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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안 만나겠다던 뜻은…

好學 2011. 7. 23. 22:33

[ESSAY] 안 만나겠다던 뜻은…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장

아직도 북한에는 굶주린 동포가 살고 있고,
지난 10년간 햇볕 정책에도 불구하고
평양은 외투를 벗으려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북의 사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내 아버지는 실향민이시다.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이북에 다녀오시라 해도 굳이 마다시더니 그냥 돌아가셨다. 내겐 살아있다면 아흔 살이 되었을 사촌 형이 있다. 그리고 그쪽엔 알지 못하는 사촌 형제들이 여러 명 있을 것이다.

며칠 만나면 반갑겠지. 하지만 그네들 생계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다. 아니 돕겠다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문제다. 그 걱정이 앞서 그냥 안 만나겠다고 하시던 아버님 말씀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이북에서 넘어온 많은 식구를 이끌고 6·25 사변을 겪으신 어른의 솔직한 말씀이다.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의 얘기다. 이젠 쌀이 남아서 막걸리를 마셔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패션과 웰빙을 따져가며 마신다. 내 아버지 말씀을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남의 나라 얘기로 듣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11월 9일은 통독 2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 수백 명의 세계 작가들이 합성수지로 만든 벽을 1000개나 만든다. 그 벽들이 무너지는 공연이 있을 것이다. 한국 작가 세 사람이 만든 벽이 가장 중앙에 위치할 예정이다. 그 작품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왜?

마지막 분단국가를 '대접'하여 배정한 위치라고 들었다. 참 좋고도 씁쓸한 대접이다. 통독 후의 독일을 보는 심사가 괴로운 사람은 나뿐일까. 통독 20주년은 세계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 '코리안 페닌술러'(한반도)의 운명을 자꾸 생각나게 한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언제 통일이 될 것인가. 철없는 질문과 번듯한 질문이 자꾸 갈마든다. 통일이 되면 나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기 좋아지는가 나빠지는가. 우리 사회의 그늘에 햇볕이 들까. 아니면 그늘이 짙어지는 것인가. 이것저것 모르고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가. 도대체.

나는 두 번 평양에 다녀왔다. 처음은, 1995년 함경도 나진지역 개발과 더불어 북한 투자 검토를 위한 한 달간 여행이었다. 단고기도, 냉면도 먹어보았고, 새로 건설한 단군 묘역에도 갔었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도 보았다. 대우 남포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도 만났다. 정치적인 요인만 없다면 세계적인 텔레비전 공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5억달러 투자를 제안했다.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온 것이 사업 협상의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두 번째는 2003년 MBC 이미자 공연단과 같이 갔다. 정보통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북측 요청으로 나도 공연단에 끼어 주었다. 북한에서 보여준 것은 단풍이 곱게 든 백두산, 묘향산, 정방산 경치였다. 남포항의 갑문도 구경했지만 우리 집안의 선산이 있는 진남포 비석리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북한의 원자탄 실험 소식이 보도됐다.

요즘 들어 '동서독'과 '남북한'에 대한 생각이 자꾸 섞이고 엉킨다. 통독 후 세계적 반열에 오른 동독 작가들은 인류사회의 근원적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는 안젤름 키퍼의 무언의 오페라가 공연됐다.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시그마 폴케의 거대한 실크 스크린도 보았다. 쾰른 성당에서 제럴드 리히터의 현란한 색깔이 투영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았다. 아직도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세상을 거꾸로 그리고 있다. 왜 동독 출신 작가들이 요셉 보이스 이후 독일 미술계를 이끌어 가는가. 개념 미술은 진한 삶에서 나오기 때문일까?

다시 평양. 그때 소년궁에서 본 천재들은 그저 기계같이 정확하고 완벽하지만 비인간적으로 무미한 기술뿐이었다고 말한다면 내 선입견일까. 65년이나 찢어져 있는 분단국의 저쪽에는 지금 어떤 인간형의 누가 살고 있는가. 이제 이북 사촌들을 만나게 된다면 너무도 반갑겠지. 그 후에 몰려올 서먹서먹한 느낌을 어떻게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국의 보통사람들과 부대꼈던 경험이 많다. 같이 텔레비전을 만들었던 베트남 처녀들, 같이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를 생산하던 북아일랜드 종업원들, 같이 오디오 제품을 찍어냈던 멕시코 젊은이들…. 그들은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비슷한 인간적 고민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서로 같은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을 탈출한 이들 중에는 냉면집으로 성공을 해도 남쪽 생활에 문화적 동화가 어려운 사람이 있단 얘길 들었다. 심장까지 겹쳐지도록 보듬어 안는 통일은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옛 기무사 사령부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2013년 개관할 예정이다. 개관 전시로 마지막 분단국의 살풀이를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동독 출신 미술가와 음악가를 불러 전시회도 하고 음악회도 하고 공연도 하면 어떨까. '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이 기무사 자리에 모여 지난 65년간의 분단, 전쟁, 군사독재의 처절했던 우리 과거를 정리하고 화합, 평화, 자유, 번영을 소리쳐보면 어떨까. 백남준 선생이 다시 살아나 참여하겠다고 달려오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우리 미술의 세계화요, 우리의 고민의 예술화다. 틀림없이 세계는 이처럼 알몸으로 벗어젖힌 날것으로서 우리 예술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통독 20주년을 부러워하다 엉뚱하게 스친 생각이라도 좋다. 아직도 북한에는 굶주린 우리 동포가 살고 있고, 지난 10년간 햇볕 정책에도 불구하고 평양은 외투를 벗으려 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북의 사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