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중세敎會史

종교개혁 사상가 1

好學 2011. 12. 17. 05:33

종교개혁 사상가 1

 

4명의 주요 종교개혁 사상가 와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차            례
I. 종교개혁 신앙과 사상의 부활
II. 마틴 루터
III. 존 칼빈
IV. 토마스 뮌쩌
V. 존 웨슬리
VI.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I. 종교개혁 신앙과 사상의 부활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운동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사상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중세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본래적 모습을 찾기 위해 '원천적 자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켜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연구가 활발해지고 히브리어 문학, 희랍어 문학, 라틴어 문학을 다시 읽기 위해 고전적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문주의 운동이 어거스틴의 저서 출판을 1528 9년에 이룩하게 했고, 루터는 어거스틴의 저서들 특히 {영과 문자}를 읽으면서 새로운 신학적 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스위스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는 인문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는 비엔나와 바젤의 인문주의 대학교에서 일찍이 공부하였고, 에라스무스를 1516년 바젤에서 만났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바젤에서 프로벤 출판사를 통하여 그의 신약 희랍어 성서를 인쇄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아이디어와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가 쯔빙글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종교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문제라는 것, 종교의 중요한 강조점을 윤리적 거듭남과 개혁에 두는 것, 개인뿐 아니라 사회까지 거듭나게 하고 개혁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의 기본적 상관성은 속죄주라기보다 도덕적 모범에 있다는 것, 어거스틴보다 제롬과 오리겐이 더 훌륭한 교부들이라는 것, 교회의 교리보다는 교회의 삶과 실천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교육적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것 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인문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 의지냐, 노예 의지냐' 라는 논쟁으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완전히 나뉘어지게 되었다. 1524년에 쓰여진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해 루터가 1525년의 {노예 의지론}으로 도전함으로써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등장

 


     종교개혁은 민족주의의 등장과 깊은 관련 속에서 발전하였다. 민족주의는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약화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세속 정부가 서서히 힘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은 독일 민족주의의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다. 루터는 독일 귀족과 제후와 동맹하여, 선제후 프레데릭의 정치적 도움을 얻었다. 보름스 국회에서 종교재판을 받은 루터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막강한 정치적 힘을 지닌 선제후 삭소니의 프레데릭 4세의 도움으로 바르트버그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체로 상당히 발전하게 되어, 독일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체제인 로마교황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전

 
     종교개혁 전야에 나타난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발명(1454년)은 종교개혁 사상을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메인쯔에 이 금속활자가 소개되어, 1456년 라틴어 성경책을 인쇄하였다. 1457년에는 '메인쯔 시편'을 인쇄하였는데, 첫 페이지에 출판사 이름과 위치, 출판 날짜가 명시되어 있었다. 인쇄술 덕분에 종교개혁의 선전 내용이 빨리 값싸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는 사람, 책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텐베르그나 제네바에서 나오는 획기적인 새 아이디어들을 배울 수 있었다.
    

종교 개혁가들의 설교들이 인쇄된 형태로 나타났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영국 상류층들은 이미 1575 1600년경에 루터 사상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한자 동맹의 길을 통해 케임브리지에도 책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루터가 그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루터는 학문적으로 토론하기 위해 95개조의 항의문을 학문적인 언어인 라틴어로 독일 민중들을 선동하려면 쉬운 독일어로 썼을 텐데 썼다. 그런데 자신이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르게 삽시간에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종교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후기 중세의 교회 상황은 교회의 행정적, 도덕적, 법적 개혁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교황이 세속 일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세속 권세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다. 그리고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황에게만 주어진다는 교황의 절대무오설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게 되었다. 교황은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을 많이 임명하여 값비싼 예복과 부담금을 부과함으로써 치부하였다. 이렇게 물량화한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 증축 공사를 하고도 남는 돈이 있음에도 가난한 교인들의 피를 짜내어 성당 증축 공사를 하는 데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중세 교회는 선행 의인화 사상에 의해 많은 선행  성지 순례, 금식, 고행, 독신생활 등  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는 성자들의 유품을 모으고 귀를 모으는 것, 성녀의 젖꼭지를 모으는 것, 성자와 성녀의 뼈를 갈아 물에 타서 마심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착각과 미신에 빠지기도 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선행 추구는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 설교가들이 면죄부 헌금함에 동전을 넣는 순간,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부모들의 영혼들과 조부모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미신을 설교하였다.
    

또한 죄사함의 만족을 얻기 위해 신부로부터 보속행위를 명령받고 보속행위를 다 치른 뒤에도 죄사함 받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연옥에서의 천년간의 형벌을 면하려고 면죄부를 샀던 것이다. 중세 수도원의 포도주와 농산물 수입으로 성직자들이 너무 부요하여 영성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물량화되어가고 이웃의 가난과 고통에 무관심한 것은 중세 암흑기의 타락상과도 아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