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헬라교부

好學 2012. 2. 4. 06:44

헬라교부

 

 

헬라교부는 소아시아파와 알렉산드리아파로 구분하며 그리스교부라고도 칭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사람들로 성서주의를 표방하며 사색이나 철학보다는 신앙을 강조하였으며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이레니우스(Irenaeus)와 히폴리투스(Hippolytus)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파는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전과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을 연구하려 하였으며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이 있습니다 

 

 

1) 소아시아파  이레니우스(Irenaeus)

 

주후 115~119년경 소아시아 지방에서 출생한 이레니우스는 폴리갑의 제자로서 헬라고전과 신구약성경에 정통한 학자이며 목회자였습니다  또한 당시 이단들의 여러 문헌들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이단들의 주장을 논박함으로서 정통교리를 수호한 고대 가톨릭 교회의 신학상 비조였습니다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박해가 일어나 로마로 파견되어 피난을 간 것을 제외하고는 줄 곧 리용 지방의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리용 감독 폰티너스(Pontinus) 순교이후, 세베레스 황제 때, 순교하기 까지 리용의 감독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헬라사상에 익숙하면서도 서방에서 활동하였으며 라틴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이 책은 그노시스 연구 및 고대교회 사상 연구에 가치있는 자료이기도 한 것입니다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 1권에서 그노시스 이단들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다루었고,  2권에서는 이단설에 대한 철학적 논박을 기록하였으며, 3권에서는 성서적 비판을, 4권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마르시온 사상을 비판하였으며, 마지막 5권에서는 그노시스 이론에 대항하여 부활을 논증하는 등 반 이단론(185년)은 그노시스 이단을 공격하는 가운데 그의 신학을 개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파 클레멘트(Clement)

 

주후 10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한 클레멘트는 오랜 여행끝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스승 판타너스(Pantaenus)를 만나게 되었으며 190년경에 판타너스의 뒤를 이어 12년간 신학교 교리문답학교에서 교수로 담당하였습니다  그후 박해를 피하여 안디옥으로 가서 목회와저술에 힘쓰며 교회와 신학을 연구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필로(Philo) 가 유대교를 헬라철학으로 해석했듯이 클레멘트는 기독교를 헬라철학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지적 활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그이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습니다  그가 학문을 탐구했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레멘트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대부분이 플라톤의 철학에 의해 증명될 수 있슴을 주장하였습니다  클레멘트는 이 세상에 오직 한가지의 진리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으므로 플라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름아닌 성경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바로 그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저스틴과 클레멘트의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한 반면에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적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하였다는 점입니다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안디옥으로 피난하였으며 21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주요 저술로는 "이방에 대한 권고", "지도서",  "이단에 대한 반박문" 등이 있습니다 

 

 

3) 알렉산드리아파 오리겐(Origen)

 

오리겐은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 가정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셀베루스 황제의 박해(202~203년)를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리겐은 모친의 순간적인 지혜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리문답학교에 입학하여 클레멘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시 그의 돈독한 신앙과 명석한 두뇌는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셀베루스 황제의 극심한 박해로 인하여 신학교 교수들이 각지로 흩어지자, 신학교를 인수받아 18세 때부터 클레멘트의 후계자로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오리겐이 이미 10대였을 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미트리우스(Demetrius)의 명을 받아 당시 "카테쿠멘", 즉 세례 지원자들의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 러한 중차대한 사역들을 아주 훌륭하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철학적 권위자인 "아모니어스 삭가스" 에게 철학을 수학하였으며,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극한 가난과 싸우면서도 저서와 교수에 주력하였습니다   210년에 로마를 방문하였으나 215년에 카라칼라 황제의 강제 축출명령으로 로마에서 쫓겨 났으며, 그후 아라비아로 가 전도사역을 하였습니다  아라비아의 사역이 끝난 후, 신학교로 복귀하여 학생들을 지도하였습니다   230년경 팔레스타인과 헬라를 방문하던 중 가이사랴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오리겐에게 세례지원훈련을 맡겼던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미트리우스(Demetrius)는 자신의 교권적 권리가 팔레스타인 감독에게 침해 당하였다고 판단하여,  오리겐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축출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로 다시  가이사랴로 돌아가 신학교를 개설하고 후배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244년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악형과 고문을 받고 두로 감옥에 갇혀 254년 끝내 순교를 하였습니다

 

오리겐은 다작가로서 세종류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첫째, 성격주석류로 신구약 전부에 걸쳐 작성하였으며 은유적 해석방법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받았습니다  그는 본문 비평을 위해 "헥사플라"(Hexapla, 헬라어, 여섯겹이란 뜻임)를 27년간에 걸쳐 완성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렡 본문, 헬라문자로 기록한 히브리어 음력, 아크라 역, 시마카스 역, 헬라어 역으로 번역된 이 서적은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보관되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는 조직신학 저서로 원리는 그의 해박한 신학지식과 헬라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는, 변증적 작품으로 "셀서스(Celsus) 반박문"은 신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과학적 입장에서 변증한 책으로 모두 8권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