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영적 뿌리가 깊은 사람 바나바

好學 2012. 2. 4. 07:13

영적 뿌리가 깊은 사람 바나바

 

* 사도행전 11:19-26 *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행 11: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 영적 뿌리가 깊은 사람 바나바 》

  오늘은 바나바 강해 5번째 시간입니다. 〈영적 뿌리가 깊은 사람 바나바〉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나바는 성경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최고의 인격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용납할 줄 알고, 용서할 줄 알고, 상대의 밝은 면을 인정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생명을 살리는 넉넉한 인격적 토양이 있는 사람으로 성경에는 묘사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두 번째 교회인 안디옥교회에서 큰 부흥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전까지는 예루살렘교회도 그랬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증거했는데 안디옥교회에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해서 이방인들도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너무 특이해서 조사위원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11장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도대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뭔지 알아보자 해서 조사위원을 파송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특이하게 사도들이 없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그럴 때 그 파송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는데 23절을 보니까‘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평신도들만의 교회지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인정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나바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보지 않고 자꾸 사람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나바의 눈은 복된 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은혜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 이것을 ‘칭의(稱義)’라고 했는데 칭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직 완전하지 않은 존재지만 그렇다고 취급해 주는 것, 아직 완전한 의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취급해 주는 것, 그리고 나중에 성화를 통해서 진짜 그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칭의라고 했습니다.
  예증을 들기를 간난아이가 말을 못 알아듣지만 엄마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이 취급해 줍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그 언어를 알아듣습니다. 개의 얘기도 했지요. 개를 사람과 비슷하게 취급해 주니까 사람과 비슷하게 변화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시각입니다.
  바나바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은혜의 시각으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제일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누가 없는 소리를 했니?’ 이런 말을 제일 많이 합니다.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다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의 약점을 붙들고 늘어지면 누구라도 악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디옥교회 많은 사람들의 약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초신자로서의 약점이 없었겠습니까? 신앙적인 불균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문제들은 성장하면 곧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은혜로 보았습니다.
  특별히 어떤 사람은 너무 날카로워서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면 약점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것만 바라봅니다. 이상하게 눈만 뜨면 세상이 다 망할 것 같이 보이고 악하게 보이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세상이 악해지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병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도 그런 말씀을 드렸지요?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팠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의사한테 갔다고 합니다.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요.” 아무리 조사해 봐도 진단결과에 이상이 없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까 손가락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부러진 손가락으로 머리를 만지니까 머리가 아프고 부러진 손가락으로 다리를 만지니까 다리가 아팠던 것입니다. 사실은 머리, 가슴, 다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나바와 같이 건강한 인격을 가지고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나바가 훌륭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데…… 우리가 구호로 나가면 되겠습니까? 바나바를 따라하자! 바나바를 따라하자! 그렇게 따라하자고 얘기하면서 행동주의적으로 나간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나바에게 이런 거룩한 인격, 탁월한 인격을 갖게 되었던 데는 뿌리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깊은 영적인 뿌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1장23절을 보니까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뿌리를 깊이 주께로 내리라는 뜻입니다. 또 24절을 보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의 뿌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영성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예수님께 뿌리를 내린 사람, 생명에 뿌리를 내린 사람, 말씀에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속이 깊은 사람, 이것을 영성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요트를 타지 않습니까? 요트는 뒤집히지 않습니다. 요트는 웬만한 풍랑에도 뒤집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요트 수면을 무겁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풍랑이 불더라도 물아래가 무겁기 때문에 다시 중심을 잡게 되어 있습니다. 오뚝이 같이…… 중심을 잡아주는 이 묵직한 것을 한국말로 하면 바닥짐, 영어로 하면 ballast가 있기 때문에 수면 아래의 무게가 더 묵직하기 때문에 뒤집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조금 외형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면 위를 꾸미고 장식과 치장, 과시하다가 요트의 수면 위 무게가 수면 아래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문제없이 잘 갑니다. 그러나 풍랑이 한번 불면 배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복원이 안 됩니다. 수면 아래의 무게가 더 무거워야 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인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외적인 인상이라든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냐라든지, 말을 한다든지 등 외형적인 것이 많이 있는데 사실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것 속에 숨겨져 있는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가 더 묵직해야 되고 수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바닥짐, ballast가 더 무거워야 합니다. 그래야 풍랑이 불어도 뒤집히지 않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바나바가 모든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넘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나바는 수면 아래가 더 무거웠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세계가 더 무거웠던 사람입니다. 속사람이 더 무거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행동을 배우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나바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두는, 주께 뿌리를 두는 영성!
  골든 맥도널드는 영성과 영적체험을 구분했습니다. 영성과 영적체험은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 영성은 생명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두는 것이 영성인 반면 영적체험은 감정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의 예를 든다고 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베드로의 모습은 영적체험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고 부활 이후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영성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는 감정에 근거해서 호언장담합니다. 마태복음 26장33절을 보니까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모든 사람이 다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남자로 태어나서 한번 죽지 두 번 죽느냐고 이를 바드득 바드득 갈면서 결연한 의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좀 하라니까 엎드려 자고, “나는 피곤하면 아무 것도 못해요.” 하면서 자 버립니다. 그러다가 엄청 망신당하지요? 계집종 앞에서 부인하고 저주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영적체험의 단계는 이렇습니다. 그 이전에 느꼈던 것이 가짜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보고 말씀도 들었고, 그 의지도 외식으로서가 아닌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체험의 단계는 다 뒤집힐 수 있습니다. 전복될 수 있습니다. 요트가 뒤집히듯이……
  반면 영성의 특징은 지속성에 있습니다. 기복이 없습니다. 내면의 세계가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서 기도할 때 에베소서 3장16절을 보니까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영성의 성장과 뿌리내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바나바의 이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뿌리를 배워야 합니다. 영적체험과 영성은 다른 것입니다. 영적체험의 특징을 다시 한번 요약한다고 하면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영적체험은 전체가 감정입니다. 감정에 기반을 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춘기 때에 수련회 가면 눈물을 많이 흘리지요. 그리고 우리 때는 꼭 그랬습니다. 자기 죄를 종이에 써 가지고 캠프파이어할 때 불에 집어던지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특별히 죄 많이 지은 애들을 펑펑 울고 통곡을 하고…… (성도들 웃음) 하여튼 6개월마다 연례행사였습니다. 또 통곡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그것이 며칠 갑니까? 대부분 하루 갑니다. 큰 은혜 받으면 1주일가고……
  거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3년 반 동안 영적체험의 단계를 통해서 영성으로 가듯이 전 단계에서의 영적체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정위주로 지속되면 오래 못 갑니다.
  둘째 영적체험은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외부적인 자극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영적체험은 음악으로도 가능합니다. 요즘에 젊은이들이 CCM에 몰려들면서 고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영적체험입니다. 선동적인 말, 강력한 조명, 번쩍번쩍하면 사람의 감정이 고조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감정적인 고조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민중이 환호할 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요한복음 2장25절에 보니까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영적 체험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정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뒤집힙니다.
  대개 이런 것은 잠깐입니다. 뿌리가 없으니까 잠깐입니다. 그리고 영적체험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체험자 자신이 잘못된 영광과 칭찬에 사로잡혀서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끔 평신도들 중에 간증집회를 하고 다니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이 좋은 분들도 있지만 마지막이 안 좋은 분들 참 많습니다. 간증하다 간증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드라이해져 가지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영성에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넷째, 끝이 공허합니다. 공허해지고 피로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체험만 많이 했던 사람, Marx, Karl Heinrich 같은 사람 ‘종교는 아편이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영적체험 때문에 기독교를 매도하고 냉소적이 되고 나중에는 반항적이 되어 버립니다. 지금도 반기독교적인 사람을 보면 교회에 전혀 안 왔던 사람 없습니다. 다 교회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다 중․고등학교 때에 회장했던 사람이고 목사 아들, 장로 아들 가운데 많습니다. 반복적인 영적체험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공허해지고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영성은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생명의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진정한 변화, 생명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4절을 보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영성은 생명과 만나는 것입니다. 영성은 생명의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만나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입니까? 요한일서에 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영입니다. 하나님을 정의한다면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영’ 그래서 우리가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영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역시 나도 사랑으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내 가슴이 불타야 합니다. 내 가슴이 불타지 않으면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하나님과 결코 교통할 수 없습니다.
  교통(交通)이 무엇입니까, 교제가 무엇입니까? 가슴이 통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압니다. 가슴이 통하는 것이 뭔지…… 요즘 가짜 사랑이 많지요. 혼수감 뭐 해 올래? 학벌이 뭐야? 이렇게 거래만 해 보았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몰라요. 진짜 사랑을 하면 가슴이 통합니다. 가슴이 불탑니다.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이 내 가슴에 전이됩니다. 그것이 교통입니다.
  우리도 가슴이 불타오를 때 있습니다. 어디에서 내 가슴이 불타오릅니까? 보통 때는 냉랭하게 있다가 어떤 사람이 돈 얘기를 하면 가슴이 불타오릅니다. “선풍기 가져와! 냉수 갖고 와!” 하면서 속탄다는 사람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남자 얘기만 하면 가슴이 불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성도들 웃음) 옛 신앙인들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기를, 나는 불타는 사명을 갖기를 원한다.” 사명에 불탄다, 불타는 사명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뜻은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가운데 진짜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에 불탔기 때문에 그런 말을 남긴 것 아닙니까? “하나님,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진짜 그렇게 살았습니다.
  불타는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에 간절함이 빠지면 껍데기밖에 없습니다. 능력이 뭔지 아십니까? 불타는 가슴으로 인하여 간절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변화의 힘은 간절함에 있습니다. 간절함이 있을 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가슴이 통하는 것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우리 안에 간절함이 임합니다. 간절함, 날카로운 면도칼 같은 간절함이 임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노래를 한번 보십시오. 노래도 대가들이 부를 때 간절함 가운데 부르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습니다. 지금 전쟁통이라서 그런지 미국 가서 TV를 틀어보니까 운동경기를 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더라고요. 보았더니 휘트니 휴스턴이 나와서 미국국가를 부르는데 자기가 부르면서 울어요. 와! 감동적이더라구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여자도 울고 남자도 울고…… 제가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간절함의 능력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저는 휘트니 휴스턴을 보면서 우리나라 가수가 생각났습니다.
  저는 옛날 청춘에 버림받는 경험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참 좋아했습니다. (성도들 웃음) 외로움을 달래던 노래였습니다. 어쩌면 내 가슴을 그대로 표현했는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그때 그 간절함이 가슴에 와 닿지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나중에는 거의 자포자기하듯이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성도들 웃음) 날 죽여라, 날 버리고 가려면 차라리 죽여라! (성도들 웃음) 조용필은 음악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트가 있습니다. 가슴으로 노래를 하잖아요. 가슴으로 노래를 합니다. 잘 보세요. 간절함이 있으니까 전달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불붙는 가슴이에요.
  붓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붓글씨 잘 쓰는 한석봉, 왕희지 같은 사람을 보면 한 획을 그을 때 종이가 찟기는 힘을 가지고 긋습니다.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붓글씨를 보는 순간 힘을 느끼잖아요. 천지를 가르는 힘! 그래서 옛날에는 펜으로 글을 많이 썼습니다. 펜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글도 아니라고 했어요. 볼펜으로 쓴 글은 집어던지곤 했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볼펜으로는 힘이 들어갈 데가 없어요. 힘을 주면 미끄러지잖아요. 그런데 펜글씨에는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힘이 들어가 있었어요. 펜글씨를 보는 순간에 글자가 살아서 가슴으로 오는 것 같아요. 그것이 인격이 담긴 글입니다.
  옛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다.’ 눈빛이 얼마나 셌는지 눈빛이 종이를 뚫어버린다고 합니다. 이해력이 뛰어난 사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을 가지고 읽는 독서! 이것이 세상을 뒤집어엎습니다.
  몸짓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용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손 한번 들 때에 허공이 쫙 갈라지는 것 같은 체험이 있지 않습니까? 진공상태가 나타나면서 동서로 공간이 갈라지는 것! 진짜는 아니지만 느낌이…… 우리 싱글싱글벙글벙글 찬양할 때 샥! 입에서 샥이 아니고 진짜 샥이 될 정도로 절도있게 하는 몸짓! (성도들 웃음) 간절함입니다.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실제로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불붙는 가슴을 가지고 뛸 때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냉랭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같이 불타지 않는 사람입니다. 항상 부정적이고 삐딱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바라보면서 질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16절을 보니까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잘 보세요. 이 시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 사람이냐 하면 피리를 불면 덩실덩실 춤을 춰야하지 않습니까? 애곡을 하면 가슴을 쳐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멍하게 있고 애곡한다고 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가슴이 움직이지 않아요. 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sympathy’ 동정하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원래 무슨 뜻입니까? sym - 같이, pathy - 마음, ‘마음을 같이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12장15장을 보니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가슴이 움직이지 않으면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의인이고 남은 죄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이 없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비판의식밖에 없습니다. 냉랭한 마음으로 비판의식 밖에는 없습니다. 남들만 썩었다고 합니다. 우리 가슴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리는 방법은 하나님의 불타는 가슴을 내가 갖는 것이고 하나님의 불타는 영광의 존전으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누누이 그런 말씀을 드렸지요. 세상에서 변화시키기 제일 쉬운 것은 나입니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변화시키기 가장 쉬운 것이 나이지만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 자신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제가 전병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지금 있는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말할 때 항상 온순하게 하고 공손하게 절하고 싶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인터넷 리플라이할 때도 세 줄 이상 쓰고 싶고…… 이런 마음 다 있습니다. (성도들 웃음) 저는 이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안돼요 안돼! 내 자신도 내가 만들지 못해요. 나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해요. 그런데 건방지게 내가 남을 변화시킨다고요? 
  가끔 어떤 성도들을 보면 목사를 사람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를 사람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다.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못 만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고 내가 그 사람을 만들겠다고 나가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럴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너 죄인 아니냐? 다 부족하지 않니? 우리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자!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 앞에 나아가자! 불붙는 마음으로 가자! 그래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앞에 같이 서자!’ 예요. ‘같이 서자!’ 그래서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이 내 가슴에 전이될 때 ‘와~ 내가 사랑하는구나, 너도 사랑하는구나’ 그것을 동시에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사람 변화시키려는 것 보았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불붙는 가슴을 자기 가슴에 가지고 그리고 나아가잖아요. 마가도 같이 가자, 바울도 같이 가자, 그리고 누가 변화시킵니까? 하나님이 변화시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의 변화, 하나님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붙드는 삶, 이것이 영성입니다.
  내 능력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앞에 나가야만 내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이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의 사람이 되면 우리의 삶이 영광스럽게 변화가 됩니다.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치입니다.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됩니다. 가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value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 밥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처한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오늘 영광스러웠어. 나 오늘 정말 가치 있는 삶을 살았어. 밥 먹었거든.’ 미친 사람 아닙니까? 밥 먹으면서 무슨 영광스럽습니까. 가치가 올라옵니까?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인데요…… 그러나 정말 철천지원수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악한 자입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했어요. 가치가 생기는 것입니다. 긍휼! 내가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되는 무례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친절을 베풀어요.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스스로 포기하고 섬깁니다. 거기에서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설 수 있어요. 그러나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내려와요. 그리고 종의 모습으로 섬겨요. 그때 가치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영광과 가치는 동의어입니다. ‘내 인생이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 얘기는 ‘하나님, 내가 가치창조형 인생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영성의 사람은 반드시 이런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이런 인생을 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길입니다.
  내 속의 뿌리가 강화되면 바로 이런 영성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읽었던 Robert Frost의 시가 있습니다. 가지 않는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지 않는 길! ‘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덜 가는 길을 선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번역이 유치한가요? Robert Frost의 가지 않는 길…… 단순한 얘기 같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도 항상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 사람들이 덜 다닌 길…… 그런데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을 갔대요. 그런데 그것이 자기 인생을 달라지게 했더라고 합니다. 담담하고 담백해 보이면서도 충격적으로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이것이 영성입니다.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바나바의 영성을 허락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걸어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는 영광스러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허용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바나바가 걸었던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는 뿌리 깊은 영성을 가질 수 있는 귀중한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바나바는 탁월한 인격이 있었습니다. 용납, 용서, 밝은 면을 보는 것, 이것은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외형적인 감정에서 움직이는 것은 영적체험입니다. 뿌리가 있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하나님의 불타는 가슴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종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 내 속사람, 영성의 뿌리가 깊이 하나님 앞에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병욱 목사님과 성도들 다함께 기도)

  모두 다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찬양하겠습니다. 


말    씀 : 사도행전 11:19-26
설교일시 : 2003년 3월 30일 - 주일낮
설    교 : 전병욱 목사님
속    기 : 최혜련


< 가지 못한 길 >
                            Robert Frost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뿐인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덤불 속으로 한 쪽 길이 감돌아간 저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어쩌면 이 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밟은 흔적은 다 비숫했지만 이 길은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는 듯해서였습니다.

그날 아침 두 길은 모두 아직
발자국에 더렵혀지지 않은 낙엽에 덮여 있었습니다.
다른 길은 언젠가 가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리라 알고 있었지만.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노라고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놓았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