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 역삼동 자택 ‘모리아’ 가보니… 집안에 예배당을 들여놓다 |
지하 통로는 1층 창가에서 시작됐다. 폭이 좁고 어두웠다. 유리창을 관통한 빛이 산란하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하 묘지 카타콤이 연상됐다. 가수 심수봉(56)의 매니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적갈색 벽돌을 촘촘히 박아 만든 계단이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환한 원형 공간이 드러났다. 심수봉의 집은 서울 역삼동에 웅크리고 있었다. 역삼공원으로 올라가다 스치는 주택들 중 하나였다. 벽돌을 포개 올린 담이 길고 높았다. 집 앞에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이 교차했다. 철제 간판이 모퉁이 벽면 상단을 덮었다. 처마가 돌출돼 중절모를 얹은 듯했다. ‘MORIAH(모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검정 간판의 글자는 희고 가늘었다. 모리아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시험받은 곳으로 기록돼 있다. 번제 직전 하나님은 숫양을 줘서 이삭을 대신토록 했다.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했다)라고 불렀다. 심수봉의 모리아를 지난 5일 방문했다. 간판과 아래 유리창을 덮은 안내판에는 영어로 ‘영혼과 찬양을 위한 공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집 모서리 유리문이 열렸다. 지하 교회로 가는 관문이었다. 원형 교회 약 330㎡ 면적의 교회는 둥글었다. 간이 의자 50여개는 부채꼴 단상을 향해 차례로 반원을 그렸다. 단상에는 강대상, 마이크, 피아노, 드럼, 전자건반, 스피커들이 갖춰져 있었다. 벽돌로 도배한 벽은 상하좌우가 같은 십자가 형태로 뚫렸다. 입구에는 헌금함, 주보, 중고등부 출석부 등이 가지런했다.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 반대편이었다. “아유, 여긴 시원하네.” 심수봉이 부채를 들고 나타났다. -교회가 그리스 문자 오메가(Ω)를 닮았습니다. “그래요? 어떤 분은 로마시대 원형 극장 같대요. (복음성가 가수) 송정미 사모의 남편인 목사님은 다윗의 장막을 닮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짓고 보니 모양이 이렇게 나왔어요.” 벽면에 십자가 모양이 난 것도 우연이라고 했다. 집은 2005년 9월 착공됐다. 당시 심수봉은 지하를 공연장 겸 와인 저장고로 쓸 생각이었다. “제가 와인에 대해 공부하고 있을 때였어요. 직접 와인을 수입해서 팔면 소득도 생기지 않겠느냐. 그딴 생각을 했죠.” 땅값에 포함되지 않는 지하는 거저 얻는 공간이었다. 깊이 팔수록 남는 장사였다. 4m를 파기로 했다. 천장을 높게 만들 심산이었다. 굴착하자마자 물이 솟구쳤다. 1m쯤 팠을 때였다. 건축소장은 “물이 많이 솟는 지역이다. 땅을 팔 수 없다”고 했다. 심수봉은 기도하다 멋쩍어졌다. 술 창고로 쓰려고 지하를 파게 도와 달라는 셈이었다. 심수봉은 교회 집사였다. 와인 저장고로 쓸 생각을 버렸다. 집에서 나왔을 때 물은 멎어 있었다. 부서진 간판 공사는 2년 넘게 걸렸다. 곡절이 많았다. 돈이 많이 들었다. 초반에는 남편 월급을 받아 썼다. 돈은 들어오는 대로 나갔다. 남편은 월급 계좌를 바꿨다. 심수봉은 밤새 울었다. 얼마 후 5000만원이 입금됐다. 예정에 없던 돈이었다. “매니저도 몰랐어요. 어떤 일 때문에 지인이 넣은 거였는데 그렇게 갑자기 돈이 들어오기는 처음이었어요. 돈은 필요할 때마다 채워졌어요. 누가 공급자인지 배웠죠.” 집은 2007년 12월 8일 완공됐다. 지하 공연장은 이듬해 첫날부터 교회로 사용됐다. 늦깎이 신학생이 첫 6개월간 빌려 썼다. 다른 교회가 뒤이어 들어왔다. 공연장 위인 1층은 교인들을 먹이는 장소로 활용됐다. 심수봉이 레스토랑으로 쓰던 공간이었다. “처음엔 바깥에 교회 간판을 걸려고 하면 절대 못하게 했어요. 이미지 버린다는 이유였어요. 생각이 좁았죠.” 교회들은 어느 정도 성장한 뒤 다른 곳으로 정착해서 나갔다. 지금 들어서 있는 교회는 ‘하트 하우스(The Heart House)’다. 2009년 5월부터 주일 예배를 드렸다. 매주 100여명이 모인다. 심수봉은 장소만 내주고 간섭하지 않는다. 그는 논현동 강남중앙침례교회를 다닌다. “처음에 1층은 유기농 레스토랑인 ‘모리아 카페’로 썼었어요. 집 지을 때 물질이 많이 들어가서 한 군데 정도는 인컴(소득)이 창출돼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1.5t 트럭이 지나가다 간판을 부숴버렸어요.” 이후 1층은 교인 쉼터로만 쓰이고 있다. 이날 방문했을 때는 조명을 켜지 않아 어스레했다. 기타를 치는 두 남자의 윤곽이 어둡게 보였다. 하트 하우스 전도사들이었다. 심수봉의 매니저가 설명했다. 시편 109편 심수봉은 한때 불교 신자로 독실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이단에 빠졌었다. 교회가 다 그런 줄 알았다. 삶의 이유를 찾다 불경을 탐독했다. 그는 이복 언니에게 전도됐다. 언니는 “예수 믿으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다. 심수봉은 85년부터 교회에 나갔다. 시편을 읽다 기독교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109편이었어요. 다윗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이에요. 저 대신 하는 말 같았어요. 마음에 담아뒀던 응어리가 단숨에 풀린 거예요. 원수에 대한 마음을 치유해 준 구절이었죠.” 심수봉은 그때까지 결핍된 삶을 살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중심에 있었다. 심수봉이 세 살 때 부모는 헤어졌다. 오랫동안 심수봉은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살았다.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가슴에 뚫린 구멍 같았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아이를 보면 쫓아갔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많이 놀렸어요. 아빠 없는 애라고. ‘과부 딸, 과부 딸’ 그랬어요. 엄마가 찾아가서 뒤집어놨죠. 예민해서 공허감을 많이 느꼈어요. 그게 신앙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심수봉의 어머니 장형복(85)씨는 1951년 1·4후퇴 때 형제들과 월남했다. 충남 서산에서 민요 채집가 심재덕을 만나 55년 외동딸을 낳았다. 장씨는 26세, 심재덕은 환갑이 가까운 때였다. 장씨의 오빠는 아기를 보육원에 보내려고 했었다. 동생의 출산을 숨길 생각이었다. 장씨가 심수봉을 놓지 않았다. 예인의 피 서산의 심씨 집안은 예인 종가였다. 피리와 가야금 명인, 판소리 명창 등을 배출했다. 기질과 재능은 심수봉에게 물려졌을 것이다. 아기 땐 집 밖에 풍물놀이패가 뜨면 자다가도 소리를 좇아 고개를 돌리고 발가락을 까닥였다. 어려서는 매일 서산극장 앞을 서성댔다. 극장 주인이 가끔 들여보냈다. 귀가하면 어머니 앞에서 재연했다.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예민한 청각은 종종 심수봉을 쓰러뜨렸다. “열여섯 살 때 자꾸 뻗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들리는 소리를 몸이 견디지 못한 거였어요. 의사가 사람 소리도 안 들리는 곳에서 쉬라고 하더라고요. 87년쯤엔 폭언을 듣고 왼쪽 눈이 터지기도 했어요. 제 신경이 50만명 중 한 명일 정도로 약하대요. 요즘도 예민할 땐 귀마개를 하고 누워요.” 이야기는 국악에 대한 찬탄으로 넘어갔다. 국악에는 절묘한 미(美)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음은 물처럼 흐르고 박자는 자유자재로 쪼개진다. 악보로 옮길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심수봉은 말했다. 그는 다만 한(恨)의 감정을 걷어내길 제안한다. “‘한의 소리’는 억울하고 용서하지 못한 심정의 표현이에요. 사람을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침체시키는 소리죠. 원한을 품고선 생명의 소리가 될 수 없어요.” 심수봉은 간증할 만한 일이 생기면 공책에 적어둔다고 했다. 1년에 한 권씩 현재 다섯 권째 기록 중이다. 권당 두께를 물었다. “이 정도?” 그는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벌렸다. 2㎝쯤 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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