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WEC의 창설자 찰스 스터드(Charles T. Studd)

好學 2011. 12. 17. 05:45

WEC의 창설자 찰스 스터드(Charles T. Studd)

 

 

19세기말 영국에서 최고의 명문인 사립학교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한 한 명석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가 극히 부유한 집 장남으로서 삼형제가 모두 영국의 최고학부를 나왔습니다. 게다가 그는 당시 영국의 국기(國技)라고 할 수 있는 크리켓 국가대표 주장선수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그에게는 장차 영국의 지도적인 정치가로서 장래가 환히 열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대학을 졸업한 23세에 느닷없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세상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오지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됩니다(그와 그의 케임브리지 동료 7인의 이같은 선교에의 헌신을 선교 역사에서는 Cambridge Seve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10년, 인도에서 6년, 그리고 나머지 여생은 중부 아프리카 오지에서 69세로 소천하기까지 선교지의 외로운 교회를 지키면서 선교사로서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그의 헌신의 모범을 통해 하나의 범 세계적인 선교 단체가 태동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복음화십자군(WEC: 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입니다.

오늘날 WEC은 50개국에 약 900여명의 사역자를 파송한 거대한 선교 단체로 성장했는데, 이같은 성장의 기초에는 한 전도 유망한 부자 청년이 주님의 명령을 좇아 자기의 전 재산을 포기하고 온전히 헌신한 자기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참조 마 19:21). 그 청년의 이름은 찰스 T. 스터드(Charles T. Studd, 1862-1931)였습니다.

그는 이튼과 케임브리지를 나온 다른 선배나 동기생들의 전례를 좇아 영국의 국회의원이 되고 지도적인 정치가를 추구하는 삶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세상적인 성공의 길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의 길을 추구했으며, 당시 그 누구도 가려 하지 않았던 전염병이 들끓는 제3세계의 오지만을 찾아다니면서 개척선교사로서 온갖 고난과 질병을 겪으면서, 세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자기 인생의 모든 재능과 기회를 그야말로 사장(死藏)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에 그의 부친이 무디 목사의 영국 전도집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의 손꼽히는 대 농장주였던 그의 부친은 주님을 영접한 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 주야로 뛰어 다니면서 전도에 힘쓰다가 2년만에 과로와 다리 혈관파열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2년간의 전도를 통해 영국 상류층에 지대한 전도 효과가 맺어졌으며, 그의 복음주의적 신앙은 세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세 아들 중 둘이 오지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찰스는 자신이 어릴 때 부친을 통해 발견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시킨 위대한 선교 단체의 토대를 놓았습니다. 그는 중국선교사 시절인 25세에 자신이 받은 2만9천 파운드의 유산 전부를 선교단체에 골고루 기증했으며,1)   그 자신은 평생 하나님의 공급만을 바라보며 사는 Faith Mission(믿음선교)의 험난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정신은 오늘날 WEC의 기본적인 사역 및 운영 방침이 되었습니다.2)

또한 우리는 그의 부인의 헌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부인은 그가 중국 오지에서 사역할 때 만난 아일랜드 출신의 처녀 선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결혼하여 네 딸을 얻게 되는데, 딸들은 전부 선교사와 결혼하여 후에 부친의 사역의 충실한 조력자가 됩니다. 그가 중부 아프리카 오지의 교회를 지키며 사역할 때 부인은 심한 심장병으로 같이 가지 못하고 영국에 남아 있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후 20년 동안 남편을 만나지 못한채로 나름의 사역을 개척했습니다.

그녀는 하루 17시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병석을 떠나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여 세계선교를 위한 수백명의 자원자를 모집했으며, 그녀의 사위들과 협력하여 남편이 만든 아프리카오지선교회(Heart of Africa Mission; HAM)를 세계복음화십자군(WEC)으로 확대시켰고, 그로부터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스터드는 아프리카에서 편지를 통해 선교회의 이념과 방향을 지시할 수 있었지만, 실제 선교회 창설의 숨은 주역은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이같이 해서 태동한 WEC은 세계적인 초교파 선교단체로 성장했습니다. 부인은 스터드가 죽기 2년 전에야 비행기로 아프리카에 날아와 보름을 같이 지낸 후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이 20년 동안 부부가 함께 한 유일한 기간이었습니다. WEC의 창설 배후에는 스터드 부부의 이같은 말못할 헌신과 희생이 있었던 것입니다.3)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단지 한 세대를 이 세상에 살면서 일하다가 갈 수밖에 없는 "단 세대적인 존재"(one generational being)입니다(운 좋게 요한 웨슬리처럼 약 두 세대를 정력적으로 일하다 간 사람도 있으나, 이는 예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 한 세대의 짧은 생애를 제3세계 백성들의 영혼구원이라는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온전히 투자했고, 영속적인 신령한 열매를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한 세대의 삶에서 과연 무슨 열매를 맺어야 할지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

1. 스터드는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에 5천파운드, 런던의 기독교 구제사업가 홀랜드에게 5천 파운드, 인도구세군 대장인 부스 터커에게 5천 파운드(인도 선교사 50명을 새로이 파송했다), 무디에게 5천 파운드(무디는 이를 무디성경학교를 건립하는데 사용했다), 고아 사업가 죠지 뮬러에게 5천파운드 및 기타 잔액을 여러 곳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그는 완전한 무일푼으로 중국 오지선교사의 길을 걸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가 약관 25세였다.

2. WEC은 기본적으로 사역자들에게 일정한 봉급을 주지 않는다. 오직 선교 사역을 위해 들어온 각종 헌금을 모든 사역자들이 매달 공평하게 나누어 쓴다. 이같이 하는데도 한번도 재정 파탄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선교회는 단 한번도 빚을 져본 적이 없다고 하며, 스터드가 소천하기까지 선교회에 들어온 헌금은 146,746파운드 1실링 3펜스에 달했다. 이는 처음 스터드가 주님께 드린 재산의 거의 5배나 되는 거액이다.

3. 스터드는 죽기 직전에 일생을 회상하면서 자신에게 즐거웠던 일 몇 가지를 열거했는데, 그것은   첫째 하나님이 대학을 갓 졸업한 그를 중국으로 부르셨을 때 많은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갔던 일,   둘째 그리스도께서 부자청년에게 명하셨던 것을 기쁘게 행한 일,  세째  1910년 아프리카의 수단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비복음화된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묵상하고 이 사역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자기 여생을 던져버린 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돌아볼 때, 그의 유일한 기쁨은 "하나님이 내게 할 일을 주셨을 때 거부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했다. 이를 볼 때, 그는 당시 세계의 가장 힘든 땅이었던 중국, 아프리카, 인도의 오지만 찾아다닌 극히 도전적인 개척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