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

好學 2011. 8. 20. 22:03

카르타고의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은 A.D. 2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고 라틴어를 사용한 교회의 지도자로 유명하다. 그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어거스틴은 서방 기독교의 교리적 기틀을 확립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키프리안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한다.

 

키프리안을 흔히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키프리안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르타고라는 지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카르타고는 비록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도시지만 로마와는 매우 근접해 있는 도시이다. 현재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속한 지역인데, 이곳은 아주 오래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할 즈음,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국가이다. 대략 5백년 가량 서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해상무역을 통해 크게 번영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이며,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는 인신공양이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 타니트와 남신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고, 지금도 돌비석이나 모자이크 등에 어린아이를 바친 흔적이 남아있다.

 

지중해의 해상권을 놓고 그리스인과 3세기에 걸쳐 충돌하였으나, 일찍이 로마와는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고, 유명한 한니발 장군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패배하여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된다. 이후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어 로마제정시대에는 크게 번성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의 유물들이다.

 

카르타고는 로마시대 수사학, 법률학 등 학문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3세기에는 기독교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5세기에 반달인에게 점령당하고, 7세기 말에는 아랍인에게 파괴되어 완전히 쇠퇴하였다. 현재는 고대 카르타고인의 묘지와 카르타고 항구의 유적 및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공중목욕탕 등이 남아 있어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카르타고 사람들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모두 로마공화정 말기에 전멸당했다. 모두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 검투사로 죽거나 여자는 몸종이 되어 혼혈을 거쳐 인종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 키프리안이 태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을 때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헬라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교도이기는 했으나 존경받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당시 최고의 로마교육을 받을 수 있어, 수사학과 법률을 공부했다. 그리고 훌륭한 웅변가로서, 또 교사로서 그는 카르타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키프리안이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A.D.246년경, 그러니까 키프리안이 46세쯤 되었을 때, 평소 육신의 일락과 명예를 통해 삶의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당시 카르타고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었던 장로 캐실리아누스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의 글에 의하면, 사회의 타락한 권력과 부, 그리고 부패한 사법권을 바라보면서 어려움에 빠졌으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후, 인생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개종한 그는 곧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으며, 놀랍게도 세례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249년 초 도나투스감독을 이어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다.

 

그때 노바투스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5명의 장로 집단은 키프리안의 감독 임명을 반대하였는고, 이로 인해 키프리안은 감독직 수락을 주저하게 되나, 회중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감독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일단 선출된 후에는, 오랜 동안의 평화로 다소 침체의 기미를 보였던 카르타고 교회에서 목회의 직무에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교회를 부흥시킨다.

 

키프리안이 감독직에 오른 바른 그 이듬해인 250년, 로마황제 데시우스는 로마의 옛 문화를 재생시킨다는 미명하에 기독교에 대한 범제국적이고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들에게는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또 이를 준행하였음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소지하라는 요구가 주어졌다.

 

황제 데시우스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에게 명하여 황제에게 희생제를 드리라고 명을 내렸다. 충성을 맹세하라는 의도였다. 이것은 당시 그만큼 로마제국이 불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군사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황제의 영을 시행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지위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압류당하고, 감금되거나 심지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혼란 속에 빠졌다. 카르타고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위협을 당하기도 전에 즉각 뜻을 굽히고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때 키프리안은 환난 기간 중에 지하로 숨어 편지로 목회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이듬해 데시우스 황제가 고트족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이 박해는 끝이 났다. 하지만 교회로 돌아온 키프리안 앞에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져 있었다. 박해기간동안 교회를 떠난 배교자들에 대한 처리문제였다. 배교자들의 문제에 있어 키프리안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키프리안도 비록 배교는 하지 않았지만, 겁쟁이처럼 도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당시 순교한 로마교회의 감독과 그를 비교하여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그를 로마교회에 고발했다. 로마교회 지도자들 역시 키프리안에게 글을 써서 비난했으며, 교회가 혼란스러웠다.

 

키프리안이 질서를 회복하는데는 굉장한 진통이 따랐다. 키프리안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피신해 있는 동안 발생했던 문제들과 남은 생을 싸우면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던 252년 역병이 카르타고에 몰아쳤다. 이 역병은 전 로마제국을 15년 동안 휩쓸었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데시우스황제의 아들도 이 역병으로 인해 죽고 말았다. 이때 키프리안은 교회를 동원해 카르타고의 역병 희생자들을 도움으로써 상당한 칭찬을 받게 되고, 그후 몇 년간 키프리안은 유능한 행정가와 성실한 목회자로서 인정받게 된다.

 

255년 다시금 키프리안은 다른 문제를 맞이했습니다. 이단자들이 주재한 세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른 것인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로마감독 스테판과 논쟁을 벌였다. 스테판은 이단자들의 세례도 타당하다고 했다. 그리스도 또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합법적으로 행했다면 그 세례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회개도 없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이단자들의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밝힌다.

 

참으로 겸손했던 키프리안은 글을 꼭 써야만 할 때를 제외하고는 명성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개의 결정적인 기독교 교리의 근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은 이단에서 받은 세례의 무효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쟁이 한창일 때, 257년 8월 새로운 핍박이 일어났다. 바로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의 핍박이었다. 이 핍박으로 인해 교리논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왜냐하면 스테판과 그의 후계자가 순교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핍박에서 키프리안은 담대하게 자신의 양떼들과 함께 맞섰다. 그러자 그는 쿠루비스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일 년 후 258년 그는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하여 참수형을 당한다. 키프리안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할 때나, 처형을 당할 때에도 평소 인격의 고매함을 그대로 보여 주었으며, 숭고한 신앙인답게 행동하였다.

 

258년 9월 14일 단두대 위에서 순교를 당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들었던 교인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도 키프리안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으로, 초대교회사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며 저술가였던, 키프리안은 이후 약 2세기 후에 어거스틴(354-430)이 등장하기 전까지 교회의 많은 존경과 명성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오랜 기간 누렸다. 키프리안은 어거스틴의 사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어거스틴 역시 그를 존경하였다.

 

터툴리안의 제자인 키프리안은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 교회의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감독이 주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사도들의 참된 후계자라고 생각했으며, 특히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기초로 해서 교회는 감독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키프리안의 교회관

 

1) 키프리안에 따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자는 타인이며,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든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키프리안의 견해는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의 신자들과 감독 사이의 관계가 어린아이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같기 때문에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교회와의 교제와 구원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감독에 대한 반역이 곧 감독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교회와 감독을 떠나 분리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는 “하나의 세례 이상 다른 세례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망상한다. 생명의 샘을 저버리고서라도 그들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물의 은혜를 약속한다. 그들은 거기서 씻음 받은 것이 아니라 더럽힘을 받는다. 그들의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증하게 된다. 그들의 신생은 하나님을 위한 자녀로서가 아니라 마귀를 위한 자식으로 만든다. 거짓으로부터 출생했으니 진리의 약속을 받을 수 없으며, 불신으로부터 태어났으니 그들은 믿음의 은혜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가 감독으로 대표되는 일치를 주장하고 교회 이외의 생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장차 중세 가톨릭교회를 위한 준비 단계를 이미 키프리안의 교회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키프리안은 감독이 사도의 계승자이며, 교회가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하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은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자들로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충실하고도 세밀하게 전달했으며, 사도들도 역시 감독들을 자신들의 계승자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교회들을 위탁하셨다”고 주장한다.

 

키프리안은 이 사도적 계승의 관념을 ‘승계의 언약’의 의미로 이해했으며, 감독은 누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취임하게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그때로부터 해가 바뀌고 계승됨에 따라 감독들의 임명과 교회의 모든 의결은 이들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에게 있어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의 감독들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의 관리를 통해 감독들 위에 입각하여 발전해 나가는 구성체였다. 이러한 키프리안의 주장은 결국 감독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며, 동시에 회중들을 위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신적 권위를 가지는 지도자로 인식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