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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十字軍 Crusade) 추가요약

好學 2011. 7. 16. 07:07

십자군 (十字軍 Crusade)  추가요약

 

 

★ 요약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8차례 이상에 걸쳐서 서유럽 그리스도교도가 동유럽, 중근동 각지를 향해 실시한 군사원정의 총칭.

 
★ 설명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8차례 이상에 걸쳐서 서유럽 그리스도교도가 동유럽, 중근동 각지를 향해 실시한 군사원정의 총칭. 참가자가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 것에서 13세기 후반 이후 십자군이라고 했으나, 그 이전 사료에는 <예루살렘여행> <성(聖) 분묘참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 배경
중세 서유럽사회에서는 11세기 전반까지의 몇 세기 동안에 자연조건의 완만한 호전으로 생산·유통이 향상되고 인구가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기술혁신과 지적활동이 촉진되고 신흥도시권과 전통적 농촌지역 모두 생활상의 발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 정신면에서는 그리스도교 보급에 따라 수도원문화가 번영하였고, 신학·철학·법학·문예의 발달은 신심형태(信心形態)의 세련된 표현 수단을 낳아, 로마네스크양식에 의한 교회예술의 완성을 보았다. 성유물(聖遺物)의 숭경(崇敬)이나 성소참예는 그 보편적 습속의 전형이었으며, 순례는 속죄행위로서 신도들 간에 전통이 되어 유행하였다.

예루살렘은 성도(聖都)로서 순례의 최고 목표지였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계가 있는 곳인 성묘에 참예하는 것은 신도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한편 11세기 중엽에 지중해세계를 구성하는 서유럽, 비잔틴제국, 이슬람권의 3대 정치세력 사이에 균형 변화가 생겨, 그때까지 닫혀 있던 서유럽이 이슬람세력의 포위망을 밀어제치는 형세로 옮아갔으며 또 비잔틴제국은 이슬람의 압박에 단독으로 대항할 수가 없어 서유럽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여러 국민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종교적 사명감에 불탔으며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야심을 채울 호기로 보고, 성지해방을 대의명분으로 하는 무장순례단을 대(對)이슬람 원정군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십자군운동>이라는 이와 같은 해외진출기운은 서유럽 전반에 넘쳐, 봉건사회의 모든 계급이 이에 관계되었고 미지의 동방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가 결부되어 지속적이며 대규모인 <탈서유럽> 현상을 가져오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 동기
십자군원정의 발동은 다분히 동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세국의 내외정세판단에 따른 것이며, 이슬람세력의 동태는 간접적인 동기를 이루는 데 지나지 않았다. 11세기 중엽, 셀주크투르크가 동(東)이슬람권의 실권을 장악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시리아, 소아시아의 요충지를 잇따라 점령하고, 1071년 말라즈기르트(지금의 터키 동부)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비잔틴제국은 위기감 속에서 국토방위와 실지회복(失地回復)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인 친서유럽정책을 채용하여 나폴리·시칠리아에 진출해 있던 노르만인 기사(騎士)나 성지순례 도상에 있는 서유럽 제후에게 용병파견을 요청하였다. 1054년의 동서교회 분리 이후 멀어졌던 로마교황청과 재접근을 꾀하는 등, 서유럽인의 개입에 길을 열었다.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1095년 피아첸차교회회의에 사절을 보내, 동방의 <이슬람화(禍)>를 과대선전하고 그리스도교신도, 교회, 순례가 입은 피해를 호소했다. 이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반 2세는 동서교회의 재결합, 동방에 교회국가 창설, 서유럽 여러 국민의 대량 이민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구원군 파견 계획을 구상하였고, 같은 해 11월 클레르몽공의회 개최중에 제1차 십자군 발동을 선언했다. 그 취지는 전(全)그리스도교도의 의무로서 성묘에 참예하는 서원(誓願)을 하고 이슬람이 점령한 성도를 탈환하여 시리아·팔레스타인의 교회를 해방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권설(勸說)하는 데 있었다. 교황 우르반은 즉위 이래의 현안이었던 독일(신성로마제국)황제와의 <성직서임권투쟁>을 교황 쪽에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의욕과, 서유럽 봉건사회의 적폐였던 제후와 기사 사이의 사적 투쟁을 <신(神)의 평화운동>으로 억제하려는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조된 십자군운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교황대리 르퓌, 주교 아데마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군단편성을 프랑스제후에게 호소하였다.

 

★ 십자군의 구조와 경과
넓은 뜻의 십자군은 그 무대가 되었던 서유럽과 동지중해세계의 정세변화에 따라 초기·중기·말기 십자군 및 그 이후의 십자군의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 초기십자군(11세기말∼12세기말)
클레르몽공의회에서 있었던 교황의 권설을 이론적 근거로 하는 제1차 십자군(1096∼99)의 공식원정대 4개 군단(로렌인·노르만인·남프랑스인·북프랑스인의 각 부대)은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에서 획득한 세 봉건소령(에데사백령·안티오키아후령·트리폴리백령)을 포함하는 예루살렘왕국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 기초를 굳힘과 동시에 주변 이슬람세력에 대한 공세적 방위작전을 폈다. 이 시기에는 아미앵의 은인(隱人) 페트루스를 지도자로 하는 민간순례단 약 2만 명의 선발대가 공식십자군과 협력하여 싸웠다.

 

 1101년에는 신흥 예루살렘왕국에서 살기를 바라는 약 20만 명의 이민희망자가 소수 기사대의 호위 아래 민중십자군으로서 동방으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룸왕조 셀주크군의 습격으로 거의 전멸하는 참상을 겪었다. 이것으로 보아 비무장의 민간인집단이 십자군운동의 주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복지의 지배는 전략목표지역의 중심이 되는 성벽도시 점령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공명을 세운 군사령관에게 맡겨졌다. 당시 서유럽에 확립되어 있던 봉건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가신(家臣)의 봉토 위에, 왕·제후·기사·시민·농민 등의 피라미드적 신분계급제가 구성되었다.

예루살렘 왕위는 초대의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부여된 바스로렌후(侯) 고드프루아 드 부용 이래, 여계(女系) 상속을 포함하는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서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와 동등한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보두앵 3세 시대에는 그 영토가 북쪽은 유프라테스강 연안에서부터 남쪽은 홍해의 아카바만에 이르는 최대 판도에 달했다. 이 광대한 면적에 비해 서유럽인 지배자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대부분의 피지배자층은 정복될 때 대학살을 모면했거나 도망 후 귀순한 원주민이었다.

왕국의 방위군사력은 12세기 초 서유럽에서 창설된 기사수도회(騎士修道會)의 해외 관구에 속한 성채와 기사군을 중심으로 하여 소수의 현지 제후를 섬기는 기사계층에 위임되어 있었다. 한편 십자군 진출기에 때마침 정치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여러 정권 쪽에서 마침내 통일된 반격의 움직임이 일어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이슬람 쪽이 에데사백령 전역과 안티오키아후령 동반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2세기 후반에는 살라웃딘의 아이유브왕조 창시를 계기로 이슬람 쪽의 대규모 반십자군 <성전(聖戰)>이 창도되었는데, 그 결과 제2차(1147∼49), 제3차(1189∼92) 십자군이 발동되었으나, 끝내 좌절됨으로써 초기 십자군의 성격은 변질되게 되었다. 1146년 5월 프랑스 중부 베즐레집회에서 당시 서유럽 제일의 정신계 지도자였던 클레르보의 C. 베르나르두스의 권설로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하는 원정대에 템플, 성 요한 두 기사수도회와 예루살렘왕국제후군이 참가했다.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으나 농성군에게 패하여 안티오키아 방위에 유효한 상황을 가져오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장기왕조의 세력확대를 허용하는 결과가 되었다.

 

또 1163년 이래 예루살렘왕국의 카이로 파티마왕조에 대한 간섭행동이 원인이 되어 아이유브왕조는 이집트, 시리아와 통합작전을 펴, 1187년 7월 하틴싸움에서 예루살렘왕국군을 참패시켰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 살라웃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 십자군 국가의 운명은 위기를 맞았으며 제3차 십자군의 대대적인 발기를 촉진하게 되었다. 당시 서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로마교황의 권위도 위협하는 세력을 가졌던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붉은수염왕), 기사도정신의 귀감이라 하여 인기가 높았던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獅子王) 및 프랑스왕 필리프 2세(尊嚴王)의 3대 군주가 모두 모인 이 십자군은 지중해항로의 일부를 이용하게 된 새로운 경로를 따라서 아크레에 상륙하여 예루살렘 재점령을 목표로 전투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의 사고사에 따른 독일군의 불참과, 영국과 프랑스 양국 군주 사이의 불화가 화근이 되어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 그뒤 서유럽 십자군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 중기십자군(13세기 전반)
1192년 9월, 제3차 십자군의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던 리처드 1세와 살라웃딘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예루살렘왕국은 티루스에서 야파까지의 해안부만으로 영토가 좁아진 상황에서, 아크레를 임시 수도로 하여 잔존영토의 수세적 유지에 급급하는 중기십자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내륙 시리아를 회복하고 이집트와 연계한 아이유브왕조는 휴전기간중 그리스도교도가 순례하는 예루살렘의 통행권을 허가하는 관용정책을 내놓았다.

서유럽측은 이 시기에 새로이 영유한 키프로스섬을 중계지로 하여 바닷길에 의한 동서 연락 수단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또 1세기 동안에 걸쳐 이 해외식민지를 경영하여, 물심양면의 교류를 촉진할 수 있었다. 일명 <방향전환십자군>으로 불리는 제4차 십자군(1202∼1204)은 교황권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또한 서유럽 수도제(修道制)의 이념을 표방하는 수사 F. 뇌이의 권설에 따른 것이었으나, 참가 제후·기사의 경제력 부족과 전략이념의 불일치가 화근이 되어 베네치아인의 상업지상주의에 끌려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틴제국을 공격,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제국>을 건설하는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인 플랑드르백(伯) 보두앵을 초대황제로 한 이 신제국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그리스 각지를 정복하여 동방교회를 한때 로마교회 아래 통합하고 라틴문화를 동유럽에 보급시켰으나, 소아시아로 망명하여 부흥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비잔틴황제의 반격을 받아 1261년 멸망하였다. 제5차 십자군(1217∼21)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향하지 않고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므로, 말하자면 방향전환십자군이었다. 이 십자군은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선포한 공식십자군이었으나, 참가자는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교국가의 헝가리왕, 오스트리아제후 외에 프리슬란트인 기사 등 대체로 약소한 군사력이었으며 여기에 예루살렘왕국의 현지군이 협조하여 다미에타를 점령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편 이슬람의 카이로정권 쪽에서는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조건으로 십자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교황대리 펠라기우스 추기경의 강경한 제안으로 이 조건을 거부하였고, 카이로공격을 계속한 십자군은 이슬람 쪽의 반격과 나일강의 홍수 때문에 아무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시칠리아왕으로서 이슬람문화를 가까이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한 제6차 십자군(1228∼29)은 출발 지연을 이유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프리드리히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공식 십자군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카이로의 술탄과 개인적 친교가 있어 결혼정책에 의해 예루살렘왕을 겸하였으며, 외교수단을 써서 1229년 2월 야파협정을 맺고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했다. 종교적 관용사상에 따라 십자군 본래의 목적이 달성되었으나 정치적·경제적 이해(利害)의 측면에서 서유럽인 사이의 조정을 보지 못했고, 파문당한 황제와 현지 제후의 대립, 출신지를 달리하는 여러 국민 사이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왕국은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졌다.

 

★ 말기십자군(13세기 후반)
1244년 호라즘 투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평화공존이 무너진 뒤에 중근동 정세는 다극적인 여러 세력의 이합집산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호라즘 투르크인 배후에서 몽골인이 시리아로 진출하였고 서유럽은 몽골인을 그리스도교도로 믿어 동맹을 구상하였으며, 이슬람권 안에서는 시리아와 이집트가 대립하는 한편 신정권 맘루크왕조에 의한 통일세력이 급속히 성장해 갔다.

서유럽에서는 프랑스왕국의 정치적·경제적 우위 아래 고딕예술이 번영하였고, 루이 9세(성 루이왕)의 경건한 신앙이 그리스도교도의 모범이 되었으며,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 수사의 해외포교활동도 활발했다. 13세기초 이래 여러 차례 되풀이되었던 소년십자군이나 목동십자군과 같이 민중종교운동에 대한 열의도 강했으나 군사력으로 십자군원정에 참가하는 제후·기사의 정열은 냉각되어 갔다. <예루살렘의 열쇠는 카이로에 있다>는 전략개념 아래 루이 9세가 일으킨 마지막 두 차례의 십자군(제7차 1248∼54, 제8차 1270)은 이집트와 튀니스를 향해 정예의 대군을 보냈으나 모두 이슬람의 포위망 속에 고립되어 성지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패퇴하였으며, 오히려 카이로의 신정권 맘루크왕조의 그리스도교도 소탕작전을 도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26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시리아해안의 안티오키아후령·트리폴리백령을 비롯하여 잔존 영토 전부를 상실하였고, 예루살렘왕국 직할령은 마지막 거점 아크레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 이후의 십자군(14∼16세기)
그리스도교도에게 성지 상실은 십자군 그 자체의 종말을 뜻했으나, 대(對) 이슬람전쟁이라는 정략적 구상에 의한 동방관은 근세까지 지속되어 맘루크왕조에 대한 항쟁, 새롭고 강대한 적대자 오스만제국과의 대결은 <이후의 십자군>이라는 개념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1344년의 키프로스(로도스)십자군과 1396년의 니코폴리스십자군이 특기할 만하다. 모두 서유럽에서의 활발했던 십자군운동과는 달리 동유럽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세적 공격이었다. 15세기에 들어오자 1440년 헝가리십자군을 전기로 하여 동서세력관계는 뒤바뀌었으며, 오스만제국군의 서방진출이 고조기에 달하여 1453년에는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게 되었고 16세기에는 동지중해제해권의 전면적 포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십자군은 소멸했다.

 

★ 세계사에서의 의의
십자군운동이 시작된 이래 오늘날까지 약 900년 동안, 그 평가는 찬부양론으로 나뉘어 학설도 구구했으나, 이를 단순한 군사원정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서유럽 중세 후반기의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종합적인 전체상으로서 관찰하고, 거기에서 문화적 고양기의 서유럽인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바람직하다. 지중해 세계에서 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동서교류의 영향은 매우 현저하며, 연안 여러 민족이 장기적 교류를 통해 정신적·물질적 시야를 넓혀 마침내는 세계적 규모의 <대항해시대>를 여는 밑바탕이 되었다.

 

 

연표
 
AD 1095  클레르몽공의회의 십자군 선언 
1096 P. 피에르의 민중십자군. 제1차 십자군
1097 니케아 공략
1098 에데사백령 성립. 안티오키아후령 성립 
 1099 예루살렘 점령. 예루살렘왕국 성립 
 1101  후속 십자군 소아시아에서 괴멸  
 1102 트리폴리백령 성립 
 1109 트리폴리시 점령  

 1118  템플기사수도회 성립  
 1146  에데사백령 멸망  
 1147 제2차 십자군 
 1153  아스칼론 점령  
 1163  예루살렘왕국군 이집트 원정(~67)  
 1169 살라웃딘 아이유브왕조 창시 
 1187  하틴 싸움. 예루살렘 함락  
 1189 제3차 십자군 
 1190 프리드리히 1세 익사. 독일기사수도회 성립 
 1191  리처드 1세 키프로스 점령. 아크레 탈환  
 1192 리처드·살라웃딘협정(순례의 자유 확보) 
 1202  제4차 십자군  
 1204 콘스탄티노플 점령, 라틴제국 성립. 모레아후령·아테네후령 성립 
 1212  소년십자군   
 1217 제5차 십자군 
 1219 다미에타 점령 
 1221  이집트에서 패퇴  
 1228 제6차 십자군
 1229 야파협정(예루살렘 회복) 
 1244  호라즘 투르크인 예루살렘 점령  
 1248 제7차 십자군 
 1250 만수라 싸움, 루이 9세 포로가 됨. 맘루크, 아이유브왕조를 무너뜨림 
 1261  라틴제국 멸망  
 1268 안티오키아 함락 
 1270 제8차 십자군. 루이 9세 튀니스에서 병사 
 1289  트리폴리 함락  
 1291  아크레 함락(십자군국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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