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復活節 - 고린도전서 15장 성경 강해 -

好學 2012. 1. 21. 04:36

活節 - 고린도전서 15장 성경 강해 -


※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부활에 대한 2대 명제]

⊙ 15:12 [부활이 없다]

⊙ 15:35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①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며]

②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두 명제에 대한 논증적 답변으로 15장이 구성됨

첫째, 서론 15: 1-2 구원의 복음

둘째, 본론 15:3-57 부활론

Ⅰ. 부활의 확실성 15:3-34

Ⅱ. 부활의 양태와 성격 15:35-57

셋째, 결론 15:58

⼁ 서론 15:1-2

고린도 교회가 받은 부활의 복음 신앙에 굳게 서라

⼁ 본론 15:3-57

 

Ⅰ. 부활의 확실성 15:3-34

1.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증거(15:3-11)

1) 성경의 증거(15:3-4)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15:3)

(2) 그리스도의 장사지냄(15:4a)

(3) 그리스도의 부활(15:4b)

2) 제자들의 증거(15:5-8)

(1) 게바에게(15:5 = 눅24:34)

(2) 열두 제자에게(15:5 = 눅24:33-39, 요20:19, 26)

(3) 오백여 형제에게(15:6a)

(4) 야고보에게(15:7a)

(5) 모든 사도에게(15:7)

※ 복음서의 또 다른 증거

⼗ ① 막달라 마리아에게(막16:9, 요20:11-18)

② 다른 여인에게(마28:9-10), ③ 글로바와 동행한 청년에게(눅24:13, 15), ④ 디베랴 바닷가에게 제자들에게(요21:1-14) ⑤ 도마와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요20:24-29) ⑥ 승천 직전에 열한 제자들에게(행1:4-11, 눅24:50-51)

(6) 바울 자신에게(15:8)

※ 예수 부활 후 확실한 많은 증거들임(행1:3).

※ 부활하신 후 예수의 몸(부활체)은 어떠했나?

첫째, 갑작스러운 출현과 사라짐이다(눅24:15, 31, 요20:19-21)

둘째,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의 몸이었다.

① 말을 함 ② 식음(食飮)함 ③ 도마에게 실체를 가지고 증거함 ④ 제자들과 함께 활동함

셋째,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면서 초시간, 초공간적임

넷째, 물리적이면서, 초물리적임

다섯째, 여러 장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남

여섯째, 가시적 인격체(靈體)로 순전한 몸

일곱째, 그 부활의 영체는 성도 부활의 예표(15:20)

3) 바울 회심의 증거(15:7, 9-11 = 행9:1-22)

사울의 부활 체험

0 (1) 그는 초자연적 영광의 빛으로 나타남(행9:3)

(2) 이름을 불러 주는 음성으로 나타남(행9:5)

(3) 사울의 죄를 찔러 주므로 나타남(행9:4)

(4) 사울의 사명을 가지고 나타남(행9:15)

(5) 결과 ① 사도가 됨(15:9)

②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15:10)

③ 증인이 됨(15:11)

2. 기독교회 존재의 기초로서의 증거(15:12-19)

⼤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부활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탄생시켰다.

⼤ 기독교회는 예수 부활의 산물로서 역사 가운데 새롭게 나타난 또 다른 예수운동이다.

⼤ 기독교회는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적 실증이 된다.

 

※ 역사 성립의 요건들

⼸시간 ⼸공간 ⼸사람 ⼸사건 ⼸원인과 목적(왜) ⼸결과 ⼸기록 가치의 유무 등이다. 예수의 부활의 사건과, 부활의 산물로서 존재하게 된 기독교회는 이러한 역사성을 충족시키고 있다.

사도는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회가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고 선언함.

15장 14절에 가정법적 표현으로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교회가 어찌 존재했겠는가? 하는 논증적 답변이다.

1) 그리스도 자신도 다시 살지 못함(15:13, 16)

2) 교회 선교 행위(복음 전파)도 헛됨(15:14a)

3) 교회 신자들의 믿음도 헛것이 됨(15:14b, 17a)

4) 복음 전도자들이 거짓 증인이 됨(15:15)

5) 인류의 죄사함도 없었을 것임(15:17b)

6) 이미 믿고 세상을 떠난 신자들이 망하게 됨(15:18)

7) 현존하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불쌍한 자가 됨(15:19)

그 이유는 (1) 헛된 삶이 되기 때문(껍데기)

(2) 사기꾼 노릇을 했기 때문

(3) 예수 신앙 때문에 모든 고난을 감수했기 때문


3. 성도 부활의 보증으로서 증거(장래)(15:20-28)

1)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15:20-22)

2) 부활의 순서(15:23-24)

부활의 첫째 부대는 그리스도 자신(15:22a)

부활의 둘째 부대는 그리스도 신자(15:22b)

부활의 셋째 부대는 나중 부활이다(15:24)

3) 그 결과(15:24b-28)

(1)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 바침 (15:24b)

(2) 원수 사망은 멸망(15:25a)

(3) 그리스도는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왕(15:25b)

(4) 새로운 우주 질서의 회복(15:27-28a)

(5)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심(15:28)

4. 성도의 소망 생활의 증거(현재)(15:29-34)

1) 세례 받음(신앙 고백)은 부활 소망 때문(15:29)

2) 일사각오의 박해 감수도 부활 소망 때문(15:30-32)

3) 각성의 삶도 부활 소망 때문(15:33-34)

(1) 악한 동무에게 속하지 않음(15:33)

(2) 깨어 있음(15:34a)

(3) 의로 행하고 범죄치 않음(15:34b)

 

Ⅱ. 부활의 양태와 성격(15:35-57)

1. 부활 몸의 양태(종류)(15:35-41)

※ 15장 35절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1) 죽음을 통한 생명의 비유(15:37-38)

2) 부활 몸의 다양성(15:39-41)

(1) 각각 다른 육체(15:35)

(2) 각각 다른 형체(15:40)

(3) 각각 다른 영광(15:41)

2. 부활 몸의 성격(15:42-57)

※ 15장 35절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1) 썩을 몸에서 썩지 아니할 몸으로(15:42)

2) 욕된 몸에서 영광스러운 몸으로(15:43a)

3) 약한 몸에서 강한 몸으로(15:43b)

4)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으로(15:44)

5) 두 몸의 대조(아담과 그리스도)(15:45-48)

(1) 두 시조(15:45)

(2) 두 몸의 창조 순서(15:46, 창2:7)

(3) 두 몸의 출처(15:47, 창2:7, 전12:7)

(4) 두 몸의 상태(15:48)

(5) 두 몸의 장래(15:49)

6.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재림시의 생존자)(15:50)

(1) 서론 : 육의 몸은 천국에 부적(不適)(15:50)

(2) 잠자지 않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15:51a)

(3) 어떻게 될 것인가?(15:51b)

(4) 그것의 필연성(15:53)

7. 죽음에의 승리(개가)(15:54-47)

(1) 부활은 생명의 승리(15:54, 사25:8)

(2) 부활은 생명의 개가(15:55-56, 히2:14-17)

(3) 부활(생명)의 주체는 예수(15:57)

 

Ⅲ. 결 론(15:58)

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 부활의 소망

1.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 것(15:58)

1) 부활 복음의 대적

(1) 허위설

(2) 기절설

(3) 도적설

(4) 환상설

(5) 신화설

(6) 기타

2) 헛된 사상들

(1) 무신론 (2) 유물론 (3) 자연신론 (4) 진화론 (5) 불가지론 (6) 우상 숭배

(7) 현세주의자들

3) 종말의 적그리스도 운동

(1) 큰 붉은 용

(2)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3)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4) 짐승의 표 666

(5) 바벨론

2.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15:58)

1) 신앙(요6:29)

(1) 절대 계시에 대한 절대 신앙

(2) 바른 교리에 착념(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2) 행위

(1) 바른 교회 생활

(2) 세계 선교 운동(복음 전파)

3. 그 이유 ; 주 안에서 수고가 헛되지 않음(15:58c)

일찍이 저 유명한 파렐(Farrel)은 '인간의 기록 중에서 본질의 말처럼 슬픔을 당한 여러 만인들에게 위로를 준말은 아직 없다'고 한 바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유명하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은 미래를 향한 인류 소망을 선언함에서 유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열망하는 인생의 미래 문제, 본질 문제, 곧 영생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을 받은 모든 인류가 만날 피할 수 없는 인생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영감의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예컨대, 교회 분쟁 문제(1:10-4: ), 도덕 문제(5: -7: ), 우상 제물 문제(8: -10: ), 모임(집회)과 은사에 관한 문제(11: - 14: ) 등이었다. 성령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점을 알려 주었다.

그 중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는데 '부활'에 관한 문제였다.

고린도교회에 야기된 부활에 관한 문제는 15장 12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것과 15장 35절에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논증적 답변으로 부활은 확실히 있다(15:1-34)는 첫 번째의 내용이고 두 번째의 논증적 답변으로 [부활의 몸은 영생체, 곧 영광스러운 불사의 몸이다]는 내용이 15장 35절로 57절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이 15장 58절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5장의 구성 내용은,

첫째 서론(15:1-2) : 구원의 복음

둘째 본론 : 부활론(15:3-57)

Ⅰ. 부활의 확실성(15:3-34)

II. 부활의 양태와 성격(15:35-57)

셋째 결론 : (15:58)

첫째, 서론 (15:1-2) - 구원의 복음

바울은 서론에서 고린도 교인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15:1). 마지막 58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영통 가족이 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메시지이다.

바울은 15장 1절에서 저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있다고 하였다. 15장 2절에는 [나의 전한 그 말]이라고 하였다. 15장 3절에서는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하였다.

여기에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향하여 사용한 '복음'은 총체적인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화육강세, 무죄의 삶,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영생 등의 내용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이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 본문에 [알게 하노니]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처음부터 이 복음을 받은 자들이요, 그 복음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15:1).

그러므로 15장 2절에서 형제들이 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헛되이 믿지 말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아무런 목적이나, 내용이나, 계획성 없이 믿는 맹종적, 방종적 신앙을 가리킨다.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복음은 확실한 목적과 알찬 내용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믿는 복음은 '구원'이라고 하는 어마 어마한 내용과 목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론 : 부활론 (15:3-57)

 

Ⅰ. 부활의 확실성(15:3-34)

べ 15장 12절 [부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

 

1. 부활은 역사적 사실(15:3-11)

1) 성경의 증거(15:3-4)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1)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15:3)

15장 3절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하였다. 이것은 저 구약의 예언의 중심이다(사53: , 시22: ). 그리고 예수 자신이 예언한 바이다(막10:45, 마16:21a, 요2:22a). 그는 성경 예언대로 오시고, 사시고, 죽으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는 성경을 다 이루셨다고 하였다(요19:30).

(2) 그리스도의 장사 지냄(15:4a)

15장 4절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사야는 그의 장사지냄을 가리켜 [그의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도다]고 하였다(사53:9). 마태복음 12장 40절에는 예수께서 선지자 요나의 사실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가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말은 그의 죽으심이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15:4b)

15장 4절[...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라고 하였다. 여기에 사흘이란 꼭 72시간을 이름이 아니고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토요일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후 첫날, 지금의 주일, 곧 사흘 되던 날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성경 예언 성취의 필연이라는 사실이다(마16:21b, 요2:22b, 요2:1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엠마오를 향하던 두 제자를 만나, 근심 중에 있는 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하였다(눅24:25-26).

성경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리키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딤후3:16, 벧후1:20-21).

2) 제자들(목격자)의 증거(15:5-8)

사도는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때 첫 번째가 성경 예언의 증거라고 하였다. 그 두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한 목격적 증거라고 하였다. 15장 5절로 8절 중에서는 다섯 번의 공적 증거를 말하고 있다.

(1) 게바에게(15:5); 개인적으로 보이심이었다(눅24:34)

(2) 열두 제자에게(15:5); 실지로 열한 제자였으나,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났음을 입증하는 말이다(눅24:33-39, 요20:19, 26).

(3) 오백여 형제들에게(15:6); 복음서에는 없는 기록이나, 그 중에 태반이 이 서신을 기록할 때까지 살아 있다고 하였다. 1,000개의 눈동자가 확인한 셈이 된다.

(4) 야고보에게(15:7a); 여기에 나타난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는 예수님 공생애 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7:5), 오순절 때 제자들과 함께 했고(행1:14), 그 후 예루살렘 교회에 지도자로 활동한 사실을 보게 된다(행15:13, 21:18, 갈2:9). 아마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신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5) 모든 사도에게(15:7)

이 말은 열두 제자 뿐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제자단을 이름이다. 예컨대 바나바와 실라 등이 포함된 사도단일 것이다.

복음서에는 여기 기록 외에 ⸁ 막달라 마리아에게(막16:9, 요20:11-18) ⸂ 다른 여인들에게(마28:9-10) ③ 글로바와 동행한 청년에게(눅24:13-15) ④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요21:1-14) ⑤ 도마와 그리고 열 한 제자에게(요20:24-29) ⑥ 승천 직전에 열 한 제자들과 여러 문도들에게(행1:4-11, 눅24:50-51)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

(6)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났다고 하였다

15장 8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모든 성경의 기록은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머물면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낸 부활의 입증이다(행1:3).

 

※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몸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갑작스러운 출현과 사라짐이었다. 예컨대, 엠마오로 항하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사 동행해 주심(눅24:15)과 또 축사하실 때 홀연히 사라져 버림이다(눅24:31).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문빗장을 잠그고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사 평강을 선언하였고,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였다(요20:19-21).

둘째, 그의 몸은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체로 나타났다.

(1) 말을 했다 (2) 음식을 먹었다. (3) 도마에게 상처받은 두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 주고 만져 보라고 하였다. (4) 제자들과 꼭 같이 활동했다.

셋째, 시간적이고 공간적이면서, 또한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이었다.

넷째, 물리적이면서, 또한 초물리적이었다.

다섯째, 여러 장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여섯째, 가시적인 인격체(영체)로 승천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초월하는 신공위성과도 같았다.

일곱째, 바로 그 부활의 영체(靈體)는 우리 부활의 예표였다(잠자는 자들의 첫열매 였다).

3) 바울 회심의 증거(15:9-11)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실을 말하기를 15장 7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말은 바로 저 유명한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부활 체험을 술회하는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어떻게 그에게 보이셨는가?

사도행전 9장에 보면,

(1) 초자연적 영광의 빛으로 나타났다(행9:3).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고 하였다(객관적 역사).

(2) 이름을 불러 주는 음성으로 나타났다. [사울아 사울아....](9:5). 이는 인격적 소명의 음성이다. 사울을 ⸁ 앎 ② 사랑 ③ 소원이 있다는 내용이다.

(3) 사울의 죄를 찔러 주면서 찾아 왔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하였다.

사도행전 9장 1절, 7장 58절, 22장 19절로 20절에 그의 죄가 나타나 있다.

(4) 사울에게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주님은 주권적 방문, 선택적 방문, 사랑의 방문, 은혜의 방문을 하셨다(행9:15).

그래서 사도 바울은 ① 15장 9절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고 ②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③ 사도로 수고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⑤ 15장 11절에 바울과(내), 다른 사도들(저희)은 이같은 부활의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 교인인 너희들도 그렇게 받았다고 하였다.

바로 그가 예수를 만난 다메섹 도상의 그 순간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삶의 분기점이 된 것이다.

그것은 B.C와 A.D였다. 그 순간의 은총으로 그는 세계 선교 지도를 새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선교의 동인(動因)이었다. 이 사실은 바울의 한평생을 자극했다.

이것은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건의 사실이라는 영감의 사람 바울의 주장이다(행26:26).

15장 1절로 11절은[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답변의 논증이었다.

2. 부활은 기독교회 존재의 기초(15:12-19; 과거와 현재)

 

서론: 예수 부활의 산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

지구촌에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결과 새롭게 나타난 또 다른 예수 운동의 실증이 된다.

보통 우리가 '역사'라고 할 때는 몇 가지 역사 성립의 요건들을 생각하게 된다.

⼗ 시간이 매개된다(언제)

⼗ 공간이 매개된다(어디에서)

⼗ 사람이 매개된다(누가) -역사의 행위자로서의 사람이다.

⼗ 사건이 매개된다(무엇을)

⼗ 왜 일어났는가?(목적론)

⼗ 어떻게 되었는가?(결과론적 의미)

⼗ 기록이 따른다. 기록할 가치 유무는 후대의 교훈을 위함이다.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고 할 때 이러한 모든 조건에 충족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부활 사건이 이런 의미에서 지구촌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사실이요, 역사였다.

그러므로 역사를 부인하는 자는 사실상 자기 존재 의미를 스스로 상실시키는 자이다.

이순신 장군,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 등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사도는 15장 14절에서 가정법의 표현으로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지상에 존재하는 기독교회의 존재 의미나, 존재 가치나 존재 목적이 전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영감의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15:12)는 자들에게 예수 부활의 산물로서 역사상에 존재케 된 그리스도 교회가 예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두 번째로 논증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바울의 답변적 논증은 일곱 가지이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1) 그리스도 자신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5:13, 16).

본문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13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6절)]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은 전 인류의 죽음과 부활이 된다. 그가 부활하셨다면, 전 인류도 부활하는 것이요, 또한 전 인류에게 부활이 없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에게도 부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로마서 4장 25절에 그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부활하시므로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셨다.

2) 그 교회의 선교 행위(복음 전파)도 헛됨(15:14a)

본문에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회가 받은 선교의 모토(motto) 중에 하나이다. 그것은 오순절 설교의 주제 중에 하나였다(행2:36). 사도 바울 선교의 주제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는 일 때문에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 소망의 증거 때문에 ① 염병 같은 놈의 취급을 받았다(행24:5). ② 송사를 받았다(25: - 26: ) ③ 미친 놈이라고 하는 오해를 받았다(행26:24).

만약에 예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회는 '빈 껍데기'라고 하였다.

본문에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라(ՊՅՍ՜Ս)는 말은 텅 빈 껍데기를 뜻하는 말이다.

허실이요, 허상이요, 위선이요, 외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기독교회의 '알맹이'는 부활 소망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은 선교의 주제였다. 또 그것이 전 인류의 소망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이천년간이나 기독교회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다.

3) 교회 신자들의 믿음도 헛것임(15:14b, 17)

성경은 다시 말하기를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여러 세기를 거쳐 이 세상을 살다 갔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내용이요, 고백의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바로 사도신경 중에도 고백을 이루고 있다.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난 것을 믿고 또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것](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영생)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 신앙이나, 자신의 부활 소망이 없는 자는 깡통교인(?)밖에 안될 것이다.

교인은 될는지 몰라도 신자는 아닌 것이다. 존재하는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생명의 알맹이를 담고 있다.

4) 복음 전도자들이 거짓 증인이 됨(15:15)

성경은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말이다. 예수 부활이 없다면, 단순한 껍데기 교회나, 껍데기 신자나, 껍데기 선교 정도가 아니라, 역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수 증인들이 사기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없는 부활'을 있다고 증거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 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기꾼치고는 극악한 종류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사기꾼치고 종교 사기꾼, 특히 기독교 사기꾼은 악성적이다.

그러나 이천년 동안 모든 인류 중에서도 이루 셀 수 없는 수다한 무리의 전도자들이 전한 예수 부활의 복음을 받았고, 믿었고, 그 결과 영생을 얻었다. 그 이유는 저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이 사기가 아니고, 사실이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거짓말이 그렇게도 오래 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거짓말이 그렇게도 영향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고, 감화력이 있단 말인가?

예수 부활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허실이나, 허상이 아니고, 실체요, 실상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의 역사적 부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는 사기꾼에게 속은 사람이 된다.

5) 인류의 죄 사함도 없을 것임(15:17b)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영원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 났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칭의'의 근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을 믿음으로 이방인들이 사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행10:43, 11:1-18). 예수 부활을 믿는 생명의 소망이 신자의 마음에 없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나의 죄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부활하시므로, 그 죄값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를 다시 무덤에서 이끌어 올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다.

6) 이미 믿고 세상을 떠난 신자들이 망하게 됨(15:18)

다시 성경은 말하기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라고 하였다.

멋지고 멋진 말이 있다.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이 망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 잠자고 있는 자]라고 표현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을 [잠자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로 15절에서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가리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다]고 하였다(막5:39). 이 소리를 들은 무리들은 비웃었다.

예수님은 자기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니 깨우러 가자]고 하였다(요11:11).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는 이 잠자는 상태를 가리켜 [쉬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육신이 죽은 자들은 결코 망한 자들이 아니고 잠자고 있는 자들이다. 깰 때가 전제된 말이 아닌가?

여기 우리 본문에 [망한다]는 말은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 그러나 결코 저들은 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저들은 예수 부활의 씨를 받고 갔기 때문이다. 그 씨를 받아 지금 잠시 장들고 있기 때문이다.

7)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불쌍한 자가 됨(15:19)

성경은 또 말하기를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소망이 금세 뿐이라면, 우리는 불쌍한 자 중에도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1) 껍데기 인생(헛된)을 살았기 때문이다(헛된 믿음)

(2) 사기꾼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 명예에 수치요, 가문과 민족과 역사 앞 에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

(3) 예수 때문에 모든 고난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온갖 세상의 핍박과 멸시와 모욕과 천대와 심지어 죽음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바울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그는 예수 부활 증거 때문에 넘치는 수고, 옥에 갇힘과, 수 없이 맞은 매,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계속되는 수고, 애씀, 잠자지 못함, 굶주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 그리고 모든 교회를 위한 눌림(고후11:23-28), 그리고 고소를 당함, 마침내 죽임에까지 이르렀다.

예수 신앙 때문에 가정에 버림을 당하고 친구와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 류의 인권유린, 자유 박탈, 가산의 탕진, 그리고 추방과 죽음까지 불사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영감의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교훈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 자신은 다시 살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전도는 확실하고, 신자들의 믿음도 확실하고, 모든 복음 증인들의 증거가 사실이고, 죄 문제 해결도 사실이고, 이미 믿고 죽은 자들은 성공했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모든 류의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자가 아니고,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내용있는 삶, 미래적 삶, 소망의 삶, 창조적 삶, 목적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신앙 내용과 삶의 내용을 고백하는 단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역사적 표징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바로 예수 부활의 또다른 모습이요 실체요 증거이다. 교회는 부활의 산물, 부활의 표징, 부활의 증거물이다.

 

3. 성도 부활의 보증으로서 증거(15:20-28 ;미래)

1)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열매(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라고 하는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기절했다거나, 안 죽었다는 말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한다. 그는 분명히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된 사실을 숙지시키는 말이다.

여기 [잠자는 자들]이란 육신이 죽어 무덤에 있는 자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다시 이 멋진 말을 새겨야 한다. 주 안에서 육신이 무덤에 가버린 자는 잠자는 자들이라고 거듭 거듭 표현하고 있다(15:18, 20, 51). 잠을 자고 있음은 안식의 시간이요 그것은 다른 활동을 준비하는 잠정적 조치가 아닌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성도 부활의 예조요, 보증이라고 하였다. [첫 열매]라고 하는 말은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말로 계속적인 수확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15장 21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고 하였다. 이것은 첫사람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 온 것처럼 마지막 아담(15:45),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2절로 21절에 나타난 대표 원리의 설명이다.

15장 22절에 다시 같은 내용의 원리가 반복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예수 부활은 잠자는 자의 부활의 첫열매라고 하는 사실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2) 부활의 순서(15:23-24)

15장 23절에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하였다. 여기 [차례대로 된다]는 말은 군대 술어로서 '부대가 행렬을 맞추어 진행'함을 뜻한다. 부활에도 질서 정연한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활의 첫째 부대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였다(15:22a)

[먼저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라고 하였다. 그는 부활의 원형이요 왕이 시요 대장이시다.

둘째 부대는 신자의 부활이라고 하였다(15:22b)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 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하였다.

여기 [그리스도 강림]은 그리스도 재림 때를 가리키는 뜻이다 [강림](ՐՁՑՕՓԿՁ)은 황제나, 왕의 도착, 또는 방문을 뜻하는 말로 예수 황제의 재림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 때 [그에게 붙은 자]의 부활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그와 짝하고', '그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부활의 제 2부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영생의 황제로 다시 오실 때 먼저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그 다음에 그 때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변화하여 부활의 영체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살전4:16, 17, 3:13).

셋째 부대는 나중 부활이다(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나중'은(ՔՏ ՔԽՋՏՒ)은 '세상 끝'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 따르게 될 불신자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나오는 두 가지 부활 중 '심판의 부활'을 뜻함이다. 이것은 예수 최후 심판의 날에 있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다. 계시록 20장 13절로 15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니라]고 하였다.

성경은 신자의 '부활'을 '생명의 부활'(요5:29)이라고 하였다. 불신자의 마지막 부활은 사망의 부활, 또한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셋째 부대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이다.

3) 그 결과(15:24b-28)

(1) 원수 사망은 멸망된다(15:25a). 다시는 사망이란 폭군이 인류를 괴롭힐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다(15:24b). 이 말은 영계와 인간계의 모든 권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2) 그리스도는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왕노릇을 하게 된다(15:25b).

(3) 새로운 우주 질서가 회복된다(15:27-28a). 그것은 바로 만물의 갱신과 질서 회복이다.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새롭게 복종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된다.

인류가 범죄로 인하여 타락하였을 때 만물과 인류의 타락과 함께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로 타락하였다. 그것이 우주 질서의 파괴였다.

이제 예수의 최종 심판과 함께 새하늘과, 새 땅의 세계가 도래하고 전 우주를 새롭게 창조 질서로 회복된다.

만물은 성도에게 복속하고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복속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복종하기에 이른다(고전3:21-23).

(4)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신다(15:28).

4. 성도의 소망 생활의 증거(15:29-34; 현재)

예수 부활의 확실성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것은 예수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으로 저들의 삶에서 나타내는 경험적 증거, 체험적 증거이다.

1) 세례 받음(신앙고백)은 부활 소망 때문이다(15: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결코 죽은 자를 위하여 대신 세례 받는 이른바 대리적 세례가 아니다. 그것은 이단적 해석이다.

이 말의 바른 해석은 예수를 믿고 죽어 가는 성도가, 그의 불신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부디 예수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부탁 받은 자(전도 받은 자)가 나중에 그 사람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음, 곧 신앙고백을 함을 의미한다.

여기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 받는다]는 말은 '죽은 자들 위에서'하는 말로 자기에게 죽어 가면서도 전도해 준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무덤 위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를 뜻함이다. 초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성경이 주장하는 중대한 교훈은 ①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예수를 증거 했다는 사실과 ② 또 그들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그 부활 소망을 믿고 깨달아 저들도 함께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부활의 확실성은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신자들의 수세(水洗) 행위에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지상에 모든 교회들은 저들의 신조 가운데 예수께서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과 그를 믿는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2) 일사각오의 박해 감수 생활도 부활 소망 때문이다(15:30-32)

[또 우리가 어찌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노라]고 하였다.

만약에 바울이 부활 소망이 없었다고 하면 죽음에 이르는 그 무수한 선교 여정의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고전4:9-13, 고후4: 10, 11:23-27).

바울은 자기의 자랑거리인 교회를 두고 엄숙하게 맹세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나는 매일 죽음의 위험 가운데 있노라]고 하는 말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부활 신앙이 없는 보통 사람(범인)으로 에베소의 박해자들(맹수)과 싸웠으면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에서 예수 부활 신앙과 선교 때문에 박해자들과 더불어 분투했다고 하였다.

만약에 부활 소망이 없다면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현실 쾌락주의가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였다(사22:13).

문제는 찬란한 내일의 부활 소망 때문에 오늘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현실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각성하는 삶도 부활 소망 때문이다(15:33-34)

본문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하였다.

(1)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다(15:33).

그것은 부활 소망을 가진 신자들의 복음 중심 생활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대한 각성이다.

(2) [깨어 ]라고 하였다(15:34a)

여기 [깬다]는 말은 '술취함에서 깨어남'을 가리킴인데 순간주의적 쾌락 사상에서 일어남을 가리킨다. 육체주의에 대한 각성이다.

(3) 의로 행하고 죄를 범치 말라고 하였다(15:34b)

이는 성별 생활을 가리킨다. 고린도 도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러한 세속주의자로 가득차 있었는데,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 순진한 신자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속화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소망을 가진 자는 오늘에서 내일로, 현재에서 미래로 그 삶의 방향을 돌리고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가는 자들이란 말이다.

이렇게 예수 부활은 우리들의 삶을 미래 지향적으로 바꾸어 놓고 만다. 오늘의 절망에서 내일의 소망을 찾고, 오늘의 실패에서 내일의 성공을 찾고, 오늘의 답답함에서 내일의 시원함을 찾고, 오늘의 불쾌함에서 내일의 유쾌함을 찾고, 오늘의 유한에서 내일의 무한을 찾는 것이다. 오늘의 눈물에서 내일의 웃음을 찾고, 오늘의 탄식에서 내일의 개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과, 장차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부활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이것은 '예수 부활이 없다'(고전15:12)는 주장에 대한 답변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증거 했다.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로서 증거 했다. 장래 성도 부활의 보증으로서 증거했다. 현재 성도의 소망 생활로서 증거했다.

Ⅱ부활의 양태와 성격(15:35-57)

이 부분은 15장 35절에 대한 논증적 답변이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15장 35절의 내용은 부활의 여러 양태, 곧 성격에 대한 질문인데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죽은 자들이 어떤 류의 몸으로 사는가?(양태)

둘째는 또 그 몸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성격)

1. 부활 몸의 양태(종류)(15:35-41)

이 부분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된다.

1) 죽음을 통한 생명의 비유(15:37-38)

15장 37절로 38절에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하였다.

이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나타난 주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였다.

이 본문에서 부활의 몸은 육신의 죽음 과정 이후에 일어날 사실로 씨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1) 씨(종자)가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다(15:35)는 것.

(2) 씨를 보고 미래의 형체를 말할 수 없듯이 육의 몸을 보고 부활체를 알 수 없다는 것(15:36)이다.

(3) 씨앗과 씨앗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체(몸)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하였다(15:37-38).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오는 진리는 자연계나 영계(靈界)의 공통된 진리이다.

(4)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고 하였다(15:38a).

본문에 [하나님의 그 뜻대로 저희에게 형체로 주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적 창조 역사이다.

2) 부활 몸의 다양성(15:39-41)

(1) 각각 다른 육체(15:39)

15장 39절에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 육체라]고 하였다.

여기 '육체(ՓՁՑՎ)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 등 혈육과 그 이상의 조직체를 뜻함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창조 사역에 그 몸들의 구조와 모양과 생태, 기능을 각각 다르게 창조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창조의 다양한 미와 조화, 상호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획일적이고, 동일한 일이었다면, 얼마나 살벌했을까? 얼마나 무미건조했을까?

이 말은 부활 세계의 몸이 획일적이고,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2) 각각 다른 형체(15:40)

15장 40절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라고 하였다.

여기 형체(Փ،ՌՁ)는 생물이나 무생물의 조직체를 뜻함이다. 하늘에 속한 형체가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는데 그 형체의 영광이 또한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역시 하나님 창조 사역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이 말의 논지는 다시 살아날 장래 부활체가 현재의 우리 몸과 다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3) 각각 다른 영광(15:41)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 하였다.

본문에 요긴한 뜻은 ① 몸의 종류가 실로 다양하다는 사실 ② 거기에다 현재의 몸과 내세 부활의 몸의 차이가 있다는 것 ③ 뿐만 아니라 부활한 영광의 몸도 실로 다양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햇빛과 달빛이 다르고 수많은 별들도 그 광채가 각각 다르다. 고래(古來)로 별들의 빛을 표시하는 법이 있었다. 예컨대, 해는 황금색, 달은 은색, 또는 녹색, 화성은 적색, 수성은 청색, 목성은 오렌지색, 금성은 백색, 토성은 흑색 등으로 표시했다.

여기 나타난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과 별들의 영광이 제각기 다르다는 표현은 부활 몸의 찬란한 영광이 각기 다르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창조 질서에도 그 다양성이 나타났지만, 그 능력이 부활시키는 역사에도 나타난다.

2. 부활 몸의 성격(15:42-57)

15장 35절 하반 부분에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논증적 답변이다.

그 대답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유한의 몸]이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살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불사의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

1) 썩을 몸에서 냣지 않을 몸으로 부활(15:42)

이것은 두 몸의 내용을 대조하는 말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하였다. 여기 [썩을 것]이란 현재의 몸을 가리킴인데, 이 몸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이것은 범죄 타락한 인류에게 온 하나님의 심판이었다(창3:19). 이것은 죄의 값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우리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들의 몸은 죽음의 권세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살기 시작할 때, 또한 동시에 죽음의 권세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실로 무덤 속에서 깨어 썩어져 가는 과정이 계속될 것이다.

여기 [심는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끝남과 매장을 뜻한다.

그러나 다시 받은 부활의 몸은 그 썩음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부활체는 결코 썩을 줄 모르고, 사라질 줄 모르며 감소되거나, 변질되거나, 산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선함과, 생기와 매력이 그 특징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불사성의 몸이다. 그것은 결코 죄와 죽음에 지배를 받지 않을 몸이다. 그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번식의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이제 부활의 세계로 결혼 관계는 종결된다. 그렇다고 남자와 여자를 구별짓는 성별이 없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은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2) 욕된 몸에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하였다.

이것은 두 몸의 가치를 대조한 것이다.

[욕된 것]이란 병들고 신음하다가 결국 죽음의 운명을 띤 것을 가리킨다(롬8:11, 23). 그래서 그것은 죽은 후에는 육체적 가치가 없다.

'영광스러운 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꼭 같이 닮은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빌립보 3장 20절로 21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다.

그 빛나는 광채의 빛! 그 아름다운 몸! 그 권능의 몸! 부활하여 공중으로 이끌림을 당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몸이 아닌가? 그 때 우리 몸은 결코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전 믿음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현세적 실상은 앞으로 자기에게 벌어질 영광스러운 몸의 변화 앞에 그 마음이 초급 하다(욥19:25-27).

3) 약한 몸에서 강한 몸으로 부활(15:43b)

우리 본문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하였다. 이것은 능력의 대조이다.

현재의 몸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연약한 상태에 있는 실존이다. 바람에, 비에, 햇빛에, 추위에 약하다. 공해에 약하고, 여러 가지 환경과 질병에 약하다. 여러 경우의 위험들 앞에서 실로 하루살이처럼 약하다. 눈이 어두워 보기에 둔하고, 귀가 가리워 듣기에 둔하고, 손과 발목과 모든 전신이 언제 어디에서 무슨 고장이 날는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약체이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강하다]고 하였다. 그 몸은 결코 희미해 가는 눈으로 안경이 필요하거나, 보청기를 필요로 하는 귀는 아니다. 쇠약해진 무릎이나, 떨리게 될 손이나, 어눌하게 될 입술의 말이 아니다. 달리고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며 걸어가고 걸어가도 고단치 않은 그야말로 영원한 강함의 청춘이 될 것이다.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다(사40:29-31).

4)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함(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본질의 대조]이다.

여기 [육의 몸]이란 아담의 본성을 타고 난 죄된 몸을 가리킨다. 그것은 저주를 받은 몸이다. 흙으로 돌아갈 몸이다. [신령한 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받는 새 피조물을 뜻한다(고후 5:17). 성령께서 내재하여 영생으로 이끄는 몸이다. 말하자면 부활의 몸은 100%로 신령한 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확실히 미래적 소망의 실존이다. 그야말로 오늘에서 내일을 찾는 미래지향적 실존이다. 유한에서 무한의 실체를 찾아가는 살아 있는 실존이다. 결코 여기 세상에서 절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바울은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하였다. 이 세상 잠깐동안 가벼운 몸에서 저 세상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루어 나간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잠깐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찾아가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무너지지 아니하는 하늘에 장막이 있는 줄 아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저기를 쳐다보고, 오늘의 탄식에서 내일에 하늘의 것을 기다리며 사모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여기 장막에서 탄식함은 결코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이 영원한 부활체의 천국의 실존을 성령께서 보증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성령의 보증을 믿는다고 하였다(고후4:16-5:7).

5) 두 몸의 역사적 대조(아담과 그리스도)(15:45-48)

이 부분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육의 몸과 부활의 몸'을 아담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대조하고 있다.

아담은 육의 몸으로, 그리스도는 부활의 몸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1) 두 시조(15:45)

[기록된 바 첫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산 혼) 곧, 육체적 생명의 시조(창2:7)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으로 완전한 인간, 곧 영생의 시조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함은

⸁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값인 사망을 완전 지불했다는 천부의 선언이요,

⸂ 그의 부활로 오늘 우리에게 영적 부활을 주었다는 뜻(신생, 칭의, 양자, 성화.....)(롬6:4, 9, 8:11) 이요,

⸃ 그의 최후 재림으로 완전 부활(생명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롬4:25, 5:10, 빌3:10).

(2) 두 몸의 창조 순서(15:46)

본문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하였다.

창조의 순서는 육(몸)이 먼저이고, 다음에 영이라고 하였다(창2:7). 첫 사람 아담이 먼저요, 다음이 마지막 아담이다. 재창조는 영이 먼저요, 육(몸)이 뒤에 부활했다.

(3) 두 몸의 출처(15:47)

우리 본문에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땅의 흙으로 지음 받았다(창2:7). 그는 땅에 속하고 흙으로 되돌아갔다(창3:19).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둘째 사람] 아담인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했다. ⸁ 화육강세가 하늘로부터이고(요1:14) ⸂ 그의 재림이 하늘로부터이다(행1: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땅에서 난 사람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그의 신적 기원을 말하였다(요3:13).

(4) 두 몸의 상태(15:48)

우리 본문은 [흙에 속한 자]는 첫사람 아담을 가리키고 [흙에 속한 자들]은 아담의 후손을 가리킨다. 육의 몸을 입은 현재를 가리킨다. [하늘에 속한 자들]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이것은 장차 있을 부활의 몸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 몸은 아담과 같으나, 장차 예수 재림하실 때 우리가 입을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을 입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5) 두 몸의 장래(15:48)

우리 본문에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현재는 우리가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으나, 장차는 하늘에 속한 자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현재는 풀이요, 꽃으로 보이는 것이 장차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체를 입을 것이다. 현재 가벼운 것이, 영원히 무게가 나가는 영체의 몸을 입을 것이다.

현재는 땅에 있는 몸이나, 장차는 하늘에 있는 영광의 몸이 될 것이다.

현재 땅에 있는 몸은 무너질 장막과 같은 성질의 것이나, 장차는 무너지지 아니하는 불사의 영체를 입을 것이다.

6)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15:50-53)

이 부분에서는 부가적인 질문으로 주님 오실 때 살아남아 있는 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서론 : 육의 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15:50)

우리 본문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냣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혈과 육'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부활의 몸을 입지 않고는 천국의 기업은 불가하다.

(2) 잠자지 않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15:51)

⸁ 우리 본문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나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였다.

여기 [비밀]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감추인 자신의 계획'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에 '성도의 부활'은 사실상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다. 공개된 비밀이다. 공개해 주어도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거나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여기 [다 잠자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예수 재림 시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자들]을 뜻한다. 정말 또 한 번 흥미 진진한 문제이다.

(3)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15:51b)

성경은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였다.

저들은 여기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하였다.

여기 [마지막 나팔]이란 예수 재림을 알리는 신호를 뜻한다.

마태복음 24장 31절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였다.

저들은 그때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한다]고 하였다.

[순식간]이란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최단 시간 안에]를 뜻한다. 눈 깜짝할 사이를 의미한다.

[변화한다]는 말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영화의 몸, 부활의 몸, 불사의 영체를 입는 것을 가리킨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승천했다. 엘리야도 죽음의 과정 없이 불수레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 저들은 돌연한 변화를 입었을 것이다. 그것은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행사가 아닌가! 초자연적 역사이다.

이 사실을 다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부터 18절에 기록하고 있다.

[다] 변화한다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 살아남은 자 모두와, 이미 죽은 자의 부활까지를 총망라한다.

⸂ 완전 구원 성취를 나타낸다. 그리스도 안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하나도 남김 없는 변화를 가리킨다.

⸃ 전인류적이요, 우주적인 종말의 사건임을 나타내는 뜻이다.

(4) 부활의 순서는 어떠한가?(15:52)

우리 본문은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였다.

⸁ 먼저는 죽은 자들이고 ⸂ 다음이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러한 표현은 15장 23절에서도 나타났다.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 첫 열매이신 예수를 따라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실상 논리적 순서를 말하는 것 뿐이다. 동시성을 띄고 순식간에 일어날 대종말의 사건이다.

물론 인간계의 변동 뿐아니라, 전 우주의 변동이다.

(5) 그것은 필연적이다(15:53)

우리 본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하였다.

성도들의 부활은 [불가분]의 사건이다. 여기 [불가분]이란 말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목적적이요, 계획적인 사실의 도래를 선언하는 말이다. 전혀 불가항력적인 도래이다. 말하자면 예수 재림과 함께 부활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야말 사건의 사실이라는 뜻이다.

[입는다]는 말은 옷을 입는다는 말로서, 성도가 옛 옷, 낡은 옷, 곧 육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뜻이다.

사망의 몸이 아닌 생명의 몸, 약하고 욕된 몸이 아닌 강하고 영광스러운 몸, 유한의 몸이 아닌 영원의 몸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신적 필연성이다. 구속사의 필연성이다.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의 필연성이다.

그 누가, 그 무슨 이유로, 이 필연적인 구속사의 완성을 부인하거나, 반대하거나 도전할 수 없다.

그것은 새 하늘, 새 땅의 출현, 그리고 새 임금과 새 왕들의 출현과 함께 새 신민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7) 죽음에의 개가(15:54-57)

오래 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한 회교도와 기독교인이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먼저 회교도는 말하기를 '우리 회교도는 당신네 기독교가 갖지도 못한 것을 갖고 있소. 그것은 아라비아 메카에 가면 우리 회교 교주 마호ꅛ의 분묘가 있는데, 그 묘에는 마호ꅛ의 시신이 있어서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해 주지만, 당신네 기독교 발상지 예루살렘에는 예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소?'라고 하면서 큰소리 치고 자랑했다.

이 말을 들은 기독교인은 겸손히,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와 회교의 차이입니다. 마호ꅛ의 무덤은 그가 죽어서 육체가 썩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무덤이 없다는 사실로 예수님은 죽지 않고, 살아서 부활 승천했다는 입증이 되지요. 이 말을 하자 그만 회교 교인은 기가 죽고 말았다고 하였다.

그렇다. 과연 그러하다. 기독교는 무덤이 없는 종교이다. 무덤을 이기고 부활한 종교이다. 그것은 절망의 종교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9장 23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 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 동안 [부활이 없다](고전15:12)는 명제에 대한 답변적 논증으로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15:1-33)는 영감의 기록을 들었다.

또 부활이 있다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오는가? 어떤 종류의 몸으로 오는가?(양태)하는 질문과 또 어떤 내용의 몸인가?(성격)에 대해서 긴 영감의 답변을 들었다.

이제 그 답변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승리의 개가, 곧 죽음의 개가를 보게 된다.

(1)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라고 했다(15:54, 사25:8).

우리 본문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하였다.

⼇ 먼저 바울이 죽음에 대해서 나타낸 몇 가지 표현을 보자. 그는 죽음을 가리켜,

⸁ 원수라고 하였다(15:25). 그것은 죽음이 인류의 대적이라는 뜻이다. 원수가 있는 곳엔 평화와 안정이 없다. 공포, 불안, 초조, 긴장만이 있을 따름이다. 죽음은 무서운 폭군이다.

⸂ 썩는 것이라고 하였다(15:53, 54). 이것은 '냄새나는 것', '악취', '분해', '공해', '변질'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로 말미암는 또 다른 병균의 발생을 뜻하고 있다. 전혀 밝고 맑고 신선함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죄와 죄의 결과인 악성을 뜻함이 된다. 죽음이 사람을 썩게 했다.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썩게 했다. 냄새나게 했다.

⸃ 쏘는 것이라고 하였다(15:55).

그것은 '찌르고', '쑤시는 살'을 의미했다. 결과는 아프다. 사도행전26장 14절에 '가시채', 요한계시록 9장 10절에 '전갈'과 같은 고통의 성격이다. 죽음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모든 경우에 찌르고 있다.

⸄ 사망이라고 했다(15:54, 55, 56)

쉐올, 곧 음부를 뜻함인데 이는 캄캄함을 뜻한다. 바로 불로 소금치듯하는 지옥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는 원수 죽음 앞에서 썩고, 쏘여 망하게 되었다. 수많은 영웅과 호걸과 가인 재사들이 이 죽음의 폭군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다고 하였다.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한다고 했다.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죽음을 이기는 생명 승리의 개가이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라고 하였다.

(2) 부활은 생명의 개가이다(15:55-56).

우리 본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다.

지금 그리스도인은 사망을 호령하고 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는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다.

⸁ 사망은 죄의 결과이다.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였다.

그 죄를 깨닫게 한 것은 율법이라고 하였다(롬7:7-13).

사망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다. 사망은 본래 창조의 본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할 피조물로 만들었다(창1:"26-28, 창2:7).

사망은 죄의 값으로 온 것이다. 사망은 본래 창조 본연의 질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을 때 그 육체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 이것이 동물의 육체와 다르다.

동물은 살았을 때도 쓰이지만, 죽고나서도 그 값이 나간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육체는 부활의 재료가 된다. 생명 부활의 재료가 되든지, 사망 부활의 재료가 된다.

⸂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망을 호령하고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이김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쏨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호령하는 힘은 바로 예수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 달리다굼!(막5:41)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고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부활의 영을 받아 사망을 호령하는 생명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 실로 확신에 찬 생의 개가이다. 인류의 영원한 폭군이요, 지배자였던 사망을 호령하고 있는 자의 행복이여! 그는 실로 엄청난 생명의 용사가 아닌가?

(3) 부활 승리의 주체는 주 예수이다(15:57)

본문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말함이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 직전에 발하신 당신의 선언이시다.

예언 성취의 개가요, 율법 완성의 개가요, 속죄 성취의 개가이다.

⸂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리를 말함이다. 예수는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롬1:4), 또한 잠자는 성도들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다(고전15:20). 그래서 그는 생명의 왕이 되었다. 사망을 정복하고 생명의 왕노릇을 하였다. 바로 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된 것이 아닌가?

결론(15:58)

"내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멋있는 애칭이다. 지금 영감의 사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고린도 교우들을 향하여 부활의 복음을 전달하고 있다.

결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특별 계시인 성경을 받은 수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인 것이다. 그는 이 부활의 복음을 진술하는 서두에도 "형제들아!" 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 부활론의 결론을 맺고 있다.

1.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라(15:58)고 했다.

여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곧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굳게 하라는 것이다. 견고하라는 것이다. 확신 속에 자신을 정립하라는 것이다(골1:23, 요2서 9절).

그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이다. 곧 사람의 유혹이나, 핍박이나, 기타 여러 가지 시험들에서 요동하지 말라는 것이다(엡4:14).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복음 신앙에 굳게 서고, 사람을 향한 복음 전파 행위에 흔들리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 신앙과 생활에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이단과 세속주의가 잠입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부활이 없다는 사상이었다.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몇 가지 유의할 것이 있다.

1) 부활 교리의 대적들에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 중에,

(1) 허위설이 있다. 일명 도적설이다. 이 사상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허위로 예수의 부활을 꾸며냈다고 하는 사상이다. 예수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가서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주님이 부활했다고 선전하는 교묘한 속임수를 행했다는 것이다(켈수스 Celsus).

그러나 ⸁ 예수의 무덤은 로마의 군대들에 의하여 엄히 경비가 되었고 ⸂ 그 때 예수 십자가 사형 사건으로 제자들은 뿔뿔히 도망치고 말았을 때다. 과연 저들이 이런 수단을 쓸 수 있는 용기가 있었겠는가?

(2) 기절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예수께서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기절한 것으로 오인 한데서 유래되었다. 이 학설은 예수 부활 뿐 아니라, 예수 십자가 대속의 죽음까지도 흔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 예수는 확실히 죽었다. 그 증거로 빌라도의 군대가 와서 예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것으로 그의 죽음이 확실히 확인되었다.

⸂ 그 결과 아리마데 사람인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그 시체 장례를 허락한 것이다.

(3) 환상설이다. 이 설에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주관적 환상설로 흥분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귀환만을 골똘이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그 누가 말하기를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신경과민에 흥분성 기질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옮겨졌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꽃처럼 번져 갔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일종의 착각설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객관적 환상설인데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계속해서 전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기적적으로, 순간적으로 예수를 보이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 무슨 환상이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고, 여러 곳, 여러 사람에게 같은 착각이 연발할 수 있을까?

⸂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사람으로 보내어 33년간 우리와 함께 하게 하셨는데, 왜 순간적인 환상으로 제자들을 흥분시킬 필요가 있었겠는가?

(4) 신화설이 있다.

예수 부활설은 저 바벨론 신화 및 기타 근동 국가들의 여러 신화 속에서 도입된 부활의 개념들을 가지고, 부활 전설을 꾸민 신화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신화'가 아니고 [역사]가 아닌가? 바로 B.C와 A.D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신화'란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5) 기타

⸁ 강령설 - 예수는 강령술자로서, 예수의 영혼에서 나오는 일종의 초인적 능력에 의하여 유령 세계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심령과학자들의 주장이다.

⸂ 사체의 미분자설 - 이것은 사람의 육체가 죽으면, 신체의 미분자들이 해산되어 새로운 부활체로 구성되기 어렵다는 학설이다.

⸃ 이상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예수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적 부활 형태로서, 예수의 숭고한 이상이 사람들에게 되살아 나는 것이라고 하는 사상이다.

초대교회 안에서도 복음의 진리에 관하여 여러 류의 이단들이 들어왔었다. 결코 이러한 부활 이단설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2) 헛된 사상의 대적들

(1) 무신론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칼 마르크스는 하나님이 없다고 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했다. 야스퍼스는 죽임 당한 하나님을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인간을 올려 놓았다고 했다. 성경은 이 무신론자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곧 [제일 원리를 부인하는 자]란 뜻으로 존재의 근원을 부인하는 자를 가리킨다.

인공 위성 시대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달나라에 갔다는 소련의 우주비행사가, 귀환해서 한 첫마디 말이 우리가 높은 하늘에 올라갔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높은 데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불행스럽게 그는 제 2의 우주비행을 연습하다가 공중에서 떨어져 죽어 버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2) 유물론이 있다. 돈이 인생의 가치 척도라고 하는 배금주의 사상이다. 그러나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다.

우리들에게 놀라운 일은 유물론적 공산주의 제국이 70년만에 역사의 한 가운데서 무너진 것을 본 일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3) 자연신론이 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4) 진화론이 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인하고 무수한 적자생존의 진화 과정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에 와서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피조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한 것이다.

(5) 불가지론이 있다. 이 사상은 인간들의 한계 상황 밖의 일은 언급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무한에의 영생성이 있다.

(6) 우상숭배론이 있다. 물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사상이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섬기는 신을 만들고, 그를 섬긴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는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들은 망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악한 사상들이 부활의 복음을 대치하는 시대이다. 결코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야 한다.

(7) 기타

죽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있다.

⸁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tist) - '기독교 학술파'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들은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역술을 주장한다. 이들은 죽음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참 이상하다. 실제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理想)이 아닌가?

⸂ 도피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실재성을 인식한다. 그 반면 죽음에 대해서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예 죽음 그 자체를 논하지 말라고 한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 같은 자는 '죽음이란 말을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다.

⸃ 숙명론자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당연성을 주장한다. 누구나 한 번은 다같이 죽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 없이 그 앞에서 용감하게 행동할 뿐이라고 한다. 팔자소관이라고 하는 사상이다.

⸄ 오만한 무종교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일종의 초인주의자들이다. 저들은 죽음을 저주하고, 도전하며, 반항한다. "예잇! 더러운 죽음! " 이것이 속임수가 아닌가. 니체 같은 자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

⸅ 염세 비관주의자들이 있다. 저들은 생을 저주하고, 삶에 실증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을 죽음에 던져 버리려고 한다. 자살에 이르는 길이 행복하다고 한다.

⸆ 감정주의자들이 있다.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인생의 허무 앞에 울고 있는 자들이다.

⸇ 유니테리안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이란 자연의 법칙의 결과'라고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인생의 죽음이란 것은 자연 현상이니, 인생은 마땅히 그것을 소망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 과학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과 함께 모든 육체는 흙 속에서 분해되고 용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 광신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누군가 자기의 목숨을 끊어주기를 열망하고 있는 자들이다.

⑩ 펠라기안파와 쏘시니안파가 있다. 이들은 창조될 때부터 인생은 죽음을 면할 수 없도록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영생하도록 창조했다.

죽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바로 부활 사상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 된다.

3) 현세 지상주의자들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쾌락주의자들이다. 이 죄는 죽기까지 사함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사22:12-14).

4) 종말론적 적그리스도 운동

(1) 큰 붉은 용(계12 : )

(2)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계13:1-10) - 무신론 권력

(3) 땅에서 올라온 짐승(계13:11-15) - 거짓 선지자, 종교 일치주의

(4) 짐승의 표 666(계13:16-18) - 불신앙의 표, 다수주의

(5) 바벨론(계16: - 20: ) - 무신론적, 다신론적인 짐승의 활동 무대, 역사의 현장.

* 합세하여 부활 신앙 교리를 대적한다. 부활 신앙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2.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 되라(15:58)

1) 신앙(요6:29)

(1) 절대 계시에 대한 절대신앙

(2) 바른 교리에 착념(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2) 행위

(1) 바른 교회 생활

(2) 세계 선교 운동(복음 전파)

3. 그 이유 :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15:15)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 부활 교리의 중요성

1. 성경 예언의 성취 - 성경의 참됨

2.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롬1:4)

3.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성취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열납이요, 공적 선언이다.

4.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속죄 사역의 효력을 발생하심이다. 속죄 사역은 죽음으로 끝남이 아니고, 생명으로 끝나야 한다.

5.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상 교회 설립의 초석이 된다.

6. 사람이 죽은 다음에 부활한다고 하는 진리는 영생의 사실성을 입증한다.

7.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으로서 교회가 받은 복음 선교의 주제이다.

8.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도 그가 교회의 머리와 우주적 왕으로서 높은 보좌에 앉으심의 보증이 된다.

9. 지상 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산 소망의 활력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인류의 숙적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살아도 더 잘 살기를 원하고 더 잘 사는 것을 영원화 하기 원한다. 그것은 영생의 욕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는 것을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다 한다. 사는 문제를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준비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죽는 문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아예 죽음은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사는 것이 나의 문제라면 죽는 것도 나의 문제이다. 이유는 인생이 출생하고 산다는 그 날, 그 시간부터, 그 인생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기독론자 볼테르(Voltaire)는 죽음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다. 나는 지옥에 가노라'고 절망했다.

기독 신자를 많이 죽인 불란서 왕 찰스 9세는 죽음을 맞는 최후 순간에 하는 말이 '나는 망하였구나! 분명히 망하였구나!'라고 했다.

토마스 스카트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이 때까지 나는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이 둘이 다 있는 줄 안다. 나는 멸망에 들어간다'고 하며 절망을 절규했다. 죽음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자들의 최후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부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 앞에서 개가를 불렀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다.(딤후4:7-8)

세계적인 전도자 무디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고 했다.

요한 안드레는 말하기를 '불수레가 왔으니 나는 올라가야 하겠다'고 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살라. 그러면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면서 죽었다.

요한 타이드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죽음인가? 사는 것보다 좋구나! 내가 예수 안에서 기쁘게 죽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해 다오'라고 했다.

루터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의 하나님께로서 구원이 오도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피한다. 주님이여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고 했다.

요한 번연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 나는 우리 주 예수에게로 가노라. 하나님께서 그의 복스러운 아들의 중보로 말미암아 나를 영접하시되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모일 곳으로 영접하시리니 그리고 거기서 영원토록 머물리라'고 했다.

이것이 죽음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인의 최후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