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옥한흠·하용조, 이동원 목사와 함께 '복음주의 4인방'… 홍정길 목사 인터뷰
"성경이 말한대로 살아보자" 교단 달랐지만 생각 비슷, 모두들 열정적으로 선교… 교단 정치에는 체질 안맞아
평신도와 토론하며 가르쳐 생활 속 '제자훈련' 강조, 목회자가 교인에 설교할 땐 자신을 향해서도 설교해야
"우리는 쉽게 살았어요. 손해 보는 일, 고생해야 하는 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으니까. 가질 게 없으니 다툴 일도 없었고, 서로 도울 일밖에 없었지."
20대에 만나 40년 넘게 계속된 네 사람의 인연이 한국교회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69) 목사와 지구촌교회 이동원(66) 원로목사, 작년 9월에 별세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와 2일 별세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이 네 사람을 세상은 한국 개신교의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소수의 목회자 중심이던 한국 교회에 평신도 제자훈련의 바람을 일으켰고, 열정적으로 선교했으며, 낮은 곳을 향한 구제사역의 비전을 공유했다. 많은 후배 목회자들이 이들을 따랐지만, 평생 교계 정치나 교단장 같은 직책은 멀리했다. 미국 일정을 접고 3일 오후 4시쯤 급거 귀국한 홍정길 목사를 하용조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온누리교회 서빙고 본당에서 만났다. 홍 목사는 하용조 목사에 대해 "내 가족보다 더 소중했던 사람이었다. 처음 소천(召天)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 ▲ 한국 개신교계의‘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리는 4인의 목사들. (왼쪽부터)고 옥한흠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고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이 중 옥한흠 목사는 작년 9월에, 하용조 목사는 지난 2일 별세했다. 이들은 평생 열정적 선교, 성경 말씀대로의 삶, 낮은 곳을 향한 구제사역의 비전을 공유했으며 교계 정치나 교단장 등의 교회 밖 직책은 멀리해 많은 한국 목회자들의 모범이 됐다.
―네 분 목사의 인연이 아주 깊다.
"1965년쯤, 대학생 선교단체 CCC 모임에 재수생 둘이 따라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하용조 목사였다. 나는 간사였다. 다음해에 두 사람이 대학에 들어오며 CCC에서 함께 활동했다. 68년에는 총신대에서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온 옥한흠 목사를 만났고, 69년에는 수원 집회에서 이동원 목사를 만났다. 내가 1975년에 처음 목회개척을 한 뒤 다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놀랍도록 생각이 비슷했다."
―어떻게 비슷했나.
"당시에는 한국 교회 어른들로부터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하는 소리 많이 들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거슬리는 게 많았을 거다. '식자우환'이라는데, 평신도 성경공부 가르쳐봐야 목사만 힘들다는데, 우리는 굳이 평신도를 일깨워 초대교회에서처럼 교회의 주체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제자훈련을 강조했다. 목사가 절대권위를 갖지 않는 대신 신자들과 토론하는 것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책을 목사만이 아닌 모든 교인의 손에 쥐게 하고 신자가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같았다."
―한국적 복음주의 운동(성경에 쓰인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운동)의 태동처럼 들린다.
"사실 옥 목사와 나는 예장 합동 교단, 이동원 목사는 침례교, 하용조 목사는 예장 통합 교단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한 대로 살아보자는 데는 뜻이 같았다. 다들 열정적으로 선교했다. 내가 개척한 남서울교회도 교회 재정의 63%까지 구제와 선교 등 교회 밖 일에 썼다."
맏형 옥 목사와 막내 하 목사는 8살 차이였다. 하지만 네 사람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형님" "동생" 하며 함께 복음주의의 가시밭길을 개척해갔다. 누군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앞다퉈 내 일인 듯 도왔다. 700여 선교사 가정을 해외로 파송한 사단법인 한국해외선교회(GMF)나 매년 2만5000여명의 한인 기독유학생이 모이는 대규모 해외 집회 '코스타' 등에도 이들의 힘이 컸다. 옥한흠 목사가 교회 일치운동을 벌이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만들면 함께 뛰었고, 홍정길 목사가 밀알학교와 장애인 고용 재활용가게 굿윌스토어를 세우면 또 모두가 힘을 보탰다. 오직 성경말씀만 전하는 '강해 설교'만으로 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명설교가'였던 것도 닮은꼴이다.
―왜 교단정치에 뜻이 없었나.
"우리는 모두 체질적으로 복잡한 교단 정치가 안 맞는다."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도 끝도 없는 얘기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복음 안에 온전한 사람을 만들면 온전한 행동도 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좋은 생각을 했으면 좋은 행동까지 나와야 좋은 사람인데, 좋은 생각을 하면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지금까지 한국복음주의 운동의 한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퇴 1년을 앞두고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가슴 아프다."
―금권선거와 타락, 물신숭배 등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비판도 계속 터져 나오고 있는데.
"목회자는 설교할 때, 교인뿐 아니라 목회자 자신을 향해서도 설교해야 한다.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 전에, 후배 목회자들이 나를 보며 무엇을 배울까 고민해야 한다. 우리 넷은 사실 쉽게 살았다. 손해 보는 일, 투자해야 하는 일,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으니까. 성경대로 했으니 그게 외려 쉬웠다. 그러나 한국 복음주의에는 아직 좋은 후배 목회자가 많다. 이제 새롭게 또 시작할 것이다."
☞홍정길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대표적 복음주의 운동 지도자 중 한 명.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나와 1975년 남서울교회를 개척해 20여년간 목회했다. 사임 후에는 장애인 사역으로 널리 알려진 남서울은혜교회를 1995년 새로 개척했다. 1990년 자폐 장애인 교육시설인 밀알학교를 설립했다.
☞제자훈련
평신도를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교회의 주체로 보고 그들을 일깨워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가르치는 과정.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가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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