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혜경 봉사활동·사회참여 “정치 몰라요
… 그냥 애기들이 안 됐잖아요” |
가수 박혜경(37)씨는 지금은 수몰된 전북 진안군 신촌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20여 가구가 살던 촌락이었다. 10여년 전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마을은 강바닥이 됐다. 침수 전에는 산과 개울에 둘러싸여 있었다. 기와로 덮은 박씨의 집에는 대청마루가 있었고 마당이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박씨는 아침마다 새소리에 잠을 깨고 가족이 대청에서 밥을 먹었다. 하교하면 아궁이에 넣을 솔가리를 걷어왔다. 친구들과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러 다니기도 했다. 어린 박씨는 자주 지각했다. 등굣길 저수지 표면이 햇빛에 반짝이면 멈춰 서서 한참 구경했다. 길가 꽃에도 넋을 잃었다. 목소리 친척 할머니가 갖다 준 라디오로 가요를 접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었다. 진미령의 ‘하얀 민들레’, 노고지리의 ‘찻잔’이 좋았다. 1979년 가을부터 불려진 노래였다. 때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이별은 아쉬워도 순리라는 게 진미령의 곡이었다. 노고지리가 관조하는 찻잔은 연모의 대상을 뜻했다. 대여섯 살의 여자아이가 공감할 법한 가사는 아니었다. 음악은 듣는 것만으로 끌렸다. 그 무렵부터 누가 꿈을 물었다. 노래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가수라는 직업은 나중에 알았다.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자주 들었다. 학교 음악시간에 합창하면 교사들이 “누구 목소리냐”며 박씨를 찾았다. 교회에서 처음 독창했다. 마을 교회는 시골 아이에게 놀이터였다. 또래가 모였고 먹을 것을 줬다. 박씨를 무대에 세운 사람은 한국말이 서툴고 이국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그는 아이를 모아 성탄 전야제를 준비했다. 춤, 노래, 연극을 나눠 맡겼다. 남자는 노래를 가르치며 박씨를 칭찬했다. 행사 당일 박씨는 ‘울면 안돼’ 같은 캐럴을 불렀다고 한다. 몇 안되는 교인은 “잘한다”며 박수를 쳤다. 객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박씨가 열한 살 때 숨졌다. 아버지도 노래를 잘했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학창 시절 예체능에 소질이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주부였던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생계를 떠안았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걸었다. 새벽에 나가면 밤늦게 돌아왔다. 어머니가 이고 나가는 보따리는 컸다. 1남3녀는 같이 살던 할머니가 돌봤다. 박씨는 장녀였다. 중학생 때 가수가 되겠다고 상경했다. 어머니는 말렸다. 객지에서 여자애 혼자 어쩌겠다는 거냐고 했다. 고집은 안 꺾였다. 전학했고 서울 왕십리에서 주로 살았다. 친구나 친척집을 전전했다. 독서실에서도 먹고 잤다.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나르고 거리에서 전단을 돌려서 용돈을 벌었다. 건강식품도 팔았다. 종로의 식당에서는 노래하고 돈을 받았다.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가수만 생각했다. 가요제에 나갈 자격을 얻으려고 대학에 갔다. 가족들은 용담댐 착공 전 수도권으로 이주했다. 데뷔 95년 강변가요제에 나갔다. ‘흥보가 기가 막혀’로 뜬 남성 그룹 육각수가 금상을 받은 대회였다. 박씨는 명지대 실용음악과 학생이던 친구와 ‘이지(EASY)’라는 여성 그룹으로 출전했다. 참가곡 ‘기다림 약속 그리고…’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기념 음반에 9번째 곡으로 실렸다. 음악 선호도가 같은 사람을 찾다 베이스기타 주자 김영준(38)씨와 ‘더더’를 결성했다. 녹음한 곡을 들고 기획사를 찾아갔다. 당시 주가가 높던 엄정화 김원준이 소속된 곳이었다. 연락이 왔고 97년 첫 음반 ‘내게 다시’를 냈다. 방송에서 노래할 기회가 없었다. 섭외가 들어오기는커녕 출연 의사를 거절당했다. 더더의 음악은 대중적이지 않았고 외모는 시선을 끌지 못했다. ‘서세원의 토크박스’가 인기라는 말에 출연했다. 연예인이 입담을 겨루는 방송이었다. 웃겨서 주목받았다. 순위를 매겨 1등을 세 번 했다. 심야 라이브 무대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설 수 있었다. 많이 떨렸다고 한다. 박씨는 99년 솔로로 나왔다. 전환점 2004년 봄 파격 영상을 공개하고 일본으로 갔다. 여자 연예인이 성적 매력을 앞세울 때였다. 2008년 경희사이버대 NGO(비정부기구)학과에 입학했다. 2009년 가을에는 경락마사지업체를 차리고 사업가로 변신하는 듯했다. 지금은 손을 뗐다. 일각에서는 방황으로 봤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고 전환점을 찾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박씨는 봉사를 시작했다. 2009년 말부터 주 1회씩 했다. 남은 30대를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독거노인을 방문하고 결손가정 아이를 돌봤다. 봉사 뒷얘기를 트위터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동참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레몬트리 공작단’이 구성됐다. 세상을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레몬트리는 박씨가 2008년 리메이크(개작) 음반 ‘여자가 사랑할 때’에 실은 노래다. 박씨와 공작단은 매주 토요일 쌍용자동차 해직자 가족을 찾아간다. 무급 휴직 중이던 조합원의 돌연사가 계기였다. 그의 아내는 앞서 우울증을 앓다 자살했다. 박씨는 남겨진 중·고생 남매에게 후원자가 되고 싶었다. 수소문해서 만난 남매는 어른스러워서 더 안쓰러웠다고 박씨는 전했다. 소셜테이너 박씨는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석했다. 지지 발언 후 맨발로 노래한 것이 한동안 회자됐다. 무대가 없어서 현장에 있던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2개를 밟고 올라갔었다. 10여㎝의 검정 하이힐은 벗었다. 높은 신발만 신는 박씨가 맨발로 청중 앞에 서긴 처음이었다. 14일 낮 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만난 박씨는 지쳐 보였다. “죽겠어요. 남 돕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어. (무리했다고) 몸에서 신호를 줘요.” 목 왼쪽에는 붉은 반점들이 돋아 있었다. 박씨는 “(등록금 집회에 못 간) 10일엔 동생처럼 돌보는 학생이 자살하겠다고 해 설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박씨는 대학생을 ‘애기(아기)’라고 불렀다. “애기들이 안 됐잖아요. 등록금을 내가 내줄 수도 없고. 사실 딱 절반을 깎아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박씨는 “연예인의 사회 참여는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거 하면 좌판지 우판지 모르겠고 그냥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할 뿐”이라고 했다. 연예인의 집회 참여가 ‘노이즈 마케팅’(구설에 올라 이목을 끄는 홍보 전략)이라는 글을 봤나 보다. “저 이미 아줌마 아저씨도 다 아는 사람이에요. 시집갈 때 플러스(도움) 될 것 같으세요? 나처럼 시끄럽고 말 많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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