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이승훈신부

好學 2012. 1. 27. 21:05

이승훈신부

 

● 세계 기독교 선교 역사 상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조선의 자생적인 기독교인에 의해 최초로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 한국 교회는 외국 선교사에 의한 기독교 확장의 역사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복음이 전수된 자생적인 역사를 가진 셈이다. 천주교의 경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입국한 1794년을 한국 천주교 선교의 원년으로 삼기도 하고, 개신교의 경우 1895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하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한국 개신교 선교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역사적 의미에서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신구교 모두 외국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주기 전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처음 떨어진 복음의 씨는 모두 조선 사람들에 의해 뿌려졌다. 조선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첫 역할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작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복음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말 등장했던 조선의 자생적 천주교인들이말로 세계 기독교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새로운 선교의 역사를 시작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와 천주교의 최초의 만남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천주교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 회원인 세스페데스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해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이들의 개종은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에게 조선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 선교를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의 예수회 회원들의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오가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다. 선교사들 역시 이들을 기꺼이 맞이하였고, 조선의 사신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한 필담을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서양 문물은 조선 사신들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중기, 서학을 최초로 도입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가 있던 소현세자와 친교를 맺었던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 선교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달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시도된 조선 선교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천주교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계속 조선에 소개되었다. 당시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의 결과로 청나라에 사대의 예의를 취하게 됨에 따라 북경으로 해마다 많은 사신을 보내었는데, 서학 관련서적들은 이들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소개되었고, 이렇게 해서 18세기에 들어오게 되면, 실학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서학과 천주교 교리가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이렇게 소개된 천주교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 학자들에게 환영받았다. 이 책들에 대한 연구는 남인 학자들이 중심이 된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서학이란 새로운 학풍을 낳게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실학자 이익(李瀷)의 제자들 가운데는 학문 차원의 관심을 넘어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승훈(李承薰,1756~1801.2)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으로, 이승훈은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최초로 영세를 받은 교인으로, 사제대행권을 행사하여 조선 땅에서 최초로 주일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했던 인물이었다.

이승훈은 1756년(營造32년) 한양에서 평창 이씨 가문의 부친 이동욱과 모친 여주 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李壁)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정약용 형제들과 천진암 강학회(일종의 연구토론회)에 참석하여 서학을 연구하던 중, 1783년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그를 찾아가 ‘북경에 가면 선교사를 방문해 영세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갖고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부친의 승낙 하에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란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이승훈은 천주교 교리서적, 십자고상 등 많은 서적과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한 다음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면서, 이를 자신들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선교했고 그해 음력 9월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벽, 정약전, 정약용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중인계급이었던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는데,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 그러던 중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는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이벽, 권일신 등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가졌던 종교 집회를 형조(刑曹)에서 적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고문을 당하고 귀양을 갔으며, 양반이었던 다른 이들은 풀려났다. 하지만 이들의 문중에서는 가문에 화가 미치게 될 것을 걱정해 이들에게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승훈도 문중의 강압에 못 이겨 배교하고 천주교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승훈은 곧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6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을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하였고, 이어 이승훈이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였다. 물론 이러한 일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이 가성직제도는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점차 가성직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 이를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였다. 이러한 문의를 받게 된 북경의 선교사들은 그 잘못을 일깨워 주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라고 권고해 주었다. 이러한 권고를 받은 이승훈 등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 생활로 돌아가 신입 교우들과 비교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 밀사를 파견해 선교사 파견을 약속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이승훈은 1789년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2월에는 금부도사로 이듬해 2월에는 서부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791년(정조15년)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진산사건의 여파로 천주교 신앙은 조선 정부와 정통 유학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진산 사건이란 양반 개종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가문의 신주를 불사르고 조상 제사를 거부한 혐의로 전주 감영에서 처형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것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순교였다. 이때부터 조선 조정은 천주교 신앙을 사교로 확정하고 대대적인 적발과 박해에 들어간다. 이승훈은 서학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소환되어 신문당하는 가운데 배교함으로써 사형은 면하게 된다.

 

1794년(39세)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가 조선 교회에 파견되었으나, 배교 상태에 있던 이승훈은 이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1795년 봄, 회개하여 주문모신부를 만나려 했으나, 신부가 입국하는데 관여했던 최인길 등이 잡혀 사형당하는 교난이 발생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이 7월, 유생들이 서학의 괴수 이승훈을 처벌하라는 계속된 상소로 인해 이승훈은 예산에 유배되어 1796년 4월에 풀려나게 된다. 그래서 이승훈과 주문모신부와의 만남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의 노력과 신자들의 열렬한 선교 활동으로 말미암아 조선 교회는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을 때 4천 명에 지나지 않던 신자는 1800년에 가서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란 신앙단체를 조직해 함께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정약종은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순 한글로 된 교리서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첫 박해는 1801년 신유박해이다.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청국 신부 주문모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크게 부흥하였다.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와 제사 등 유교적 의례, 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더군다나 남인의 정치적 견제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는 정조가 죽고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주교의 중심에 서 있었던 남인 세도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정순대비는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는데, 당시 정약종은 박해를 피해 자기가 보관하고 있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가 들은 고리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가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를 엄단하라는 상소가 연달아 올라왔다. 그리고 2월 이승훈은 이가환, 정약용과 함께 탄핵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는데, 서양 종교의 서적을 밀반입하여 이를 가문의 종교로 삼아 사학을 퍼뜨렸다는 죄목이었다. 이미 이승훈은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던 순조는 이승훈의 체포를 명령했고, 함께 체포된 정약종 등과 함께 모진 국문을 받은 다음, 서울 서소문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 부친은 자식의 죄로 벼슬이 삭탈되고, 동생은 사학 괴수의 동생이라고 시골로 축출되었으며, 그후 아들과 손자, 그리고 증손까지 천주교와 관련되어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이 박해로 이승훈,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천주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었으며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

 

이어 황사영의 백서사건까지 발생하여 천주교회는 대부분의 지도급 인물들이 죽음으로써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은 다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지속적으로 선교사 파견을 호소하는 가운데,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직자도 없이 30년 동안 조선교회가 크게 발전한 것에 감동되어,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천주교 조선교구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 ‘月落在天水上地盡’(월락재천 수상지진)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이 시는 이승훈의 고향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승훈의 6대손 이병규씨가 이승훈 선조가 참수되기 전 남긴 시라고 밝힌 것인데, 이 시가 자손들을 통해 구전으로 대대로 전해 온다고 증언하였다. 인간적 약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하느님(천주)을 부인한 이승훈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절한 후회와 자책을 이 한 구절 시구(詩句) 속에 절절히 담았다. 그리고 그는 이 짧은 한시를 통해 결코 자신의 신앙은 변함이 없음을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이다.

 

비록 이승훈은 여러 번 배교했으나 이 시를 통해 그의 진심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으며, 그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맨 처음 세례를 받은 신자이고, 끝까지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순교자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신앙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신앙의 집안이 되었다. 1981년 11월 28일, 이승훈 묘가 개봉되어 유해가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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