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조세핀 P. 캠벨 (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好學 2012. 2. 4. 06:41

 

조세핀 P. 캠벨 (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배화학당 설립자 J.P 캠벨

 

  1852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캠벨은 21세에 캠벨 목사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27세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캠벨은 곧 두 자녀도 병으로 잃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 후 33세 되던 해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7년 44세 때 남 감리교회의 첫 번 째 여성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여성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98년 10월 2일, 그녀는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여성들 대상의 캐롤라이나 학당(배화학당 전신)을 설립했습니다. 또 1900년 4월 15일 부활 주일에 캐롤라이나 학당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3년 12월 학교 이름을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캠벨은 미국인 루이스 워커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정기예배는 이곳에서 지속되었습니다.

  정기예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종교교회로, 또 다른 모임은 자하교 근처에서 자교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한국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던 캠벨은 1918년 65세 때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다가 그만 신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이 끝난 후, 그녀는 신병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의 뱃길을 통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20년 11월 12일 6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의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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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선교사는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여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격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했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수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다.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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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0월 2일 미국 감리교 여선교회 조세핀 캠벨 선교사가 캐롤라이나 학당을 창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03년 12월 2일 배화학당으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22년 4얼 7일 배화여자 보통학교가 총독부로부터 6년제 학교로 인가를 받고 1925년 4월에는 배화여자고등 보통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1964년 학교법인 배화학원이 인가되어, 1977년 육영수 여사에 의해 기념관이 봉헌되었다. 현재의 전문대학교는 1977년 12월 3일에 설립인가를 받아, 1979년 배화여자 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89년 필운관이 준공되었고, 2008년 10월 1일 배화학원 창립 110주년 대학개교 30주년 기념식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