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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독일인이 연(鳶)을 사랑하면 안 됩니까?

好學 2011. 7. 23. 22:32

[ESSAY] 독일인이 연(鳶)을 사랑하면 안 됩니까?

 

 

 

군터 라인케 한국베링거인겔하임 사장

"살대 끝을 실로 다섯 번 감고 매듭을 지으세요." 가느다란 대나무 살을 쥐고 실을 감았다. 내 손이 너무 큰가? 연(鳶)을 만드는 장인의 손에는 착착 감겨 붙던 대나무가 내 손에서는 자꾸 겉돈다. 평생 낚시를 즐겨온 나 아닌가. 줄 다루는 솜씨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이게 뭐람. 꼼꼼하게 감았다 싶었는데 내 손놀림을 보는 노유상(서울시 무형문화재 4호·연만들기 장)옹은 웃음보를 터뜨린다. 아차, 실을 거꾸로 감았다.

독일에서도 연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어릴 때 만들던 독일 연은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한국은 바람이 세지 않다. 약한 바람 기운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였을까. 연이 말할 수 없이 정교하다. 과연 작은 연 속에 숨어 있는 한국인들의 과학이 새삼스럽기만 할 뿐이다.

연의 매력은 하늘을 날 때, 한국적인 색채, 선 그리고 세밀함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이 완성된다는 점이다. 푸른 눈의 이방인인 내가 한국적인 미(美)에 대해 이야기하면 의아해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그렇지만 연뿐만 아니라 노리개, 매듭같이 조화미가 돋보이는 한국 공예품의 매력은 아무리 모른 척하려 해도 나에게도 자꾸 느낌이 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쳤을 법한 오래된 미술품, 공예품은 세월의 더께가 얹혀져 그런지 그 깊이가 더욱 각별하다.

사실 나에게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는 별로다. 은은하고, 정적이면서도 그 안으로 강인한 기질을 갖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인 멋과 맛이 훨씬 사람을 당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그러한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자리를 잡은 지도 올해로 12년째이다. 그 새 쌓인 추억도 많고 인연도 많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느꼈던 생소함과 낯섦이라니… 다 어디로 갔나. 누가 그것을 지워버렸나.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한국적인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지난 세월 나는 다양한 만남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던 우연한 기회에 전통예술을 지켜가고 있는 장인들의 삶에 대해 듣게 됐고, 서울시와 유럽코리아재단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통해 무형문화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기회라는 것은 그처럼 찾아오는 것 같다. 덕분에 한국 전통문화를 조금 더 가까이 접하게 됐고 특히 노유상 선생님과 같은 장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특혜를 얻은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 개인적으로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너무 감사했다. 하지만 온전히 기쁘진 않다. 한국에서 전통문화 계승에 대한 관심이 현대 산업 발전에 대한 관심에 비해 너무 적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유럽에는 수백년씩 오래된 건물이 아직 많다. 낡고 이끼 낀 유물에 서린 역사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거듭 보수를 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그것은 역사요, 생활 유산이다. 그걸 지키려 안간힘이다. 그처럼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려는 노력 덕분에 유럽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 각 나라의 성격, 이미지, 특색을 선사할 수 있다.

독일도 같다. 지역을 개발할 때 문화유산 보전이 우선이다. 도시 경관은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공존한다. 그러나 서울은…? 안타깝게도 지난 12년 동안 옛 건물이 너무 많이 없어졌다. 젊은 세대들에게 과거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문화재 보존은 어느 정도 잘 이뤄지고 있으나 연, 매듭, 주조(鑄造), 소리와 같이 보이지 않는 전통기술이나 생활상들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장인들 중에는 그 기술을 물려줄 사람이 없거나 생계가 어려워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한국 직원들에게 권해본다. 한 잔하러 '근사한 장소'에 가자고. 그들은 나를 '현대식 와인바'로 안내한다. 한국에 오래 산 사장이니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로 모던한 술집에 데려간다. 그러나 내겐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비슷한 술집일 뿐 기대했던 '아직 모르던 한국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술집'은 아니다. 아마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른 외국 문화 수용력이 이러한 결과를 나은 게 아닌가 싶다.

옛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보존의 가치를 갖고 계승돼야 한다. 뭔가 특별하거나 유별난 활동이 아니면 어떤가. 소소한 일상에서도 충분히 한국적인 것은 지켜나갈 수 있다.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와인바'보다는 한옥의 나무 냄새와 은은한 등잔불 빛 아래서 막걸리를 마시게 하고, 전통연을 만들어 보게 하는 현대식 주점은 어떨까.

전통을 즐기는 것이 별것일까.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한국적인 색채를 지켜내면 되지 않을까. 또 이러한 활동들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아 외국인들이 보고 만질 수 있게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문화 체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옛것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기 마련이다. 발전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가진 좋은 전통과 관습을 너무 많이 없애버리진 말자. 지금의 젊은이들이 나이 들어 다시 찾을 이곳에 옛 추억을 남겨두자. 그리고 돌아왔을 때 그 옛 추억이 값진 것이 될 수 있도록 지키고 보호하자. 나 역시 이제는 제2의 고향이 된 한국을 위해 앞으로도 더욱 많은 옛것을 지키고 그 가치를 소중히 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