이 많았다.

충격적이고 혐오감이 심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욕설 상호평가제를 실시한 이 학교에서는 한 학기 동안 욕을 얼마나 했는지 점수에도 반영했다고 한다.

자신이 얼마나 욕을 하는지 기록해 보고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 학교에서는 이름 뒤에 반드시 붙는 욕이 사라졌다고 한다.

욕이 사라지면서 불안과 상처와 분노도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욕의 일상화로 청소년의 대화법이 서툴고 어색하게 되고, 자기 나라 말도 제대로 못해 엉터리 존대법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들은 말이지만 하버드대학을 나와도 매너가 빵점이면 취직이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현실에 아름답게 성실히 적응해 가려면 문화적 소양, 즉 말 사용법이 아름다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인성교육은 살아 있는 시간에 지속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꾸짖기 전에 어른들도 함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스승과 학생이 함께 노력해야만 하는 반드시 필요한 교육의 입문이 아니겠는가.


[신달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