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욘 1:11-12)

好學 2012. 2. 4. 07:17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욘 1:11-12)

 

 

함박눈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어제 저녁에 온 눈을 첫눈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올 겨울들어 두 번째 눈입니다. 눈이 오면 특히 젊은이들이 좋아합니다. 친구들이랑 추억만들기에 정신이 없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시절에는 첫눈 오는 날 덕수궁 돌담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주종을 이루었었습니다. 제가 98년도 영국으로 안식년을 떠나면서 불행히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두 딸이 고3이 되는 바람에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아내가 남는 역 기러기부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인삼과 산삼 다음에 고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려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려고 종로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허리우드 극장엘 갔는데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니까 눈이 한 40- 50㎝가 왔어요. 무릎에 찰 정도로 왔어요. 서울에서 이처럼 눈이 많이 쌓인 것을 보기는 처음인것 같았습니다. 어렵게 차를 가지고 오는데 MBC 앞에서 더이상 갈 수 없어서 길옆에 주차해 놓고는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가며 눈길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시청앞 역에서 지하철을 타야 하기에 불가피한 코스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답니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들고, 목회를 하면서 부터는 왠지 눈이 오면 반갑기 보다는 불편하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눈길에 나이 드신 성도들께서 빙판길에 넘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자동차를 가지고 오는 분들에겐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빙판길을 운전하려면 사고 위험도 높고 시간도 배나 소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 때문인지 눈이 와도 이제는 반갑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린것 같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제게는 눈 때문에 한 가지 걱정이 더 늘었습니다. 이유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복무하는 아들 때문입니다. 밤 12시라도 눈만 오면 나가서 쓸어야 작전 도로를 확보하기에 시도 때도 없이 눈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하는 아들이 애처러워서입니다. 일기에보에 강원 지역에 대설주의보라도 발령되면 얼마나 염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스키를 좋아하는 분들은 스키타는 계절이 왔다고 반가워하는데 말입니다.

뉴스를 보니까 지난 정부시절 도청문제로 나는 새들도 떨어뜨린다고 했던 권력기관의 최고 책임자들이 줄줄이 구속이 되는 안타까운 뉴스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나 장관과 통화하는 내용까지도 도청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도청이라는 것이 몰래 남의 정보를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그 용도도 순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국정원 차장을 지냈던 한 분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총장으로 존경과 명예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 분이 몇 번 조사를 받고 나서 정신적 고통 속에서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자신이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진실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는 의무는 감당했지만,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평가입니다.

어떤 이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자신으로 인하여 고통 당할 사람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목숨을 바꿀만큼 소중한 가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은 어떤 가치가 여러분들의 목숨과 바꿀 만큼 소중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과거 6. 25와 일제시대에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라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엄청나게 큰 배도 깨뜨릴 만한 큰 풍랑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고백한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결단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바로 요나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잘못된 일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에서 그는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존경심도 생기게 됩니다.

10절을 보면, 폭풍의 원인이 요나 자신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기 때문이라고 무리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읍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누구에게서 비롯됐는가를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인정하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니까 바다가 점점 흉흉하여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자기의 죄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흉흉해 졌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곧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고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진솔한 고백도 필요하지만 더 나아가 죄에 대한 분명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빌리고 갚지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찾아 가서 내가 갚지 않은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백해야합니다. 그리고 돌아온다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이자까지 더하여 갚아야지요. 갚았을 때 그 문제는 종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평안의 성도들이 눈물겹게 중보기도하고 있는 일이 1.1.2 태신자 기도운동입니다. 지금 827명의 중보기도자가 1,778명의 태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온 교회가 그렇게 한 해 동안 기도운동으로 난리가 났는데도 전도는 커녕 중보기도에도 동참하지 않았다면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명의 태신자도 못 만들었다면 크게 잘못 됐지요. "주님, 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그만입니까? 고백한 다음에 어떻게 해야돼요? "주님, 이제 한 달 남았지만 제가 중보기도에 동참하겠습니다. 저 부산에 있는 시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저 광주에 있는 친정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름을 적어 책갈피를 만들어 성경책에 끼워놓고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진정으로 그 고백은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서 18장 20절은 말씀합니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못할 것이요. 아비도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못할 것이라" 무슨 말이예요? 아무리 아버지가 믿음이 좋고 은혜가 넘쳐도 아들의 죄를 대신 담당 할 수 없고, 아들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이 행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대단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구약적인 개념을 가지고 요나 자신도 그런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려고 하면 어느 누구가 아니라 내가 고백한, 죄를 고백한 바로 당사자인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단합니다. 12절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나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 있는 회개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책임있는 사회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고통을 받지 않습니까? 이 사회의 어느 누구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사회. 수백명의 총에 맞아 죽어가도 한 사람도 총을 쐈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 속에서 이미 익숙해져 있어요. 그냥 발뺌하면 시간만 지나면, 국민들의 여론만 잠잠해 지면 괜찮아지는 그런 사회 속에 우리는 길들여져 있어요. 저는 가끔씩 보면 멀쩡하던 사람이 2-3일만에, 일주일 만에 어떤 병 때문에 다 죽어간다고 병원에 보석으로 나와야 한다고 그런 뉴스를 들으면 아주 우스워요. 웃기는 사람들이구나.

자기의 책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고, 그거에 대해서는 온갖 머리를 다 짜내는 사람들, 책임을 지는 부분에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국방부 장관이 그렇게 똑똑하고, 왜 그렇게 바보 같고, 어리부리 한지 몰라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답답하더라구요.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저렇게 갑자기 바보가 되었는가.

저는 어제 말씀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찬송이 있었어요. 제가 설교 준비하다 말고 이 찬송을 부르다가, 이 찬송을 부르다가 더 마음이 감격이 되어 가지고, 섹스폰으로 제 방에서 이 찬송을 한참을 불렀어요. 밤 9시- 10시 그 사이에 스스로 찬송을 하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다같이 불러볼까요?

편지를 써도 아침에 쓰는 편지와 저녁에 쓰는 편지가 다르다고 하지요. 저녁 9시- 10시에 필리핀선교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이 찬송이 마음 속에서 딱 떠올랐습니다. 제가 몸으로 많이 불편한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참 많이 죄송하고, 제가 할 일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참 괴로웠습니다.

23년째 평안의교회를 시무하면서 주일예배를 제가 있으면서 섬기지 못한 것은 제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한 달동안, 정확하게는 11월 2일부터 제가 어제 기브스를 풀었으니까 12월 3일까지 꼭 한 달동안 저는 많은 것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명절 때보다 성도들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참 감사했어요. 성도들의 사랑이 참 감사했어요. 당회 때 간증을 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제가 결단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목사를 사랑하고, 격려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저버릴 수 있는가?

가끔씩 사람들이 저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힘들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저의 멱살을 잡고 물리적으로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명의 자리에서 떠나려고 할 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세상적인 일에 더 분주할 때 저는 그런 일을 바라볼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과 헌신을 가지신 분들을 만날 때 그 분들을 위해서 내가 죽어야지 하는 새로운 용기가 생깁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사람들을 그 시련의 자리에서 피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내가 좋은 건강, 좋은 환경 속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은 뒤로 밀어 놓고, 내 방법과 내 환경 가지고 일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어려운 일 당할 때 우리가 주님을 더 의지하면서 간다고 하는 일, 이 찬송이 저에게 얼마나 샘솟듯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 찬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세월 지나갈 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목회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제 실력이 높아지기 보다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 커지기를 사모했고, 아무 일을 만나도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이 분명한 고백이 다시 한 번 제 안에서 싹트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요나, 사실 요나 때문에 폭풍이 생겼습니다. 요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한 분명한 고백과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제가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선택이라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그러한 요나의 결단을 보면서 우리는 이 요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그가 선택한 죽음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에게 나를 비롯한 우리 모든 평안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다름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인 줄로 믿습니다.

문제해결의 열쇠, 폭풍을 잔잔케 하는 열쇠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희생과 헌신이라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바로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희생과 헌신의 결단이 여러분에게 함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축구 선교회가 운동을 하다가 우리 강집사님이 넘어져서 오른팔이 부러졌다고 그래요. 수술을 네 시간이나 받았다고 그래요. 제가 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했습니다. 담당목사님들이 심방을 가고, 회원들이 심방을 갔습니다.

전화를 할 때 아내 백집사님으로부터 감동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심방을 갔던 분들이 감동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몇몇 기도회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 평안의교인이 백집사 같기만 하면 좋겠다.

우린 조그마한 문제만 생겨도 교회 때문에, 교회에서, 심지어 어떤 분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점심 먹고 그 다음에 다른 시장에 가다가 넘어져서 사고가 나도 ‘언제 그랬어요?’ ‘교회 갔다와 가지고 점심 먹고 시장가다가 넘어졌다’는 거예요. 교회를 갖다가 연결 하려고 애를 쓰더라고요.

그냥 무슨 보상이 안 되나, 책임을 안 지어 줄건가 그렇게 어떤 기대가 많아요. 우리 동료 목사님이 축구하다가 오른발이 부러져서 장시간 석달간 기브스를 하고 입원해 있었어요. 제가 본인의 일이니까 모두가 외면하려고 그러는데 설득해서 우리 어려운 교회 동역자, 혼자 휴가 갔다와서 다쳐도 도와줘야 할 일인데, 동역자가 운동을 하다 다쳤는데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돈을 대도, 다른 교회도 돈을 대서 350만원 수술비를 만들어줬어요. 제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후배들이 교역자 회의를 마치고 몰려왔어요. 제가 농담으로 그랬지요. 수술비 안 마련해 주나? 목사님교회는 큰 교횐데요, 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책임을 지는 일도 안 지려고 하는 사회 속에서 책임을 안 져도 되는 일을 책임을 질려고 하는 분들을 만나면 신선한 기쁨이요, 충격이지요. 저는 그래서 저는 또 백집사님이 자랑스럽고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자랑스러운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 또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이 폭풍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의지입니다. 주님,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 선교회를 위해서, 우리 지역을 위해서, 우리 부서를 위해서 제가 희생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당신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했던 잘못됐던 우리의 생각을 접고, 이제 내가 희생 제물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러한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요나, 모두에게 고통을 주었던 장본인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말끔히 생명을 다해서 자신의 존재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림으로써 오히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기에 이르릅니다.

그의 결단이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 이 땅에 주님을 보내셨던 주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평가까지 저는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을 통해서 이 폭풍의 문제들을 해결해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 어떤 일을 만나도 주님을 의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가운데 저희들을 불러 주신 것 감사합니다. 가정에서 문제가 생길 때 우리의 신앙에서 문제가 생길 때 우리가 늘 다른 탓을 했던 연약함을 회개하고, 이제 우리가 나로 인하여 나의 연고로 이런 폭풍의 문제가 생겼음을 인정하고 고백할 뿐 아니라 나를 바다에 던지라. 자신을 화목제물로 삼기를 원하는 요나의 결단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의 결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2006년을 준비하는 평안의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옵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