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찰스 시므온 (Charles Simeon)

好學 2012. 1. 27. 21:11

찰스 시므온 (Charles Simeon, 1759-1836)

 

 

 

     


 

챨스 시므온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위대한 성도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잉글랜드 복음주의 진로에 있어서 심오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가 마땅한 바대로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한 교회에서 54년 동안 섬기면서 설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와 네덜란드 등으로 설교여행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2,536편의 설교가 수록된 총 21권으로 된 설교집을 남겼고, 심오하고 지속적인 감화를 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선교회를 위해서 일한 사람으로, 특히 인도 내의 선교회와 유대인들을 위한 선교회를 위해서 애를 쓴 사람입니다. 신학대학(Theological College)이나 신학원(Seminary)들이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던 때에 수 백 명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교 할 것이며 목회사역을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그의 가르침은 효과가 있었고 그 자신이 혼자서 신학원를 한 셈).

 

챨스 시므온은 22세에 캠브릿지의 Holy Trinity Church의 목사로 임직 받은 후 그의 나이 77세, 그러니까 1836년 죽기까지 그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였습니다. 그는 그 54년이란 기간 거의 대부분을 사납고 끈질긴 반대와 조롱과 욕설을 받으며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게 되었을 때에는, 그의 캠브릿지에서의 장기 목회의 직접적인 결과로 영국 국교회와 이 나라 전체 안에 복음주의의 입지(立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회심할 당시에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였던 복음주의를 영도한 인정받은 지도자였습니다. 시므온의 훌륭한 전기(傳記)를 쓴 Moule 감독은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잡으시고 허다한 사람들의 심령 속에 최고의 복락을 직접 부어주시기도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수다한 사람들에게는 간접적으로 최고의 복을 부어주셨고, 심지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그리하셨다"

 

그 말은 한 복음주의자의 판단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식 있는 비 복음적인 사람들마저 그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십시오. Macaulay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그의 권위와 감화력은 캠브릿지에서 잉글랜드의 가장 구석진 데까지 퍼져 나갔다." 심지어 시므온이 영국 국교회 내에서 어느 대주교(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대주교를 가리킴 - 역자 주) 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나타내었다고 그는 역설하였습니다. Elisabeth Jay는 자기가 쓴 The Evangelical and Oxford Movements(복음주의와 옥스퍼드 운동)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캠브릿지에서 50여년에 걸쳐 행한 목회사역의 과정 속에서, Newman(Oxford Movement를 주도한 John Henry Newman을 가리키는데 그는 나중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 한다 - 역자 주)이 옥스퍼드에서 행한 일로 인하여 여러 세대들의 목사후보생들에게 끼쳤던 영향력 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는 '그가 사역하던 그 Trinity Church 를 한 동안 잉글랜드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심적인 곳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특이하게 지속적인 감화를 끼치고 있었던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Daniel Wilson은 시므온이 가르친 학생들 중에 한 사람으로서 인도 선교를 위해서 파송되어 나중에 칼카타의 감독이 되었던 사람인데, Recollections of Charles Simeon(챨스 시므온에 대한 회고집)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그 점에 대해 이렇게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것은 그 목사님이 큰 재능들이나 특이한 판단력이나 학문적인 영역에 있어서 어떤 특이한 수준에 도달하였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표면적으로 본다면 그 사람이 천성적으로는 캠브릿지에서 그러한 입지를 차지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말 그런 일에 전혀 부적격자로 보였습니다. Henry Martyn 같은 지성적이고 언어적인 은사들을 아무 것도 가지지도 못하였습니다. 또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실력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특이한 감화력의 비밀은 '복음진리와 거룩의 단순한 힘이 . . . 그 5, 60년간의 기간 동안에 나타났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챨스 시므온은 1759년 9월 24일에 성경 읽기로 잘 다져진 가정에 태어납니다. 그는 네 아들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장형은 어린 시절에 죽고 다른 두 형제들은 그 도시에서 법률과 경제 문제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 됩니다. 그의 부친은 성공적인 변호사였고 종교에 있어서는 복음주의나 '열심주의'를 아주 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친에 관하여는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챨스 시므온이 태어나고 얼마 뒤에 죽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봄직 합니다. 챨스는 이튼(Eton)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서 그는 캠브릿지에 있는 King's College(왕립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과 장학금을 받게 됩니다.

 

젊은 날 그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가 체육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거만하고 성미가 급하고 쉽게 분내어 혈기가 폭발하는 성향을 가졌었고 합니다. 또한 말타기에 정신을 빼앗길 정도였고 겉치장에 아주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 19세의 젊은 대학생이 1779년 1월 29일에 그 King's College의 자기 기숙사에 이르게 됩니다. 그로부터 3일 후에 대학 구내의 짐꾼이 그 대학의 책임자인 학장이 보내온 쪽지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그대는 대학의 한 학자로서 앞으로 3주 후에 있을 대학교회의 성찬예식에 참석하리라 기대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사단이 거기에 참석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라는 생각이 불현 듯 내 마음에 떠올랐다 ; 그리고 만일 내가 거기에 참석해야 한다면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인 친구도 없었고 친척 중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가 항상 들어왔던 오직 한 권의 종교서적은 The Whole Duty of Men(사람들의 총체적 의무) 였습니다. 그는 즉시 가서 그 책을 샀습니다. 그리고 온 정신을 다 쏟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주십사고 울부짖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 책을 읽고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울부짖었던지 3 주간 내내 책을 읽는 것과 금식하는 일과 기도로 전념하여 자신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을 하고 그 예배에 참석하였으나 양심은 정말 몹시도 괴로웠습니다. 그는 영적인 낙담에 처하여 있었지만 누구에게 그것을 상의하고 충고를 받아야 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1779년 성찬예식이 거행된 주일로 시작되는 주간에 그 심령 속에 여명이 비취었고 '무언가 희미한 소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기초로 한 희미하게 느껴지는 류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성찬에 대해서 쓴 Wilson 감독이 쓴 책을 읽고 있었던 그 주님의 고난주간에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은 표현을 접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를 제물의 머리에 전가하였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내 마음에 불현듯 일어났다. 무어라! 나도 내 모든 죄책을 다른 이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고? 하나님께서 내가 내 죄를 그 머리에 올려놓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한 제물을 준비하셨는가?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나는 한 순간도 내 죄가 내 자신의 영혼에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죄를 예수님의 거룩하신 머리에 전가시키기를 구하였다. 그리고 수요일에는 긍휼의 소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그 소망이 더욱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그 소망이 더욱 더 굳어졌다. 그리고 주일 아침(4월 4일 부활절주일)에 내가 아침 일찍 깰 때 내 마음에 이런 말이 생각나서 입으로 뇌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부활하셨도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 시간 이후로 평안이 내 영혼 속에 참으로 풍성하게 물밀 듯 흘러 넘쳤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그 주님의 성찬식탁에서 내 복되신 구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달콤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의 회심이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면 그가 시작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길로 그러하였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 하게 된 때부터 나는 내가 받은 은택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기숙사 침실 담당 하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대가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되는 형편에 처하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그대와 이 대학 내에 있는 그대 동료 하녀들을 가르칠 것이다. 만일 토요일 밤에 자기 방들을 돌아보러 오기로 한다면.' 여러 차례 그는 그들에게 책을 읽어 주었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많은 선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하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좋은 유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그 일을 통해서 자애로움의 정신을 계발하였고 어느 정도 하나님의 교훈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곧 '네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말이다." 그리고나서 여름의 긴 방학 동안에 집으로 가서 여러 하인들과 자기 부친과 형제들과 함께 가정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가 빠져든 그 새로운 열심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하게 흥미 있는 점은, 시므온이 그 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떤 책에서 읽은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이의 일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단 한명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캠브릿지로 돌아와서는 온전히 혼자서 그 일을 해나갔습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그는 혼자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 같이 믿는 이는 캠브릿지에서는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가 1782년 5월 26일, 그러니까 그의 나이 22세에 장립을 받게 됩니다. 그 때도 여전히 다른 복음주의자를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수년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사가 '사람에게 속한 것도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영적으로 친숙한 사람을 만나는 일을 허락지 않으셨다. 여러 다른 교회들을 가 보았으나 허사였다. 끝내 그는 그로부터 250여년전에 Latimer가 설교하였던 성 에드워드 교회(St. Edward's Church)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그 교회의 목사는 Christopher Atckinsonn 였는데 그에 대해서 시므온은 말합니다. "내가 들어보았던 모든 이들 중에서 진리에 가장 가까이 나간 분이셨다." 불과 3년 전에 회심하였으나 복음적인 사람을 전혀 만나보지 못한 한 젊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논평이 그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성경 안에서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을 개진하였고,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성경에서만 나의 종교관을 얻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성경에 온전히 집착하였고 세심한 성실성을 가지고 그 일을 해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도 내 취향에 맞는 어떤 견해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성경 기자가 전하려고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밝혀내려고 애를 썼지 내가 바라는 바를 성경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요점에 대단한 열심을 내었다. 내가 강론하고 있는 성경의 대목에서 성령께서 의도하신 것이라고 내가 믿어지는바 이외에는 결코 말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자기 설교들에서 인용하였던 오직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었지만 다른 설교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시사적인 사건들을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소란스런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 미국 내에서 대영제국이 크게 손해를 보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거대한 나폴레옹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트라팔가의 전투와 워털루 전투가 있었고, 영국 수상이 암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거대한 사건들 중 그 어느 하나를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므온은 조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여러 가지의 꼬리표로 체크하는 것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상정하기로 우리는 그는 체험적인 칼빈주의자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의 교리적 입장이 그의 설교에서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1784년 11월 20일에 Hinxworth에 살고 있었던 John Wesley와 그가 가진 유명한 대화를 보면, 그가 어떤 입장을 견지하였었는지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Wesley는 81세로서 목회사역의 끝에 거의 도달해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25세의 나이였고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초기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Wesley와 나눈 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알미니안으로 불리워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저를 보고 사람들은 칼빈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비수를 뽑아 서로를 겨누고 있는 셈이네요. 그러나 제가 이 결투의 시작에 동의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건방진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정말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목사님, 정말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부패한 존재라서 하나님께서 목사님 마음을 먼저 주장하지 않으시면 하나님께 돌이킬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느끼십니까?"

"그러믄요.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하실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께 목사님 자신을 천거하기에는 턱없음을 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와 그 의(義)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지 못함을 알고 주만 바라보십니까?"

"그렇지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구원받지요."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계신 목사님께서는 그 후 어떤 방식으로든 목사님 자신의 행사를 통해서 목사님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시나요?"

"천만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야 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않으시나요?"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미 품에 있는 어린아이 같이 매 시간 매 순간 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붙잡아 주셔야 하나요?"

"전적으로 그러하지요."

"목사님의 모든 소망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목사님을 보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안에 있습니까?"

"그러합니다. 주님 밖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목사님께서 허락하신 저는 제 칼을 칼집에 꽂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물은 질문은 전부 제가 믿는 칼빈주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를 선택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를 의롭다하시고 궁극적으로 지켜주시는 성도의 견인 교리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견지하는 모든 것의 요체입니다. 제가 그것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좋아하신다면, 저와 목사님 사이에서 논쟁할 용어나 어구를 찾으려 하지 말고, 대신 목사님과 제가 동의하는 일들에서 조화롭게 연합해야겠네요."

 

1782년 6월 2일, 시므온이 장립을 받고 난 뒤 한 주간 후에 St Edward's 교회에서 첫 번째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Arkinson 이 휴가를 떠나면서 시므온에게 대신 설교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아무한테서도 어떻게 설교할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고, 또 설교에 대한 주제로 쓴 글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복음적인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즉각적인 영향력을 발하였습니다. 사역의 힘이 거의 소진되어 더 이상 사역하지 못하게 되어 옐링의 교구에 은퇴하고 있었던 Henry Venn이 그 설교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해 10월에 스킬링흐리트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에(시므온이 장립을 받던 삼위일체 주일 이전에) 그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는 무리 속에 있었다. . .  그런데 17주간(약4개월)이 못되어. . . 그는 (교회)를 청중들로 가득 채웠다. 그러한 일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참으로 기이한 성공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교회 담임 목사인 Atkinson이 10월에 의례적인 경의를 표하는 그 젊은 목사에게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오신 것이 정말 너무 좋아요. 이제 우리가 좀 여유를 가질 수 있겠네요."

 

1782년 11월 9일 그 나이 불과 23세에 Holy Trinity 교회의 교구 목사로 지명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Richard Sibbles, Thomas Goodwin이 목회 사역을 하였던 곳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그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 그는 St Edward's 교회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을 만나게 됩니다. 반대가 거세고 신속하게 왔습니다. -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 자체나, 설교한 것과 설교했던 방식 등에 대해서 빗발치는 반대가 있었습니다. 교구민들은 교구목사를 보조하는 부목사격(Curate)인 Hammond가 자기 교구 목사이기를 바랬습니다. 시므온을 불법한 침입자로 여겼고, 교구위원들(교구 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 대표자들 -역자주)의 이 회중석을 잠가버렸습니다. 시므온은 회중들이 앉을 긴 의자를 들여왔습니다. 그러나 교구위원들이 그것들을 밖으로 내다 교회 뜨락 쪽으로 던졌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오후 예배에 설교할 강사를 지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Hammond를 지명하여 오후 예배에 시므온이 설교하지 못하게 배수진을 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저녁에 드려지는 세 번째 예배를 주장할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 예배는 특히 낮에 일찍 외출할 수 없었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교구위원들이 교회 문을 잠가버려 아무도 그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요청할 때에도 교구민들이 그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자기 교회나 교구에서만 혐오를 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캠브릿지에 있는 대학에서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시므온이 미치고 환각적이고 외식적이고 반 율법주의적인 사람, '악한 성품의 소유자'로 통했습니다. 교구 성직자들이나 교인들은 새로 믿음을 가지려하는 자들에게 Trinity 교회는 '환각에 빠진 목사'(fanatical minister)의 악한 성품 때문에 가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습니다. 어떤 대학에서는 시므온에게 말을 하는 것 마치 죄악으로 간주하였고, 그것을 어긴 대학생들은 그들 부모들에게 알려져 혼나도록 조치하곤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그 교회에 가려면 우회적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또는 공격을 당하지 않게 단체로 가곤 하였습니다. 시므온의 부목사가 되었고 후에는 대학에서 헬라어 교수가 된 Schofield 는 그 Holy Trinity 교회에 들어가려면 먼저 좌우를 살펴야 했습니다. 심지어 Henry Martyn 마저 자기가 시므온의 부목사 노릇을 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끄러웠었다고 하였습니다.

 

거리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아는 척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가 세운 대학의 동료들도 길에서 그를 만날 양이면 만나지 않으려고 반대편 길로 건너가곤 하였습니다. 한 목격자의 기록은, 시므온이 그 도시의 거리들을 지나 대학에 있는 자기 집으로 걸어나는 것을 본 것을 말해 줍니다. 그의 옷이 찢어져 있었고 그에게 던져진 썩은 계란냄새가 났습니다. "결국 한 가난한 사람이 모자를 벗고 멸시받는 설교자에게 정중한 존경의 확실한 몸짓으로 인사를 하였는데, 그 때 그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자기 옷을 당기지도 않고 자기에게 아는 척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다는 것 때문에."

 

이러한 일이 수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실로 1817년이 되기까지도(그가 장립받고나서 23년이 되기까지) 대학생들은 그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4년 경(그가 죽기 불과 2년전) 쯤에는 이러한 말이 들렸습니다.  :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던지 바로 이 순간에 대학 전체에서 Holy Trinity Church 의 숭고한 목사 같이 인기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대학학생들과 교직원 앞에 설교할 때, 대학 강사나 예술 강사나 교수나 학생 중에서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형편인데도 참석하지 않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오랜 동안 그 야비한 반대를 참아낼 수 있었는가? 어떻게 그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는가?

 

 

1.그는 비평과 대적을 받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몫이라고 여겼다.

그는 때때로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위해서 견고하게 서라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녁 예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교회의 문을 잠근 교구위원들의 행동은 분명히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물쇠를 깨뜨려 부술 절차를 법적으로 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마음의 생각을 억누르고 통제하였던 성경 대목은 '주의 종들은 다투지 않는다' 는 말씀이었다.“ 그가 행동에 옮기고 싶은 충동을 문자 그대로 수 백번 도 더 받았지만 그 때 마다 그 말씀이 그의 손을 붙잡아 매었습니다.  

 

그는 노인답게 그러한 맹렬하고 부단한 대적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를 보여주는 즐거운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가 그 점에 대해서 쓴 것이 이러합니다. "내가 대학에서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아주 오래전 나는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 때 고통 받고 있던 내 손에는 작은 성경책이 들려져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내게 힘을 주시어 위로하여 주실 것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 .  내 시선을 사로잡은 첫 성경 본문은,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눅23:26). 시몬(Simon)은 시므온(Simeon)과 같은 이름이지 않은가?. 여기에 얼마나 놀라운 교훈의 말씀이 있는가 - 그 말씀이 나에게 용기를 잃지 않도록 얼마나 놀라운 암시를 주었던가! 십자가가 내게 지워진 것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려 함이었다 -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그것이면 충분하였다.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영예를 내게 부여하셨으니 나는 뛰면서 찬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의 시편 말씀을 즐겨 인용하였습니다. "주께서 저희를 은밀한 곳에 숨기사 . . . 구설의 다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 . "(시31:20). 그는 이렇게 말할 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천사를 욕해 보아라. 그런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무슨 관심을 두실까? 내 구속주가 계시는 은밀한 곳에 내가 숨겨 있는 동안에는 내 느낌은 마치 그와 같을 것이다."

 

 

2. 그는 하나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과 교제하는 것을 매일의 진수적인 부분으로 여겼다.

시므온은 믿기를, Robert Housman 목사야말로 자기 목회 사역을 통해서 복 받은 대학의 멤버들 중에서 제일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Housman은 St John's College의 멤버였으나 1784년 겨울 동안에는 King's College 내의 시므온의 방에서 함께 머물렀습니다. 시므온의 전기(傳記) 작가인 Carus에게 Housma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일관성 있고 진실한 헌신, 그리고 그렇게 따스한 경건과 열심과 사랑을 함께 견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또한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말 나는 그 사람에게서 청산할 수 없는 빚을 그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에게 졌다. 시므온 목사님은 겨울인데도 정말 필연적으로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였고 경건한 성경 연구를 위해 자신을 드렸다. 그런 다음에 자기의 종을 울려 자기 하인과 함께 자기 친구를 불렀고 그가 가정 기도회라 칭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습관화된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Handley Moule 은 자기가 쓴 시므온 전기에서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말해줍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일이 쉽게 그에게 습관화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결연한 투쟁으로 얻은 일이었다. 자기가 잠자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런 잘못을 범할 때마다 벌금을 내기로 하고 반(半) 크라운(당시 영국의 화폐 단위로 지금의 25펜스, 그러니까 4분의 1파운의 가치에 해당함 - 역자 주)을 하인에게 주기로 결심하였다. 어느 날 아침 따스하고 편하게 누워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착한 여자는 가난하니 반 크라운을 주면 그녀에게 매우 유익할 거야.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인 기만을 용납해서는 안되었다. 만일 다시 늦게 일어나게 되면 캄 강으로 걸어 내려가서 한 기니(21쉴링에 해당하는 영국의 옛 금화 - 역자주)를 강물에 던질 결심을 하였다. 그러한 그의 결심대로 강물에 자선을 하는 데 몇 기니만으로는 충분치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것들을 '자기 주님의 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자기 주님을 위해서 동전이 던져졌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강물 속에는 그것이 여전히 있다. 시므온은 결코 다시는 그런 식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기도는 이른 아침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므온에게는 습관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자기 교구민들을 심방하거나 이웃 교회들에 설교하러 할 때는 종일 기도한 셈입니다. 때로 그는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주간 전체를 드려 중보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시므온이 매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 교제를 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한 목사가 아버지 하나님이나 성자께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말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시므온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각 위격를 칭송하며 각 위께서 구원의 경륜을 위해서 행하시는 특이한 사역을 묵상하는 일을 즐거워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The Different Operations of the Holy Spirit)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 "우리는 성 삼위의 각 위(各位)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빚을 지고 있는가요! 성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복락의 대 원천이요 샘의 근원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복락들을 우리의 것이 되게 획득하신 분이시오, 그 복락들이 우리에게 임하게 하시는 매개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복락들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일을 하시는 이십니다." 물론 그 말씀은 충분하게 정통적입니다. 그러나 그의 적용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각위의 독특한 직무와 속성적인 면에서도 각위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위가 함께 연합하시어 진력하시는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해야 합니다."

 

 

3. 그의 공적인 생애는 전적으로 자기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선포하였던 것과 일치되지 않는 말과 행동들 보다 목사의 설교와 사역의 효과를 더 잘 무너뜨리는 것이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 시므온을 잘 알고 있는 있었던 Matthew Preston은 시므온이 죽고 나서 그에 관하여 쓴 작은 책자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집에 있을 때에나 밖에 나가 있을 때에나 종일 아버지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앞에 있으면서 그 사람이 어떤 위대한 일에 마음을 온전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정을 심방하거나 병원이나 감옥을 찾아 방문하는 일에 늘 부지런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돕는 일에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돈 문제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대학이 여러 차례 좋은 생활환경을 제공하려고 제안하였으나 거절하였습니다. Holy Trinity 교회에서의 54년간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한 번도 봉급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설교자와 목회자의 사역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의 백성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목회 생애 맨 초기에 St Edward's 교회에서 사역하였을 때 늘 교구민들을 찾아 이런 말로 문안하였습니다. : "저는 여러분이 안녕하신지 문안하러 여기 왔습니다. . .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Henry Venn은 1782 10월 9일에 Stillingfleet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7주간이 못되어서 . . . 그는 교회를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자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정말 거의 지난 일 세기 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 . . (자기 교구민들의) 선(善)을 존중하는 그의 분명한 자세는 그들의 마음에 있는 냉소적인 마음을 녹였습니다. 정말 그가 얼마나 놀라운 성공을 만났는지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4. 그는 목회에 대한 고상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목회사역에 대해서 사람에게가 아니고 하나님께 회계(會計) 해야 함을 확신하였다.

그는 Henry Venn의 아들이자 자기 친구인 John Venn이 장립을 받아 목사가 되는 때에 이렇게 편지 하였습니다. "나는 정말 자네를 진심으로 축하하네. . . 자네가 목사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 때문에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영예롭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직무 -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의 직무를 위해서 나아가 자신을 드리는 것 때문이지."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사들을 통해서 친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목사들은 자기들의 이름으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자기 자신들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니 마땅히 받아드리되, '사람들의 말로가 아니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받아야 합니다.'"


그의 관점으로 볼 때, 목회사역이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또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도 그 직무가 정말 어렵다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 대해서 찬동합니까? 그러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자기 설교, '목회사역적 직무'(The Ministerial Office) 속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직무에 허다한 무리들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습관과 영적인 정서와 같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직무에 부여된 책임은, 그 어떤 사람들로 그것을 감당할 특별한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정말 혼자서 감내 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5. 그의 설교를 통해서 나타난 바로는 그가 천성적으로 목회자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로서 신실함과 열심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자기가 행한 방식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 내가 항상 견지해야 하는 한 목적이었다." 그는 자기야말로 '사람들이 감내할 수 있게끔 말하거나 어린아이에게는 젖으로 먹이고 강한 자들에게는 단단한 것으로 먹이는' 주님과 사도들의 본을 충분하게 주목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영혼들을 얻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할 것이고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그들에게 말하려고 애를 쓰곤 할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자세로 애를 쓰겠다."

 

그가 섬기는 Holy Trunity 교회의 회중들은 거의 가난하고 처음부터 노동 계층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상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John Munn이란 사람은 노쌤프턴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습니다. 그가 건초(乾草) 수확기나 추수 때에 캠브릿지에 오곤 했는데 그 때 시므온이 섬기는 Holy Trinity 교회에 출석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 때문에 고향에서 다시 그리로 올 때에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가서 시몬스(Simmons)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다. 그 목사님은 내 마음에 와 닿는 설교를 하시는 분이시다. 만일 그 목사님이 설교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못한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네." 그렇게 집을 떠나 캠브릿지 까지 50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자기 형편대로 살면서 가능한 한 챨스 시므온의 설교를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 중에 한 멋진 경우를 소개합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가 작성한 설교를 읽어 나가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이스라엘이 소란을 하고 있어도 아람의 아들(son of Aram)은 요동치 않고 서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아람의 아들? 그가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모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시므온이 그 말을 받아 "그러면 어째서 모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라고 물었습니다. "보통의 회중이 나중에 쓰려고 족보까지 암송하고 다니나요?"

 

시므온이 '데살로니가전서 2:7,8을 통해서 그려보는 목회자의 초상(肖像)'(Ministerial Character Portryaed From 1 Thessalonians 2:7,8)이란 제목의 설교에 그와 같은 식으로 말하는 멋진 대목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바울 사도가 성경에서 목회자를 여러 모양으로 묘사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세 가지, 곧 '목자,'와 '아버지'와 '유모'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설교를 계속하여 나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통해서 회심한 자들의 복락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자기의 느낌을 해산하고 수고에 비유하고, 자기의 기쁨을 갓난 자기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마치고 나서 회중들과 '대화하는 시간'(converation Party)에는 '어머니는 자기가 좋은 어머니라고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고 도리어 자기 목숨과 전심을 다해서 자기의 아이를 위해서 준비된 것을 주려고 기꺼운 노력을 할 뿐 아니라 그 아이의 보양을 위해서 자기 품에서 때어내기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유모는 자신이 음식을 먹을 때에 자기를 통해서 그 어린아이를 감안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목사는 자기가 취하는 모든 신령한 양식이나 읽는 책이나 자기 마음에 들어오는 여러 가지의 관점들을 대할 때 항상 자기 회중에게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그가 개인적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서 마저 자기 생각들의 경향을 따라서 양떼들에 대해 선입견적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기 설교가 그들에게 영양분이 없는 것이 되게 해서도 안 되고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강해서도 안 됩니다." 목회자의 영적인 건강과 자기 백성들의 영적인 건강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자기 자신의 영혼 속에서 복락을 받게 되면 그는 자기 주위에 모든 이들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6. 그는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 부단히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확실히 어떤 허물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를 작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목사들에게 용기를 주는 재료로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았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연약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가 그것들을 향해 싸웠고 결국에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틀에 박히기를 잘 하는 태도에 여러 가지 특이한 사항들이 있었고, 그가 말하는 방식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로 인하여 비평과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본성적으로 그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고 자기 의견이 강한 사람이었고 허영이 많았고 거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큰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거만하고 자기 주장적인 성향은 가장 영적인 무리들 속에서 조차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느 날 오후 Henry Venn의 딸들이 시므온을 대동하고 자기들의 목사관까지 와서는 그의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얘들아, 정원으로 나오렴." "저 복숭아들 중에서 하나만 따줘요." "아직 푸른걸 보니 익지 않아 먹기에 합당치 못하구나." "사랑하는 아이들아, 지금 이 열매는 푸르니 우리가 기다려야 한단다. 그러나 조금 더 햇빛을 받고 몇 번 소낙비가 오고 나면 복숭아가 익어 달라질 거야. 시므온도 그럴 거야." 정말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습관에 있어서 매우 정확하고 깔끔하였습니다. 그는 상세한 일 까지 정확을 기하기를 원했습니다. 잘못하여 세미콜론(semi-colon) 대신 콜론(colon)이 들어가 있으면 그것을 세심하게 유념하여 바꾸었는데, 그런 일로 시간을 쓰는 일도 잘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돈, 쓴 돈에 대해서는 일전 일푼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계산서를 보관하였으며, 매년 그 계산서를 감사받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계산을 마치니 한 페니(penny - 당시의 영국화폐 단위로 240분의 1 파운드에 해당하는 가치였으니 정말 작은 단위였고, 지금으로 하면 그 가치가 어느 정도에 이르는지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려우나 불과 몇 십 원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역자 주) 가 차이났습니다. 아무리 계산들을 맞추어 검토해 보아도 그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는 자기의 것을 계산하는 그 회계원에게 말합니다. 만일 이 차이가 나는 한 페니를 발견해 내면 20파운드를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것을 알아내었고 그렇게 실행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까지도 그에게는 신경이 거스려 격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타는 불(벽난로의 불을 말할 것임 - 역자주)을 쑤썩거리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특별하였습니다. 한 번은 심방을 가서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그의 뒤에서 하인이 벽난로의 불을 쑤썩거렸습니다. 챨스 시므온에 의하면 '비과학적으로' 말입니다. 시므온은 돌아서서 그러지 말라고 주먹으로 하인의 등을 무섭게 때렸습니다. 심방이 끝나고 나서 서둘러 집에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인이 그가 타고 가는 말에 나쁜 재갈을 먹여 놓았습니다. 시므온은 격노하게 되었고 마치 그 하인이 정말 심각한 죄를 범하였다는 식으로 크게 노를 발하였습니다. 그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말합니다. "그의 성미는 그렇게 광포하게 폭발하곤 하였다." Hankison은 그 모든 것을 알고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은 시므온은 그 즉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인에게 자기를 용서하여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내가 정말 많이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이러합니다. 내 바램과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잘못에 계속 빠져 들곤 하지요." Carus는 '그의 생애 전체 동안 <그 문제가> 바로 그의 투쟁거리요 시험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Max Waren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영적인 역사에 있어서 기이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자기 심령을 다스리되,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자기 교구민들로부터의 반대와 대학에서의 경멸,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적대적인 행위까지도 대면해 나갈 정도로 자기 심령을 다스릴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이다."

 

 

7. 때로 그는 자기 설교가 효과가 없다고 느꼈다.

 이 대목은 자기 설교가 실패한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어떤 목사에게나 용기를 줄 것입니다.

1796년 6월에 시므온은 스코트랜드에 있었습니다. Prethshire의 한 마을 Moulin 있는 교회에서 성례주일을 보내면서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메마르고 둔하였다. 저녁에 다시 영어를 이해하는 자들에게(당시 스코트랜드에서 스코트랜드의 토속어를 주로 쓰고 있었던 자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 역자주)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아주 적었고 내 말을 이해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메마르고 둔한' 설교의 열매는 정말 심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 두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James Duff 와 Jean Rattray 라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장래에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을 해외에 선교사로 나가 일하게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Alexander가 그들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스코트랜드가 낸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George Smith는 다음과 같은 말로 Alexander Duff 의 전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Alexander Duff 의 영적인 선조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찰스 시므온을 만나게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Alexander Stewart는 목사는 시므온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설교의 적응력에 변화를 가져왔고, 그의 설교는 Moulin과 그 주변 지역에 큰 성장을 이끌고 왔습니다. 5개월 뒤에 Stewart 는 시므온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한 가난한 여자가 목사님이 거기 와서 설교하셨을 때에 들었었는데, 목사님의 강론을 통해서 어찌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꼭 목사님께 전해 주십사고 졸라대었습니다. 그 여자는 제가 알기로 제 교구에서 셀 수 있을 정도의 진실한 몇 안되는 그리스도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작고 허름한 누옥(陋屋)에서 혼자 아주 외롭게 살고 있으며 그저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이 연약하고 곤비하여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 . . 안색에 주님의 모습을 아주 크게 드러내고 있고 주님과 많은 교제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소수의 청중들도 이해한 것 같지 않던 그 '메마르고 둔한' 설교로 말미암아 나온 것들입니다! 하나님 아래서 설교자의 말과 행동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이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또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말했는지 기억하였습니다. 좋든 싫든 간에 그 감화는 목사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랜 후에도 남아 있습니다.

 

 

8. 그는 자기가 죄인이란 의식을 항상 견지하고 있었다.

시므온이 쓴 글에서 인용한 다음의 대목은 여기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나는 한 순간도 내가 그 존중하는 나의 구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상실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무리들 속에서 항상 기쁨에 차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깊은 겸손을 계발하려고 부단하게 애를 써왔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이 나 자신을 용서할 이유로 생각한 한 적이 없다. 도리어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화해하셨다는 하는 확신이 들어올수록 그 만큼  더 나 자신을 혐오하는 것이 낫다고 항상 판단하였다.

그는 이사야6장에 나오는 이사야의 환상에 대해서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마땅히 소원해야 하는 것만큼 하나님께 대한 경외 어린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보편적으로 표현되는 확신은 내 의견으로 볼 때에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은 피조물다운 정신의 취향이거나 아니면 죄인다운 심령의 취향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선한 사람들 백명에게 환상 중에 이사야가 보좌 앞에 있는 스랍들과 또 그 스랍 마다 여섯 날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처음 알려 주고 난 다음에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그들이 자기들의 날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내 생각에는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아니 그것들이 그 날개로 있는 다해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들이 6백개의 날개가 있다면 역시 같은 일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그 힘으로 최선을 다하겠지요' 그러나 그들 스랍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서기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라고 여겨 자기들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날개 둘을 사용하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길 만큼 합당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들의 발을 가리기 위해서 날개 둘을, 그리고 나머지 날개 둘만 바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남겨 두었다. 그 질문을 받은 100명 중 99명은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내 영혼의 모든 행동과 습관 속에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의식이 배어들게 하고 싶다.

 

 

9. 그는 겸손의 은혜를 계발한 사람이었다.

 매년 그는 9월 24일을 자기 생일로 지키었는데, 그 말은 금식하며 자신을 겸비하게 나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지난 43년 동안 왜냐하면 내 그 날을 겸비함의 날로 지켜왔는데, 내가 사는 매년 그러한 계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더 느꼈다."

 

그가 장립 받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John Thorntion 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많은 지원을 한 런던의 부상(富商)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새로운 목사가 명심해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적혀 있었습니다. 1. 겸손. . . 2. 겸손. . . 3. 겸손. . . 그의 개인 공책에 큰 글자로 두 번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27세 때에 그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23세가 되던 1783년 8월, 그러니까 장립받은지 1년이 되었을 때 버밍험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설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주 설교를 잘 하였다고 생각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많은 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집에 와 보니 Riland 목사님이 와 계셨는데 제가 한 설교에 대해서 칭찬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만 말을 중복하는 허물을 지적하여 주셨다. 그리고 적용에 있어서 풍성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셨다." 정말 시므온을 낙담하게 하고 겸비하게 하는 논평에 대해 시므온 자신이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신실한 친구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말로 할 수 없는 복인가!"

1796년 7월 그는 스코트랜드에 있으면서 주로 4, 5백명으로 구성된 회중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어린이들은 유순해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시선을 오래 끌 수 없었다. 내게는 그 때가 무엇이 잘 되어 가는 계절이 아닌 것 같았다." 그와 같은 경우를 만나면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를 주목하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꾸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허물은 내게 있었다. 내가 어떤 주제이든지 연구를 하지 않았고, 내 심령이 내가 하는 일과 정황에 대해서 경건한 인상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거룩한 일들을 감당하는 나의 부족한 것을 참아내게 하는 회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Henry Venn은 시므온이 교만한 성향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그의 딸들과 복숭아에 관련된 일에 빗대어 말하면서 이렇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는 자신을 아는 더 깊은 지식으로부터 훨씬 더 겸손하게 된 것 같았다. . . 그 어느 누구도 질책을 듣고 그 사람같이 참아내고 또 유익을 얻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0. 무엇 보다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Wilberfocre는 자기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와 같이 있는 시므온 -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그가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며, 다른 이들의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려고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오! 내가 그 사람 같이 그리스도를 본받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Ohio의 감독 McIlvaine은,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가지는 얼굴은 그 자체가 한편의 설교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므온 목사가 강단에 올라갈 때에는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 그는 경건한 묵상 속에 완전하게 빠진 것 같이 보였다.'

시므온이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거기 있었던 자들은 그 노인이 다음과 같이 외칠 때에 자기 구주의 영광에 대한 깊은 인상에 젖어 영혼이 소생하여 눈을 넓게 뜬 것 같이 하던 방식을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하시고 말고요. 반드시 그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하실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사도와 같은 존재인 Marsden은 1794년 8월에 캠브릿지에 있었습니다. 그가 시므온을 찾아 방문을 하였을 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Marsden은 문을 밀어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시므온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깊은 묵상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의식으로 얼마나 깊이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자기를 찾아온 그 방문자를 영접하거나 반가워하는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큰 소리로 외쳐댔습니다. "영광! 영광! 오, 영광이여!"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사는 모든 날들 속에서 내게는 위로가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뻐할 일이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한 간절함을 보시기만 하여도 쉽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1836년 9월 21일, 그러니까 그의 77세 생일이 되기 사흘 전에 Ely라는 곳에 갔습니다. 날씨는 춥고 습하였습니다. 거기서 감기에 걸려 이내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워 죽어갈 때 William Carus가 그에게 무엇을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생각은 않고 즐기고 있어요." 그런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내가 에베소서 3:18-19를 생각하고 살펴보면서 무엇을 즐거워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세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임종을 지켜 본 자들 중 한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그는 계속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오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라는 말씀에 집중하며 반복 뇌였습니다.

 

그는 1836년 11월 13일 주일 오후 2시경에 운명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St Mary교회당의 종이 울렸는데, 그 종은 그가 친히 설교하곤 하였던 대학교 예배 설교를 알리는 종 소리였습니다. 그는 그 다음 토요일에 장사되었습니다. 오전 10시에 예배가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9시 이전부터 남녀 사람들이 모두 깊은 애도를 표하는 옷을 입고 King's College Chapel 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예배당은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올갠 반주자가 Handel의 '장송 행진곡'(Dead March)을 연주하였습니다. Holy Trinity 교인 800여명과, 그 대학교의 단과대학 학장들과 교수들을 포함하여 1,500여명이 함께 모였습니다. 모든 단과 대학 교회들의 종이 울렸습니다. 그 예배당의 북동쪽을 중심으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대학교의 모든 강좌들이 그 날만은 휴강되었습니다. 그 읍내에 그 날 시장(市場)이 서는 날인데 가게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거리들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캠브릿지에 전에 그와 같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와 같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그 예배당 서쪽 끝의 지하 교회 묘소에 매장되어 누워 있습니다. 그 묘비명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 'C. S.1836'. 오늘날 Trinity 교회의 성단소(聖壇所, 영국 국교회당의 성가대석과 성직자가 앉는 자리로서 대개 강단 동쪽 끝이다 - 역자주)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기념비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King's College 의 원로요 54년 동안 이 교회의 교구목사였던 챨스 시므온 기념하며 이 비를 세운다. 그는 자신의 소망의 터나 자기의 모든 사역의 주제로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고전2:2)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분이셨다. 1759년 9월 24일에 태어나서 1836년 11월13일에 죽었다"

 

(In Memory of The Rev. Charles Simeon MA, Senior Fellow of King's College and fifty four years vicar of this parish; who, whether as the ground of his own hopes, or as the subject of all his ministrations, determined to know nothing bu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1Cor.11.2 Born Sep 24,1759. Died Nov 13, 1836.)

Ian S. Bater(서문강 목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