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비트겐슈타인 신학

好學 2011. 12. 12. 21:37

비트겐슈타인 신학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와 삶의 형식


 

원래 신앙주의(fideism)는 신앙의 자율성이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신앙의 합리적 근거를 찾기보다는 독자적인 방법에 의애 신앙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터툴리아누스(Tertulianus)의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absurdum)"는 말에 잘 나타나 있는데, 신을 믿는데 합리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을 일종의 신앙주의로 해석하게 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언어의 과학적 혹은 역사적 해석을 거부하고 종교적 삶의 형식에 참여한 종교적 언어게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이 신앙의 자율성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대표적 철학자로 맬컴(N.Malcolm)을 들수 있는데, 가령 안셀름(Anselm)의 존재론적 증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개념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그 논증의 논리적 형식만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념이 형성된 인간적 "삶의 형식"을 보아야 하며, 이것은 종교적 삶의 형식에 참여하여 밖에 서가 아니라 안에서 그것을 조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과 그 함축을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라고 부르고 닐슨(Kai Neilso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1.언어의 형식은 삶의 형식이다.

2.삶의 형식은 주어진 그 무엇이다.

3.일상언어는 있는 그대로 정당하다.

4.철학자의 임무는 언어나 삶의 형식을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활용과 관련된 철학적 혼란을 제거하는 데 필요하도록 그리고 그러한 맥락으로 기술하는 데 있다.

5.각기 다른 삶의 형식인 담화의 다양한 양상은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6.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삶의 형식을 비판할 수 없다. 담화의 양상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니는데, 자신의 규준이 있고 또 제각기 명료성, 실재성, 합리성의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7.명료성, 실재성, 합리성과 같이 일반적이고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은 조직적으로 모호한 데가 있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일정한 삶의 방식의 맥락에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8.철학자(혹은 누구라도)가 담화의, 혹은 같은 이야기지만 삶의 방식의 모든 양상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는 알키메데스의 점이란 있을 수 없으니, 담화의 양식은 제각기 합리성과 비합리성, 명료성과 모호성, 실재성과 비실재성의 특정한 자기 규준이 있기 때문이다.45)

 

닐슨은 이어,"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는 종교가 나름대로의 특유한 규준을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아주 오래된 삶의 형식이라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그러나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 쟁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닐슨이 이해한 바대로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가 옳다면 모든 언어게임은 상대적 성격을 띄게 되고 따라서 종교적 언어게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신개념도 객관적인 의미를 확보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언어게임"과 특히 그 근거가 되는 "삶의 형식" 이라는 개념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언어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언어게임의 마당인 삶의 형식과 연결해 봄으로써 완결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언어게임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삶의 형식의 한 부분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게임은 인간의 행위이므로 그 게임의 장소는 바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한 뜻으로 그는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46)

그러나 이러한 서술만 가지고는 삶의 형식이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가 없다. 더구나 삶은 복잡하고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분적으로만 기술할 수 있을뿐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가능하지도 않다. 따라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주어진 것, 말하자면 그것이 삶의 형식들"이라고 그는 말한다.47)

그러나 삶의 형식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없으면 언어게임은 항상 모호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이 게임의 맥락에서만 구체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단어나 문장도 동시에 그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질 수 없다.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삶의 형식을 어떤 곳에서는 하나로 표현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여러 개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형식들에는 여러 개가 있고 하나의 언어적 표현에는 하나의 삶의 형식이 반영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합쳐진 전체로서의 삶의 형식, 즉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삶의 형식도 있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할 수 있을까? 언어의 활용을 터득한 사람만 그렇다.

다시 말해서 희망이라는 현상은 이 복잡한 삶의 형식의 양상들이다.48)

여기서 그는 인간이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형식은 인간의 삶을 다른 존재의 삶과 구분하고 또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 삶의 형식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삶의 형식"이란 표현도 맥락에 따라 여러가지의 뜻으로 쓰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크게 "원초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고 이명현(이명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언어작용 가능성의 전제조건과 관련하여 제기된 삶의 형식에서 문제되는 특성을 원초적 특성(측면)이라고 본다. 그리고 문화적 측면은 특정언어를 해석하기 위한 준거틀로 동원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 원초적 특면의 삶의 형식의 일치는 언어일반의 작동 가능성의 근본전제인데 반해, 문화적 측면의 삶의 형식은 인간의 개별언어들을 해석하는 준거틀이다.49)

그는 이어, "삶의 형식은 이처럼 작동가능성의 근본 전제로서 언어와 관계맺지만, 개별언어의 해석의 준거틀로서도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삶의 다양성이 근거하는 형식도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종교적 언어게임과 신개념의 의미에 연관시켰을 때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우선 종교적 언어 일반의 작동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종교적'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측면의 형식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현상이 '희망'이라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고 사자와 같은 동물과 그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는 원초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삶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측면에서의 이 구분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그래서 다양한 문화현상을 빚어내는 측면에서 더욱 뚜렷해지는 구분이다. 가령 종교 현상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문화적 측면 중에 하나이지만, 어떤 사회에서 종교현상이 어떠한 식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그 측면이 다양해지고 동시에 다양한 삶의 형식들이 나타나며 언어게임도 그 종류가 무수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형식은 칸트의 '본체(noumenon)' 처럼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원초적으로 하나가 있을 뿐이지 문화적으로만 다양하게 나타날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트겐슈 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이 삶의 형식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해석되어야 하고 그 형식 안에서 자율성을 누리는 명료성, 실재성, 합리성의 규준도 너무 과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단 하나인 원초적 측면의 삶의 형식에서만 통용될 뿐이지 선험적 형식을 거친 칸트의 현상들(phenomena) 처럼 표출된 문화적 측면에서의 여러 형식들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그 규준들이 조종되고 또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의 여지가 확보될 뿐만 아니라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도 의미가 있고, 좀 더 나은 신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제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닐슨의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종교적 담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참여자의 이해를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트겐슈타인주의자와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든지 논의되고 있는 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믿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또한 종교의 일차적 담화가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 그리하여 철학은 종교들이나 삶의 형식들과 관련하여 비판을 가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다.50)

이 비판이 종교가 인간의 본성을 표출하는 문화현상으로 이해되고 삶의 형식이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낸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언어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혹은 선험적 측면으로 이해되었을 때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삶의 형식이 그 일차적 담화를 비정합적이고 비합리적 이라고 주장하는 언어게임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는 철학이 종교 현상 그 자체를 비판할 도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이란 개념이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해서 다양한 언어게임에 등장하였을 때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가령 다음 문장들을 살펴 보자.

1. 신은 존재한다.

2. 신은 초월적이다.

3. 신은 인격적이다.

4. 신은 삼위일체이다.

5. 신은 그리스도이다.

6. 신은 부활한다.

7. 신은 1993년 10월 22일에 부활한다.

여기서 우리는 1로부터 7로 갈수록 신에 관한 기술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가고, 따라서 그것이 통용되는 언어게임의 범위가 좁아지며 그러한 범위를 규정하는 삶의 형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1)에서 신개념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 혹은 안셀름의 표현처럼 '더이상 위대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막연히 규정했을 때 그 명제를 부정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기술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떠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 그 자체와 구별되어 초월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면 우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로 형성된 문화권에서는 이 신개념이 언어게임에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부터 (6)까지는 모든 기독교신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명제들이며 따라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 삶의 형식에 의해서 규정되고 또 거기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에 오면 이 신개념이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갑자기 그 기능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휴거'를 주장하는, 더구나 바로 그 날자를 고집하는 사교집단의 한 성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1)부터 (6)까지에 담겨있는 신개념을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부터 (7)로 올수록 비합리적이라든가 초합리적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 있으며 여전히 합리적이라면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철학적 분석이 의미를 지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닐슨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호소력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신이야기는 유령이야기만큼 비정합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고 신의 실재에 관해 납득될만한 개념이 있고 또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이야기가 담겨 있는 삶의 형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 있으나 상당히 명료하게 유령이야기에 제기되었던 부정적 질의응답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51) 이와같이 좀 더 납득할만한 신개념이 있을 수 있는지 혹은 좀더 합리적인 종교가 무엇인지의 문제를 철학은 유의미하게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와 '삶의 형식'이라는 표현을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개념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적 언어게임의 합리성이나 정합성 혹은 명료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그것은 물론 다른 삶의 형식과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종교적 삶의 형식이 비록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원초적 형식의 표현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형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끝으로 이러한 점들을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종교언어가 과학언어나 윤리언어, 그밖에 어떤 언어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뒤에 서로 만나자'...는 표현은 '나는 너를 무척 좋아한다'는 표현과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다른 그 어떤 표현들과도 동일하지 않다. 그 표현은 그 표현이 말하는 것을 말할 뿐이다. 어째서 그 표현을 다른 표현들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인가.52)

그러나 여기서 그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좋아한다'는 표현 속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은 후에 다시 만나자'라는 표현에는 '나는 너를 무척 좋아한다'는 우정이나 애정이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이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나의 생물학적 죽음에 관한 기술도 담고 있으며, 무엇 보다도 그 죽음이 내 존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종교적 단언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를 역사적 측면에서만 기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역사적 의미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언어게임, 그중에서 기독교적 언어게임에서 그의 모습이 가장 잘 부각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언어게임에서 그의 존재 혹은 '예수'라는 고유명사가 아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예수가 약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아직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사망했다는 자연적 현상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적 언어게임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히크(J.Hick)는 다음과 같이 주 장한다.
똑같은 인식론적 유형, 말하자면 사건들을 특유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연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이해하려는 유형이 신약에 관통해 있다. 여기서도 역시 나사렛의 예수라는 한 사나이와 그 사람에 얽힌 사건에 관한 이야기에 애매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를 정치판에 연루되어서 예루살렘의 성직자들과 충돌하고 결국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자칭 선지자였을 뿐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필자들처럼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신의 메시아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를 이렇게 보는 것은 신앙을 혹은 신약의 기록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특수한 방식"으로 경험함(experiencing as)"을 나누는 것이다.53)

이와같이 인간이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을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배타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과학언어와 종교언어 혹은 윤리언어와 예술언어 같은 것도 어느 맥락에서 좀더 부각되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일 뿐이지 그것이 유일한 방식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종교언어는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 없고 비록 종교적 언어게임 안에서도 다른 언어와 간접적으로나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게임은 궁극적으로 언어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의미의 "삶의 형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은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며 다양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교언어도 종교언어 이외의 언어로부터 자양분을 얻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이 언어게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신개념도 종교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나 가치의 실재와 연결되어 있을 때 더욱 설득력 있는 개념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언어가 오로지 사실적 언어로 혹은 그밖에 비종교적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은 종교언어의 완전한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뜻으로 존스톤의 다음 주장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적 주장을 반증하고자 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논변을 펴는데, 논증의 규칙은 어느 특정한 언어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거기서 논증을 구성할 때에만 비로소 위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상이한 언어게임은 상이한 개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문자 그대로 의사소통의 길이 막힌다. 이와같이 종교적 주장의 의미는 종교적 개념으로만 명시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평가하면 얻는 것이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게임이 상충될 때(그리하여 다른 관행의 문제일 때) 순전히 개념적 차원에서 이것들을 조정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54)

그러나 이것이 곧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 실재와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종교적 언어게임이 이루어지려면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규칙이 준수됨으로써 신개념도 의미를 지니게 되지만 신개념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 신의 실재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존스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해 준다.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비록 언어게임이 실재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관성이나 정합성의 규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처럼 보통 게임의 규칙들은 '임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규칙들'이 일관되지 않으면 어떤 게임도 규정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하나의 게임이 있다면 숨겨진 모순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일관성이나 정당성에 대해 강한 개념을 도입하고자 하면 실재와의 관련을 통해 언어게임을 정당화하려는 허상으로 퇴행하게 된다.55)

이와같이 신개념이 종교적 언어에임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정상적으로 기능을 해야 하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 게임의 참여자들이 그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신의 실재가 합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루마나(R.Rumana)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종교는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믿기 위해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일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요점을 벗어나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종교적 언어를 검토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주관적 상태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종교언어는 태도, 감정, 신념 등을 나타낸다.56) 그러나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혹은 윤리적이든 예술적이든 언어게임은 그 준거틀인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하고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있으므로 순전히 주관적 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신개념이 통용되는 종교적 언어게임의 합리성과 명료성과 실재성이 전적으로 자율적 규준 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문제에 대한 분석철학적 접근을 비트겐슈타인의 신개념 분석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 보았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적 접근이 분석철학적 방법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더구나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라일(G.Ryle)의 일상언어에 관한 '논리적 분석'의 방법도 있고 오스틴(J.L.Austin)의 실험적 접근방법도 있다. 이러한 방법들도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의 방법과 보완관계를 이루며 이문제에 접근하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우리는 분석철학의 중심인물인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통해서 전후기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해서 그의 종교관과 신개념을 추적해 보았다. 그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하여 전기에서는 러셀 및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견해와 차이점을 살펴 보았으며, 후기에서는 이른바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의 입장을 통해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검토해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도달한 결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분석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신의 본성을 인식하는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보다는 신의 개념을 분석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석의 방법은 언어관에 따라 다양하고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얻은 결론도 서로 상이한 점이 많다.

둘째,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언어관을 바꾸고 새로운 의미이론을 내놓아 전후기에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지만 신개념에 관한 한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러셀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세째, 그러한 차이점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과 같은 불가지론자도 아니고 에이어와 같은 무신론자도 아니며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자들과 같이 종교적 상대주의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분석을 검토하여 몇가지 특징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신'이라는 개념이 그의 존재적 사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신이 존재한다'는 문장은 객관적 사실만을 서술하고자 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종교적 단체의 한성원으로 자기자신을 확인한다는 뜻이고 그러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겠다는 결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거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며, 어떤 종류의 선과 미와 진과 성을 추구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살 것인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태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속에는 분명히 어느 특정한 신개념이 들어있으므로 어떠한 신개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적인가 초자연적인가, 내재적인가 초월적인가, 인격적인가 원리적인가, 서구적인가 동양적인가, 종교적인가 미신적인가 등에 따라 신개념이 달라지고 또 거기에 따라 삶의 형식이 세분화되며 점점 더 이질적인 언어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문화인류학적 혹은 역사적, 사회적 및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인데, 어느 종교적 언어게임이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인지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개념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서 얻어낸 성과가 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성종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어느 특정한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느 특정한 신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종교가 요구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아무런 신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느 기성종교에 귀의하기에는 너무도 종교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Fred A.Westphal, The Activity of Philosophy(N.J.Englewoood:Prentice-Hall, Inc.,1969),p.47.

2.Ibid.

3.A.J.Ayer, "Does Philosophy Analogue Common-Sense?",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supplementary Vol. for 1938 xvi권, p.173.

4.L.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E.M.Anscombe (Oxford:Basil Blackwell,1978), ss 12e.

5.L.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D.F.Pears and

B.F.McGuiness(London:Routledge & Kegan Paul Ltd.,1961), 4.024.

6.Ibid. 2.223.

7.Ibid. 6.54.

8.Ibid. 6.432.

9.Donald Hudson, Ludwig Wittgenstein: The Bearing of his Philosophy upon Religious Belief(London:Lutterworth Press,1968), p.27.

10.Ibid. p.33.

11.Ibid.

12.Tractatus(op. cit.), 6.522.

13.B.Russell, "Introduction", Tractatus, p.xxi.

14.B.Russell, My Philosophical Development(London:George Allan and Unwin,

1959), p.126.

15.B.Russell, "Knowledge by Acqua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 Mysticism and Logic(London:Penguine Books, 1953),pp 212-214.

그는 "[웨이벌리]의 저자는 스코트이다"라는 문장에서 "[웨이벌리]의 저자"라는 구절은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문장에서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 이유로 '둥근 사각형'이나 '현재의 불란서 왕'도 그러한 식으로 분석한다.

16.A.J.Ayer, Language, Truth and Logic(London:Gollanez co.,1946), p.9.

17.Hudson, Wittgenstein(op. cit.), p.22. 그러나 그는 Wittgenstein의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경험론이 함축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18.Ibid.

19.Otto Neurath, "Socialogy and Phisicallism", Logical Positivism, ed.by A.J.Ayer(N.Y.:The Free Press,1959), p.284.

20.Justus Hartnack, Wittgenstein and Modern Philosophy, trans.M.Cranston (N.Y.:Doubleday & co.Inc.,1965), p.54 그는 "Wittgenstein으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론을 그렇게 용이하게 유지할 수가 없으며, 논리실증주의 자들도 그러한 이론은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할 충분한 이유를 가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21.George 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N.J.:Prentice-Hall,Inc., 1964), p.328. 이것은 원래 Russell이 Wittgenstein이 사망하였을 때 그를 회고하여 기고한 글에 담겼던 내용이다. "Ludwig Wittgenstein", Mind, LX, No.239 (July,1951) 298 참조.

22.N.Malcolm, Wittgenstein:A Memoir(London:Oxford University Press,1962), p.72.

23.Ibid. p.71.

24.Pitcher, Philosophy of Wittgenstein(op. cit.) p.326.

25.L.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N.Y.:Harper & Row,1965), p.28.

26.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op. cit.), 7.

27.Ibid. 65,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유사성을 특징 짓는 표현으로 '가족유사성'보다 더 좋은 표현을 생각할 수 없다. 식구들간의 여러가지 유사성, 즉 체격, 용모, 눈의 색깔, 걸음걸이, 기질 등은 같은 식으로 서로 겹치며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들은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67.

28.Ibid. 23.

29.Ibid. 1.

30.Fergus Kerr, Theology after Wittgenstein(Oxford:Basil Blackwell,1986), p.40.

31.Ibid. p.42.

32.황필호는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적 신앙형태주의"라고 번역하면서 비트겐슈타인적 특징 세가지를 열거한다. 그러나 그 특징은 '비트겐슈타인적'이라는 말에 담겨있고 그가 '형태(form)'라고 번역한 요소도 역시 여기에 표현된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여기서 '형태'는 '형식'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분석철학과 종교](서울:종로서적,1984) pp.211-213 참조.

33.Investigations 373.

34.Wittgenstein Lectures, Cambridge 1932-35, ed.Alice Ambrose(Totowa,N.J.: Rowman and Littlefield, 1980), p.32.

35.Wittgenstein, The Blue and Brown Books(op. cit.), p.28.

36.Wittgenstein, ed. C.Barrett, Lectures on Religious Belief(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972), p.60.

37.Ibid. p.50.

38.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 on Aesthetics, Psychology and Religious Belief, C.Barrett ed.(L.A.: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pp.53-54.

39.Paul Johnston, Wittgenstein and Moral Philosophy(London and N.Y.: Routledge,1989), pp.9-10.

40.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op. cit.), p.55.

41.Ibid. p.56.

42.J.Wisdom, "Gods" in Classical and Contemporary Readings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ed. J.Hick(N.J.:Prentice-Hall,1970), p.442.

43.Hudson, Wittgenstein(op. cit.) p.59.

44.Wittgenstein, Investigations 241.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진위를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진위는 바로 인간이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일치를 보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이것은 의견에 잇어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너무 엄격한 뜻으로 이해하면 안될 것이다. 이명현은 그 구분에 대해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는데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삶의 형식에 있어서 일치한다면, 판단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이런 논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판단은 삶의 형식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은 삶의 형식의 한 양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삶의 형식의 두가지 국면",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편 (서울:서광사, 1984), p.238 참조.

45.Kai Neilson, "Wittgensteinian Fideism", ed. S.M.Cahn and D.Shatz, Contemporary Philosophy of Religion(N.Y.:Oxford University Press,1982), pp.238-239. 이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로 그는 P.Wintch, G.E.Hughes, P.Geach, S.Cavell, J.M.Cameron, R.Cobwin, W.Hudson 등을 든다. 이 주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황필호의 "비트겐슈타인적 신앙형태주의", [분석철학과 종교](앞의 책), pp.209-226 참조.

46.Wittgenstein, Investigations(op. cit.), 19.

47.Ibid. p.226.

48.Ibid. p.174.

49.이명현, "언어의 규칙과 섦의 형식",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한국분석 철학회편(서울, 철학과 현실사,1991), p.132.

50.Nielson, "Wittgenstein Fideism"(op.cit.), p.239.

51.Ibid. p.254.

52.Wittgenstein, Lectures and Conversation(op. cit.), pp.70-71.

53.J.Hick, Philosophy of Religion(N.J.Prentice-Hall,1973), p.74.

54.Johnston, Wittgenstein and Moral Philosophy(op. cit.), p.10. 그는 언어게임과 실재와의 관계를 함부로 연관지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삶의 형식에서 어떤 언어게임의 근거를 찾는 한 종교적 언어게임과 사실적 언어게임 사이의 존재론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관성'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접근방식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보수적이라는 지적이 언어게임 자체가 본질적으로 혼란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나오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학적 비판은 바로 그점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혼란된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을 내세운다고 해서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한다.

"언어게임 그 자체를 고려할 때 혼란을 말할 근거가 없다. 개념들은 언어게임들 안에서만 규정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은 언어게임 그 자체에 개념적 혼란을 귀속시킬 독립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혼란된 언어게 임이라는 개념 속에 전제가 되는 것은 어법에 대한 독립적 평가의 가능성인데, 그러나 이것은 어법이 어떤 의미로 실재와 관련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고...이러한 생각은 별의미가 없다." p.10 참조.

55.Ibid. p.221 ft.

56.Richard Rumana, "Wittgenstein:The Language of Religion", Ludwig Wittgenstein:A Symposium on the Centennial of His Birth, ed. by

S.Teghrarian, A.Serafini and E.M.Cook(N.H.:Longwood Academic,1990),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