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정치호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25. 21:22

 

순교자 정치호 목사 (장로교)

 

정치호 목사(1917-1950)


정치호는 1917년 6월 30일 평안북도 철사군 여한면 서봉동에서 정대흥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이 일직 타계하고 부친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보천성 청원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깨인분이라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민족학교에입학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신학문에 눈뜨게 되었다. 험난한 생활전선에서도 그들 형제는 신앙만은 철저하여 그의 나이 19세에 무순교회 집사가 될 정도로 열심히 교회봉사를 했다.

 

봉천천 성경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땅끝 선교에 대한 사명감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성경학교 졸업반 때 22세에 본계호교회에서 목회하든 중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내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십계명에서 금한 우상숭배는 못한다"라고 거부함으로 '부정선인'으로 본계호교회 목양실에서 체포되어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어 9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루고 출옥했으나 일경의 압제로 강단에 못서게 하여 만주로 돌아갔다.

일경은 교역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1. 장로를 회유해서 교역자를 강단에 못 서도록하고

2. 장로가 거절하면 장로의 사업체나 사상을 꼬투리 잡아 탄압

3. 주먹잡이들을 투입시켜 교인이 되게 한후 린치를 가해 스스로 도망가게 했다.

 

정전도사는 일경의 악랄한 제재 수단에 밀려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고 문순의 부친에게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이름없는 성도로 교회를 섬겼다. 교역자가 총회참석으로 자리를 비울때 강단을 지켜달라고 부탁해서 주일 설교를 했는데 그것도 못하게 일경이 와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렸다.(당신은 대 일본 제국의 중죄인이야.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하며 방해를 했다. 4년의 생활은 그에게 생지옥같은 생활이었다.

1945년 해방 후 그곳 탑련교회의 부름으로 고국에 귀국하지도 못하고 무순 탑련교회 전도사로 부임 섬기면서 1947년까지 봉천신학교 4학기를 마치고

 1948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와 이태원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총회신학교에 편입해서 2회로 졸업했다. 이태원교회를 시무하던 정전도사는

1948년 12월 통일을 염원으로 남북교회(현 미암교회)를 개척하고

1950년 3월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봄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고 3개월 후 6.25동란이 일어나 나이많은 교우들과 교회를 사수하던 그는 기독교도연맹 가입거부로 내무서원들에 의해 연행되 북으로 끌려가고 돌아오지 못했다.

 

 정목사의 유족으로는 아들 정준철과 사모 승병도 권사가 서울 은평구 증산동 166-20에 살며 서영교회를 출석한다. 장녀 정숙희 집사는 평강교회를 차녀 정숙명 집사는 대전에서 살며 대전성서침례교회에 출석하면서 경건한 신앙인들로 주어진 일터에서 충성을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