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조상학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25. 21:23

 

순교자 조상학 목사 (장로교)

 

조상학(趙尙學) 목사 (1877-1950)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출생으로 일제에 투옥되고 공산당에 순교당한 장로교 목사이다. 조상학목사는 1877년에 전남 승주군 송광면에서 양반집 조형섭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생활정도도 풍요롭고 행세하는 양반의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별 어려움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한문을 수학하면서 유교적 인생수업을 훈육받아 아직 젊기는 했지만 당시로 보아서 또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은 나이였다. 또 타고난 세도집 가문에서 고고하게 전통적 선비로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에 젖어들거나 수용할 만한 데라고 바늘끝 꽂을 만큼도 없는 인품에 꼿꼿한 이 젊은이에게 당시 감히 누가 "예수"소리를 할 수 없었고 또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따로 있지 그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믿음의 저력과 끈질진 한 사람, 붙잡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전도인이요 조사였던 지원근이 있었다.

이지 조사와 함께 물러설 줄 모르는 한 사람 서양인 선교사로 오웬(Owen,Clement Carrington)이 있었다. 오웬은 물론 하나님의 뜻하신 바이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사람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전도에 관록이 있었다. 벨 선교사와 함께 개척한 교회를 보면, 목포의 양동교회를 비롯, 송정리교회,해남군 선두리교회, 보성군 신천리교회,육곡교회,양동교회,운림리교회,양주 양림교회,완도군 관산리교회, 나주군 내산교회,방산리교회,장흥군 진목리교회,고흥군 옥하리교회,화순군 화순읍교회, 광양군 광양읍교회 그 밖에도 15개처 교회를 세운바 있는 이런 사람이다.

 조상학이 아무리 고집센 젊은 선비라고도 해도 오웬이나 지원근 같은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한 오웬은 1898년 11월에 한국선교사로 내한한 이래 벨9Eugene,Bell:배우지)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를 시작하는 한편 목포진료소를 개설했고 의사이기도 한 그는 광주선교부를 시작하여 순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 및 복음선교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으로 그 때만 해도 그 신기하기만 한 그 서양 의학의 기술이었다. 이런 헤택을 주는 이 선교사가 비록 이국적인 외인이기는 하지만 무척이나 유식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조상학은 그래도, 이쯤은 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양반 유학도의 입장에서 예수를 받아들일 만한 취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학력과 인격에 끈질긴 전도에 드디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광주에서 학습을 받고 2년 후엔 1909년 벨(Bell Eugen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이제는 성령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깊이 있는 성경을 배우면서 연구하는 중에 그토록 힘들여 복음을 받아들인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나도 전도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때 이천만 동포를 다 전도할 만한 부푼 마음과 성령의 인도로 뜨거워진 마음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자기가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였던 것은 두분의 전도자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끝낸 인내와 성실로 그 전도를 자신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덕이 아닐 수가 없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그는 개인적으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 이같은 결과가 열매를 맺어 여천군 율촌면 장천리의 조의한이 예수를 믿던 날로부터 또 그런 열성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동네에다가 장천리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또 다시 조의환과 함께 또 힘을 합해 한태원에 전도하자 그도 예수를 받아들여 광양군 신황리에 신황교회를 세웠다. 조상학의 전도열심은 더욱 그 열기를 더해 이번에는 보성지방의 최초의 교회인 무만동교회도 정태인과 김일현 그에게 전도받아 세운 교회였다. 이 중에 정태인은 목사가 되어 순천 삼미교회를 설립하고

 

1917년 평양장로교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아 보성군 벌교지방 목사로 무만교회를 비롯 낙안 평촌교회, 고흥읍교회 등을 순회 인도하다가 순천읍교회, 무만교회를 두루 시무하면서 제주노회로 옮겨 모슬포교회,삼양교회,월막교회, 고산교회를 시무하면서 목회에 큰 공을 세운바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순천읍교회도 조의환과 함께 전도하여 최집사님과 최정의가 믿고 세운 교회로서 이와 같이 조상학은 전도받은 자가 일대에 머문 자가 하나도 없이 전도받아 믿으면 더 많은 전도를 하는 사람들이 되곤 하였다. 이 와 같은 업적은 그로 하여금 1911년에는 광주의 숭일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학원전도를 쉬지 않았다. 1916년에 순회전도사로 부름을 받아 각 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중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하여 1923년에 제16회로 졸업을 하고 바로 그 해 순천노회가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하면서 최초의 목사로 안수를 받아 광양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또 순천노회의 최초의 총대가 되어 제12회 총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율촌교회,

 

1940년에는 경남하동읍교회, 1946년에는 여천 덕양교회에 시무하였다. 조목사는 1940년 순천노회 청년 조직 단체인 원탁회 사건으로 여러 목사 장로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는 순천중앙교회에서 청년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고 항거할 것을 뜻하고 애국적 신앙사수의 목적으로 힘으로 모아 조직적으로 반대할 것을 결의한 조직체였는데, 황두연 장로를 비롯하여 목사로는 조상학, 양용근,김정복, 김상두,오석주,김형제,나덕환, 선재련,김순배,김형모등과 장로로는 박창귀,선춘근,김원식 장로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에는 조 목사는 청력이 약해 취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자 그대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때 벌써 연세가 70고개에 달한 노구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중에 이 민족에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그 굴욕적이고도 치욕스러운 결박에서 해방이 되는 날은 왔다. 그러나 북한 땅은 공산정권으로 인하여 수난을 겪었지만 이제 우리 세상인가 하는 날들은 꿈결같이 사라지고 민족적 사상이 좌우로 갈려 편할 날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에 6.25가 터졌다. 남단 이곳에도 공산침략의 태풍이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제직들의 강한 권유로 피신을 종용했으나 강권을 뿌리친 채 막무가내로 교회를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대신 희생할 테니 나의 시체는 저 산에다가 묻어주시오" 굳은 결의로 주의 피에 참례하는 성찬을 베풀고 난 그후 얼마 안되어 여수 내무서에서 보낸 3명의 서원에게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예수 전하는 일을 인지 않았다. 70일을 감방생활을 하고 그 해 9월 28일 10리 밖에 이는 미평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이 날 함께 동역하던 손양원 목사의 뒤를 따라 그 날 같은 곳에서 손 목사의 순교를 보면서 그 뒤를 따라 살해되니 73세를 일기로 순교의 영광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