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기도]祈 禱

중보기도와 기도의 차이점

好學 2012. 2. 25. 12:20

중보기도와 기도의 차이점


 

 

모든 기도가 중보 기도는 아니다. 그러나 중보 기도는 모든 기도를 값지게 한다.

중보와 기도가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보란 단지 다른 사람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리라 여긴다.

하지만 디모데전서 2장 1절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바울이 중보와 기도에 분명한 차이를 두었다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한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중보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소위 일반적인 기도 이상의 무엇인가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틈(Gap) 사이에 서기 위해.

라틴어에서 중보(영어로는 intercession)의 단어는 inter cedere이다.

이 단어의 뜻은,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투고 있는 두사람 사이를 의미하는 "갈라진 틈사이에 서다"란 말이다. 중보는 다른 사람 혹은 민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나서는 것이다. 이 예로써 마르틴 루터는 그의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고 이로 인해 기소된 후 다음과 같은 고뇌에 찬 말을 하였다. "내가 여기에 서있는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그 자리를 지키며 결과를 볼때까지 이를 위해 맞서기로 각오하였다. 중보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우리가 응답을 받을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예언서를 통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 22:30) 성경의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도 단지 한 사람의 중보자를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가 시편 106편 23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로 인해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선 모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중보는 삶이다.

중보 기도는 기도의 형태를 넘어서 삶 자체이다. 중보의 기도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계 열방과 민족을 보며 중보의 삶을 사는 것이다. 중보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드려지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따라서 "나는 교회에 가서 중보 기도를 위해 한시간을 드렸다"라고 하기보다는 한시간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을때까지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전시간적 과제를 선택했음을 말하고 있다. 중보의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삶을 배우자. 예수님의 삶 자체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중보자로 선 삶이었다. 중보자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며 기도의 요청에 대한 계속적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한 항상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보일때까지 그의 마음과 의식속에 항상 기도의 목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중보는 일체화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기도할때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개입시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아마 우리는 우리자신의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고 그 한 모퉁이에 앉아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일들을 아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면하신다. 그러나 중보자에게는 그가 기도하고 있는 대상과의 깊은 일체화를 요구하고 있다. 느헤미야서에서 다음과 같이 예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느1:4-6). 느헤미야는 그가 기도한 이들과의 완전한 일체감과 매우 견고한 방법으로 그의 어깨에 고통을 지웠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죄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죄요 우리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느헤미야는 그가 기도했던 이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의 기도는 어떤한 거리감도 없었으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기도에 대한 필요와 기도의 목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선 것이었다.

 

중보는 희생이다.

중보가 희생과 전시간적인 개입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게되면서 우리는 중보가 바로 희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인 기도에서는 우리의 시간을 전적으로 희생하지 않지만 우리의 자신을 무엇인가와 혹은 누군가와 동일화할 때에는 우리의 매일의 스케쥴, 감정적인 개입, 우리 자신의 의지 등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의 모델이다. 그는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애에서 3년간의 공생애 기간을 보내셨으며 그후 2000여년간을 중보자가 되셨다는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줄때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희생하였다. 우리의 희생이 결코 이와 동일한 방법일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수 없으며 죄를 대신 질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기도의 요청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시간과 자원들을 희생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요구하는지 보실 것이다.  

 

중보는 수치를 무릅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과 죄 뿐인 우리를 위해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예수님도 이것을 감당하기 힘드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것이 중보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참된 중보자는 이러한 수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이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수치심을 안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를 하였다. 의인 50명이 10명 까지 숫자가 바꿀때 마다 실망과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 비참하고 처절한 중보기도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가운데 롯을 구원하는 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중보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직무이다.

중보는 그리스도의 온몸을 의미하는 직무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관련하여 믿을수 없는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다. 소위 연합된 기도에 약속된 능력을 생각해 보라. "...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그러나 단지 회중의 소수만이 자신들을 중보에 참여시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축복의 일부를 놓치고 말것이다. 중보는 그리스도의 온몸에 있어서 한 지체인 것이다.  

 

중보는 하나님의 뜻을 이르는 것이다.

중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 하나님이 보여주시도록 열린 마음으로 그분께 물어야 하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앞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기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가 도무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이고 주의깊게 듣는것은 중보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활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중보는 일이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먼저 소망이 있어야 하며, 이 소망이 결단으로 이어지고, 다시 훈련을 통해서 한 사람의 중보자가 되어 지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하나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배우기가 결코 쉽지는 않으나 가능함을 의미한다. 중보는 놀라울 정도로 도전을 주는 직무이다. 기도 모임이라고 불리우는 많은 모임들은 단지 몇 분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하나님 앞에 사실은 위로와 휴식을 갖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도 모임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중보일 필요는 없다.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규칙적이고도 지속적인 훈련의 시간이 요구된다. 중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더 높이고 우리 자신을 더욱 기도에 헌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