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교회소식]본이 되는 교회

늘 ‘낮은 자’를 위해… 그는 영원한 ‘청년예수’였다

好學 2011. 8. 5. 22:03

 

늘 ‘낮은 자’를 위해… 그는 영원한 ‘청년예수’였다

 

 

 

 

故 하용조 목사를 그리며… 카피라이터 이만재 씨 특별기고

캐리커처 최남진 기자 namjin@donga.com

 

1990년 4월 28일 주일 아침을 잊지 못한다. 간밤의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가수이자 친구인 윤형주 장로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이라는 데를 처음 가본 곳이 서빙고동에 있는 온누리교회였다. 나이 마흔 중반을 넘긴 때였고, 온갖 세속적인 생존전략들로 중무장한 생활인이어서 그날 아침의 마지못한 교회 탐방 또한 8할은 삐딱한 눈에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것일 뿐이었다.

하용조 목사님을 처음 본 날이니 설교를 들은 것도 그날이 처음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이 내게는 개인적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난 날이었다. 몹쓸 교만으로 똘똘 뭉쳐진 자칭 아무개가 한순간에 알몸이 되면서 엉뚱하게도 ‘예수쟁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날부터의 개인적이고도 유치한 초보 신앙기록이 윤형주의 강권과 하 목사님의 지시 아래 조그만 책자로 묶였는데 그 책 이름이 ‘막 쪄낸 찐빵’이다.

윤 장로가 어떻게 기름을 발라 부풀렸는지 하 목사님은 나를 그럴싸한 ‘물건’으로 여기신 듯하다. 그 바쁜 가운데도 내 작업실이 있는 충무로까지 직접 나오시는가 하면, 교회 당회장실로 나를 자주 불러 두란노서원의 운영에 대해 생각을 묻기도 하셨다.

머리 조아리는 명망가들을 많이 거느린 대형교회 목회자일수록 그 처신까지 ‘대형화’되기 쉬울 법도 한데 하 목사님은 그 반대였다. 품성 자체가 소탈, 투명, 순수였고, 지향하는 목회의 기본 또한 늘 ‘낮은 자’였다. 갓 신자가 된 나 같은 사람과의 스스럼없는 교분이 그 좋은 증거이리라. 교회 재정의 3분의 1 이상을 ‘낮은 자’의 구제사업에 쓰는 일 또한 하 목사님이기에 가능하다는 걸 뒷날 느끼게 되었다.

이만재 카피라이터

어느 날 주일예배를 마치고 하 목사님이 찾는다 해서 갔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해 놓았으니 가자고 했다. 따라간 곳은 인근 상가의 3000원짜리 국숫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 앞에 선 하 목사님 왈, “아차, 돈이 없네. 이 선생님이 오늘 좀 내주시죠, 껄껄껄…” 했다. 그날 길가에 서서 소년 같은 함박웃음을 띠고 한 말씀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 하면요, 나 같은 엉터리한테 이런 훌륭한 교회를 맡기셨어요.”

가슴에 대고 훅 바람을 분다면 그 입 바람이 아무런 굴절 없이 그대로 가슴을 통과할 것처럼 맑은 분이 하용조 목사님이다.

하 목사님을 곁에서 관찰하는 동안, 인간적으로 경탄을 금치 못한 일이 있다. 일을 감당하는 초인적인 능력이다. 새벽 4시부터 시작되는 기본적인 설교 준비 외에도 원고 집필, ‘러브 소나타’ 등 해외선교 지휘 출장, 복잡다단한 회의 주관,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수많은 국내외 방문객 접견, 경배와 찬양 등 크고 작은 행사 준비, 총장과 이사장을 맡고 있는 각종 교육기관의 업무처리 등으로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가 없으셨다. 거기에 월간지 ‘빛과 소금’ ‘목회와 신학’ ‘생명의 삶’과 단행본 출판이 포함된 두란노서원 원장으로서의 사역 업무와 선교방송 업무가 에누리 없이 더해졌다.

1998년이던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교회 초청을 받고 목사님과 함께 참석한 일이 있다. 겹친 피로와 여독, 긴 투병생활로 육신은 그야말로 가누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는데도 강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목사님은 금세 열정의 불을 뿜는 33세의 기운찬 영혼 ‘청년 예수’였다.

지난해 말 두란노 30주년 기념식장에서는 그 청년의 미소로 내게 공로패를 주셨다. 내가 본 하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늘나라에 계셔도 내내 영원한 우리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