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교회소식]본이 되는 교회

[교회소개] 인천성광교회

好學 2009. 4. 27. 21:50

 

 

목사가 매일 화장실 청소하는 성광장로교회
선교 위해 유급 직원과 버스 처분..방대한 선교자료와 100명 선교관 운영
 
김철영
▲ 인천성광교회 양치호 목사    ©뉴스파워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에 소재한 성광교회(예장대신 총회 소속, 담임목사 양치호 )에는 여느 교회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사역 내용을 들어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그동안 250여명의 전문인 선교사를 훈련했고,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선교센터를 갖추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 전문 자료를 갖춘 도서관이 있다. 1989년부부터 인도, 필리핀, 일본, 브라질 미얀마, 홍콩 등 전 세계로 단기선교를 떠난다.

선교센터 1층에는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있는데 수익금 전부를 선교기금으로 사용한다. 서빙은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한다. 물론 자원봉사다. 담임목사는 선교관 3층에서 생활한다. 사찰이 없고, 교회 버스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에게 사례비를 주지 않는다. 교인들은 각자 한 가지 이상씩 교회 봉사를 한다. 저명한 우주항공학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교회 천장에 달린 선풍기 10대를 청소하는 것을 맡았다. 

이 정도면 아주 특별한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교회는 아버지께서 28번째로 개척한 교회입니다. 1970년에 개척을 하셨는데, 저는 1984년에 담임목사로 부임했어요.”

양치호 담임목사의 선친은 김익두 목사의 세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양춘식 목사. “아버지는 소년소녀가장이셨는데 일제 말엽 중국 만주에서 사시면서 중국 무술을 배우셨어요. 해방 후 서울 신촌에서 중국무술 도장을 운영을 하셨지요. 그러다가 김익두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천막부흥회에 참석하셨다가 변화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김 목사님을 따라다니셨어요.”

양 목사는 선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한때는 서북청년단 활동도 하셨어요. 주월 파병사령관이셨던 채명신 장로님과 고려제약 조기철 회장님이 아버지에 대하 잘 아세요. 아버지는 1970년대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너지절약을 해야 한다고 연탄만 떼셨어요. 결국 조그마한 헛간 같은 사택에서 사시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돼서 소천하셨어요.”
 
그러나 양춘식 목사는 두 아들을 목사로 키웠다. 양치호 목사의 형은 예장대신 총회장과 한기총 공동회장을 지낸 고 양용주 목사. 그는 교회법 전문가로 서울 청파교회를 담임목회했다.

양치호 목사는 처음부터 신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사업도 했다. 그러다가 서울 강남의 개척교회를 섬기는 중에 1년에 100여명에게 전도를 하면서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 목사는 절대 안하겠다던 그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부르신 것이다.

“1979년 예장합동교단이 분열되는 혼란을 겪을 때 총신대학원에 지원했어요. 당시 윤영탁 교수님이(합동신대원 총장 역임) 저를 면접했어요. 그런데 혼란스런 상황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어요. 사업을 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대한신학교를 가게 되었지요.”

양 목사는 1984년 성광교회에 부임했다. 착실하게 사역을 해가던 양 목사가 선교에 눈을 뜬 것은 인도 선교 현장을 방문이 계기가 됐다. 예장합동측 로이 목사와 함께 인도 선교 여행을 갔다가 큰 감동을 받은 것. 

양 목사는 모든 포커스(초점)를 선교에 두기로 결심했다. 교인들이 실제로 선교에 이바지하도록 교회 구조를 바꿨다. 최우선적으로 교회 버스 3대를 처분했다. 부평 이상의 거리에서 오는 교인들은 가까운 교회로 출석하도록 했다. 집사 임명도 철저하게 했다.  선교를 위해서는 교회의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 지붕이 터져서 비가 새니까, 교인들은 교회당을 건축하자고 했어요. 그러나 저는 이 땅의 사명이 선교인데 우리 교회만 좋으면 되겠나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배당 대신 선교센터를 짓자고 했지요. 물론 교인들은 이해를 못했어요.”

결국 선교센터를 먼저 지었다. 양 목사는 교회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차량과 기사를 정리했다.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도 무보수로 봉사하도록 했다. 교회 직원도 없앴다. 부교역자도 두지 않았다. 대신 평신도를 야간신학교에 보내서 사역자화 했다. 선교의 ‘특수부대’에 걸맞게 구조조정을 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매년 12월에는 봉사신청을 해요. 레스토랑, 커피숍에서 일하는 분들도 모두 무보수 자원봉사입니다. 저도 매일 화장실 청소를 해요. 사모도 매일 봉사를 해요. 장로님과 권사님도 매일 교회 봉사를 합니다. 교회 정원이나 시설물들도 우리 교인들이 손수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30년은 막노동을 하셨고, 사도 바울도 귀족인데 3D업종을 택했잖아요. 우리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양 목사는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 체제로 전환되자 1989년 8월 단기선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사역은 대만, 홍콩, 일본, 필리핀, 브라질, 미얀마 등 전세계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로, 권사, 구역장들을 데려갔어요. 그들의 선교마인드를 가져야 교회 전체가 선교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특히 선교하러 가서는 일체 쇼핑을 못하게 했어요. 저녁과 새벽집회 그리고 낮에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게 했지요.”

예상대로 교인들은 선교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교회가 없는 지역이 많은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선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 목사는 그 다음부터는 청년들도 선교사역에 동참시켰다. 그동안 선교사역에 참여했던 청년들 가운데 40여명이 선교사와 목사가 됐다. 선교훈련을 위해서 강승삼 박사, 전호진 박사, 노봉린 박사 등 쟁쟁한 선교전문가들이 강의를 맡았었다. 

성광선교센터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인 선교사들은 일본, 중앙아시아,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면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교사도 있고, 병원과 학교사역을 하는 선교사도 있다. 또 호주에는 미션홈을 운영하고 있다. 

성광교회가 자랑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방대한 선교자료. 선교센터 2층 도서실 책장에는 전세계 선교자료가 빼곡하게 차있다.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다.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도 자료를 보고 놀랐다. 여러 대학과 교회 그리고 선교단체들에서도 자료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을 정도다.

“10여년 간 2억원의 예산을 들여서 자료를 모았어요. 그런데 인천까지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서울의 어느 단체에 기증할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선교센터의 게스트룸은 유료와 무료 사용으로 구분하고 있다. 세미나실은 2~3시간 정도는 무료이고, 그 이상은 실비를 받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영성의 대가인 리차드 포스터도 머물다 갔다. 게스트룸에는 또 외국 대학생들이 인천의 대학에 석박사과정에 유학왔다가 장기 거주하면서 전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이들은 전문 사역팀이 양육을 담당하고 있다.

성광교회는 지역주민들과 대학생들과 함께 하는 교회다. 선교관 1층에 있는 레스토랑과 커피숍은 지역주민과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음식맛도 일품이다. 실내 장식도 민들레영토와 비슷한 분위기이다. 예비군 훈련 장소로도 활용되고, 무료 결혼식 장소로도 활용된다. 

양 목사는 결혼식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도록 교인들에게 권면했다. “미국은 결혼식 비용이 평균 2000불인데, 우리나라는 집값 빼고도 신랑신부 각각 17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식 비용으로 250만원 정도만 쓸 수 있도록 강조합니다.”

양 목사는 이를 위해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도록 권면한다. 판자집교회라도 호텔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성광교회는 웨딩드레스도 몇 벌을 갖춰 놨다. “우리 교회에 출석했던 박미선 자매가 의상학과 출신인데, 졸업반 때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가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자기도 결혼을 했어요. 웨딩드레스 5벌을 준비했어요.” 

청년 중에는 양 목사의 말을 듣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해서 200만원 정도밖에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그 청년은 당초 1000만원을 준비했는데, 800만원은 선교비로 바쳤다. 양 목사는 그 돈으로 봉고차를 구입해서 남동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교회에 데려와 영어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성광교회는 24시간 오픈되어 있는 기도실을 운영하고 있다. 인하대, 인천대, 인천전문대 등 크리스천학생들이 기도모임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저녁 9시가 넘으면 직장인들도 기도를 하고 간다. 개인 기도실이 있어서 마음껏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양 목사와 함께 선교센터 주변을 둘러 봤다. 

쓰레기장이었던 공간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뀌었다. 딱딱한 시멘트벽은 공짜로 얻어온 나무로 외벽을 둘렀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다. 선교관 옥상에는 골프연습장이 있다. 골프연습장이 문을 닫으면서 공짜로 갖다 놓은 것이다. 커피숍 안에는 기름값을 절약하기 위해 목탄난로를 들여다 놨다. 오히려 운치가 있어 보인다. 선교관 마당에 있는 콘테이너박스 안에는 운동기구들이 있다. 바베큐를 구워 먹을 수 있는 통도 있다. 선교관 입구에는 작은 분수대가 하늘로 물을 뿜어 댄다. 

이 모든 시설과 장식을 업체에 맡기지 않고, 800여명의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다니…. 감탄사가 절로 났다.
 
“선교사님들! 언제라도 오셔서 쉬었다가 가십시오.”

 *전화:032)872-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