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주채원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26. 20:56

 

순교자 주채원 목사 (장로교)

 

주채원 목사(1904-1950)


주채원은 1904년 9월 2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추면 서호리에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주영섭의 2남으로 태어났다.태어나자 얼마 안되어 비밀리에 만주를 비밀리에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부친은 친일파의 밀고로 헌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끝에 세상을 떳다.

 

부인도 남편의 죽음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주채원은 형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5세에 그의 동리에 온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라는 말에 주채원은 정신없이 예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씨가 예수를 믿으면 주씨를 버려야 한다. 양반 주씨가 상놈 주씨로 전락하려느냐? 고래로 야소는 무부무군의 사도로서 한번 빠지면 부모조차 몰라보게 된다더라 하면서 핍박하는 어른들의 꾸중을 들으며 당시 사회주의 이념에 물든 집안이 양반같지가 않아 벌떼같이 일어나 구박을 하는데도 오로지 새벽제단에 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이사야43:1-3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위로에 용기를 얻어 더 열심히 예수를 믿고 캐나다 선교부에서 세운 함흥의 영생학교를 다니면서 지도자 자질향상에 노력했다.

 

1926년 22세 되던해 교회주선으로 결혼을 하고 평양에 가서 노동을 하며 11년만에 1937년 32회로 졸업을 하고 함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함흥중앙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신사참배가 총회에서 결의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더 귀하게 여기고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고 수난당하고 순교당하는 손양원 박경구 주기철 박관준 이영한 등 수 많은 교회지도자들을 보고 또한 창씨 개명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주목사는 차리리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다고 반발을 했다.

 

1940년 우리교회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창씨 개명을 권고하는 담임목사에게 "살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살기위해 부모도 버린다면 그건 죽은 목숨아닙니까. 차라리 저는 옥에 갇히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하며 거부했다. 주채원 목사는 내선일체를 반대하는 비국민이라는 죄목으로 일경에 체포당하고 목사이기 때문에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하여 함흥중앙교회로 돌아가 섬길 때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주씨문중과 공산당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위협을 피하여 월남해서 행화정교회를 부흥시키며 새로 교회를 신축했다. 월남하여 공산당 치하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6.25동란을 겪어야 했다. 피난을 권유하는 마포구 국회의원 기사돈 장로에게 "목사가 양떼를 두고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포탄이 퍼붓듯 할때도 행화정 교회를 지키며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8월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칠때 정치보위부에서 나온이가 "갑시다 조사할 게 있습니다"하고 손에 수갑을 채워 체포해 끌고 간 후로 소식이 끊겼다. 그의 후예로는 LA에서 사역하는 주요한 목사와 신광교회에서 충성하는 주요셉장로 뎀바에 거주하며 교회봉사하는 셋째아들을 비롯해 딸은 권사, 사위는 장로 3남 3녀 모두가 그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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