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장규명 목사 (장로교)

好學 2011. 9. 15. 21:49

 

 

순교자 장규명 목사 (장로교)

 

장규명 목사(1891-1950)


장규명 목사는 1891년 5월 11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농사꾼의 3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규명은 15세가 되기 전 사서감경을 줄줄 읽을 정도였고 미문이어서 후에 총회장이 되어서도 총회내에서 알아주는 문필가였다는 것이 보필하던 목사들의 변이다.

 

 농사꾼인 그의 부친은 " 대의명분에 사는 아들이 되라는" 지조높은 뜻을 그의 인생의 등뼈로 삼았다. 한문공부를 끝낸 그는 양시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신학문과 함께 기독교에 귀의했다. 국가 잃은 시름에 암울한 시대를 당시 인테리 젊은 층 중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삶의 피안을 삼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미국인 목사가 부흥회를 승동교회에서 개최했을 땐 빈자리가 없었고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열창할 때에는 얼마나 뛰면서 발을 굴렀던지 마룻장이 내려 앉을 정도였다. 예수쟁이가 되 그는 26세에 결혼을 하고 1924년 33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17회)

 

192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받고 선천중앙교회에 부임 기나긴 목회의 외길로 줄다름첬다. 평소 키가 크고 멋쟁이 기질을 타고 났던 장목사는 이내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1930년대 들어서고 부터는 신사참배문제에 봉착해 본격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1931년 제20회총회장에 당선된 그는 총회를 위해 큰 일을 했으나 1938년 제 27회 총회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결정되자 그는 소리처 "아니오"를 연발해 주기철 김석창 장규명 최봉석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는 등 6회나 옥고를 치루었다.매일 장목사 사택에 일경을 상주시키고 감시감독하는 등 1945년 8월 18일을 기해 기독교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려 각본을 짯지만 3일전인 1945년 8.15일 해방됨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선천중앙교회로 돌아가 목회에 임해 마음놓고 목회할 줄 알고 마음도 부풀었으나 해방 후 기독교도연맹가입거부, 1947년 11월 3일 주일선거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이북5도 연합회 임원들이 모두 체포되던날 함께 보성학교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3개월만에 풀려났다.

당시 그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살고 싶은가? 죽고싶지 않으면 당정에 협조하라"고 회유할 때 가슴을 드리대며 쏘아보라고 함으로 인민군은 섬짓해하며 총을 꽂았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3개월만에 풀려났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월남하기 위해 기차를 타다가 발을 헛딛어 발가락 3개를 짤려 하나님이 북녁땅에 머물러 성전을 지키게 하시는 체험을 했다.

 

1948년 10월 정치보위부는 간첩혐의로 날조하여 그는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반동 종교인과 지식인을 숙청할 때 수감중인 장목사도 순교의 면류관을 썼으니 그의 나이 6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