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구약성서개론] 개관

[스크랩] 시편 - 개론

好學 2011. 5. 7. 22:17

 

시편 - 개론

 

 

▣ 복있는 사람-시편 1편

 

본 시편의 주제는 경건한 사람의 복됨과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다. 1절은 이렇게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오, 한 사람의 행복함이여!“ 성경의 그 어느 곳을 펼쳐도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시며(시련의 한복판에서라도)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픔을 주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분하여 보신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았거나 아니면 “아담 안에“ 있어 잃어버림을 당하는 둘 중의 하나이다(고전 15:22/고전 15:49 참조).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1-3절)

태초의 창조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셨다(창 1:28). 저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다만 인간의 불순종을 통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온 후였다(창 3:14-19).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에베소서 1장 3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가!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들을 즐기지 못한다(옵 17절). 이 구절들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종류의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세상과 분리된 사람(1절)-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걷는 것으로 비유된다(엡 4:1/엡 4:17/엡 5:2/엡 5:8/엡 5:15 참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일보를 내딛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시작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걸음을 더멀리 걸어갈 때 성장하게 된다. 걷는 일은 행동을 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에 성경의 진리들을 적용함에 있어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어두운 가운데“ 행할 수는 없다(요일 1:5-7 참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자기의 행실을 삼가한다.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일들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그의 행실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일련의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걸음-논의-불경건함(악인, 하나님을 닮지 않음)

●서있음-길-죄인들(목표에서 빗나감, 도달하지 못함)

●앉음-자리-경멸함(거룩한 것을 업신 여김, 조롱함)젊은이가 죄 가까이 걷다가 죄를 생각하느라고 서있고 마지막으로는 “잠시 죄의 낙을 누리려고“ 앉게 되는 일은 상상력을 많이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히 11:25 참조). 우리는 베드로의 불순종에서 이러한 슬픈 과정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나(요 18:8), 그는 예수를 따라 걸어갔다(요 18:15). 다음으로는 그가 그릇된 군중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본다(요 18:18).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는 불 곁에 앉아 있다(눅 22:55)!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곧장 유혹을 향해 걸어갔으며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하지 못한 논의(충고, 계획)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는 머지 않아 그들의 생활방식에 서 있게 되고 마침내는 주저앉아 그들에게 동의하게 된다.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2절)-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죄와 세상의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즐거워한다. 말씀을 향한 사랑과 순종은 우리의 생활에 축복을 가져온다(수 1:8 참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매일 연구하고, 암송하며, 읽을 뿐 아니라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조절을 받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 된다. 영혼에 있어서 “묵상“은 곧 몸의 “소화기능“과 같다. 묵상이란 말씀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며 속 사람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렘 15:16/겔 3:3/계 10:9 참조).

물가에 있는 사람(3절)-마실 물이란 하나님의 성령을 비유하는 말이다(요 7:37-39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마른 땅 밑 깊숙한 곳에 숨겨진 샘으로부터 물을 얻는 나무에 비유된다. 이 세상은 헌신한 신자에게 있어서는 사막과 같아서 결코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에 영적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영적인 생명수를 끌어 올려야 한다(렘 17:7-8/시 92:12-14 참조). 뿌리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뿌리보다는 잎사귀와 열매에 대해서 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뿌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말씀으로 매일 시간을 보내며 성령께서 자신을 먹이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유용성의 면에 있어서는 말라서 죽게 될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끌어내는 신자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기를 멈추면 그것은 뿌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막 11:12-13/막 11:20/눅 13:6-9 참조).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에 대해서는 다음 귀절들을 찾아 보라(롬 1:13/롬 6:22/갈 5:22-23/히 13:15/골 1:10).

1-3절에 제시된 거룩한 사람에 대한 완전한 모범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길이요(1절) 진리요(2절) 생명이시다(3절/ 요 14:6 참조).

 

2.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사람(4-6절)

“그렇지 않음이여!“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다! 이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 즐기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건한 사람은 강하고 영구적이며 아름답고 유용하고 열매맺는 나무에 비유되어 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는 겨이다! 그는 뿌리가 없고 바람에 날려가며,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쓸모도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결실함도 없다. 세례(침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 10-12절에서 이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탈곡 마당에 찾아와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추수군으로 비유한다. “그는 겨를 불사를 것이다!“(시 35:5/욥기 21:18 참조) 이 땅에서의 전 생을 겨와 같이 보내야 하는 사람의 비극은 어떠하겠는가?

미래의 심판이 있는가? 5절에 보면 심판이 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구약에는 우리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온전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심판이 없다(요 5:24/롬 8:1 참조). 하지만 불신자에게는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있다(히 10:27 참조). 잃어 버린 자들에 대한 심판은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 무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을 것이며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만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는 사악한 사람들 그대로의 본성, 즉 쭉정이로서 가치없이 잃어버려진 영혼임이 드러날 것이다. 5절은 악인이 심판 때에 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들이 심판의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책이 펼쳐질 때 이들은 무릎을 꿇고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빌 2:9-11 참조)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종교적인 모임의 회원이었을지라도 천국 의인의 회중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7:21-23 참조).

성경의 “안다“라는 단어는 보통 “나는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을 안다“고 말할 때의 지적인 이해보다 훨씬 더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에는 다음 귀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선택과 관심“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19 참조). “내가 내 양을 알고...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요 10:14-15 참조).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에게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7;23 참조). 여호와는 의인의 길을 직접 계획하셨고 설계하셨으므로 알고 계신다(엡 2;10 참조). 주님은 의인들이 이 계획된 길을 갈 때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 거룩한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그가 하는 말, 그가 행하는 일, 그가 가는 곳, 이 모든 것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3:6 참조). 의인의 가는 좁은 길은 영광으로 향하지만(잠 4:18 참조),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이 땅에서 낭비하는 삶을 살며, 오는 세상에서는 멸망을 받는다! 얼마나 큰 낭비인가 !

6절은 “두가지 길“에 관한 잘 알려진 교훈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이 비유로 끝맺으셨다(마 7:18- 이하). 또한 잠언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내용을 볼 수 있다(잠 2:20/잠 4:14/잠 4:24-27 등).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 잃어버림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뜻“(행 20:27 참조)보다도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의 의견을 더 좋아한다. 그는 의인의 회중보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더 좋아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루 종일 죄를 생각하며 보낸다(창 6:5 참조). 그는 이 땅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신자가 시편 1편 1-3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주님께 양보함으로 시작된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매일 양도하는 것이다(롬 12:1-2 참조).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이 생활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생활을 하는 것이며(물론 고립이 아니라 그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 하나님의 숨겨진 자원들을 빨아올리는 뿌리를 가진 생활이다. 얼마나 축복된 생활인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참된 만족을 주는 생활이다!"

 

▣ 왕-시편 2편

 

시편 1편과 2편 사이에는 흥미로운 대조점들이 있다. 첫 장은 개인적이고 둘째 장은 국가적이다. 시편 1편에서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보지만, 시편 2편에서 그는 왕중의 왕이시다. 1편은 유대인의 축복을 다룬다(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반면에, 2편은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제시한다. 1편과 2편에 모두 “망한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1편 6절은 개별적인 개인에게 적용되며, 2편 12절은 반역하는 나라들에게 적용된다. 또한 두 편 모두 “묵상하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2편 1절에서는 “경영한다“고 번역되어 있다. 1편 2절에 나오는 묵상은 올바른 것이며 2편 1절에 나오는 것은 그릇된 종류이다! 시편 2편의 열 두 구절은 세 구절씩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마다 우리는 다른 음성을 듣게 된다.

 

1. 민족들의 소리(1-3절)

이것은 반역의 소리이다. “분노하다“는 단어는 “모여서 소란을 피운다“는 뜻이다. 허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교도“, “백성들“)이며 하나님과 그의 규율에 대항하여 반역하고 있다. 민족들은 왕들로 말미암아 반역으로 이끌려 가고 있으며 모두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저항하고 있다. 물론 이 소리는 시대를 내려오며 수십 세기에 걸쳐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 더욱 크게 들려온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규율에 대항하는 반역의 소리가 연합을 이루고 있다. 민족들이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풀어버리자!“ 창세기 10장 5절에 따라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나라와 민족으로 나누셨다(행 17:26/신 32:8 참조). 역사는 이방 나라들이 유대인들(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절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음을 밝혀준다. 교만한 느부갓네살처럼 이들은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의 일들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를 거절한다(단 4:28-37 참조). 이 이방인의 반역은 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더욱 맹렬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4장 23-30절은 초대교회의 박해를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본 시편의 부분적인 성취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는 “이 땅의 왕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연합함으로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계 1:5/계 6:15/계 16:12-16/계 17:2/계 17:18/계 19:11-21 참조).

 

2. 아버지의 음성(4-6절)

하나님은 인간의 위협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시는가? 그는 웃으신다! 이것은 거룩한 조소의 음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보다 위대하시며 가련한 왕들의 교만한 공격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는 십자가에서의 은혜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웃으실“ 날이 올 것이다(시 37:1-15/시 59:1-8 참조). 산헤립이 얼마나 교만하게 하나님과 유대인들을 무시하였는지 기억해 보라,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쓸어버림을 당하였다(왕하 19장). 이 일은 심판 가운데 이 세상의 나라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하시는 날, 다시 일어날 것이다.

또한 화를 발하시는 음성이 이어진다(5절). 다시 말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은 진노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는 은혜 가운데서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히 1:1-2 참조). 그러나 어느날, 이 세상의 나라들에게 그의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분“이라는 단어는 “맹렬한 화“라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6-19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대환란을 말한다. 이 때는 땅과 바다와 하늘과 자연계, 사람들과 나라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하는 때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재앙과 하늘로서 온 질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환란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은 “정화되어서“,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때를 준비할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들의 결정을 자신의 생명으로 인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선포의 음성이다(6절).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산에 그의 기름부으신 왕을 세우실 것이다! 이 분이 그리스도이시다(사 9:6-7/단 7:13-14 참조). 주님이 아직은 영광스러운 자신의 보좌에, 또는 다윗의 보좌에 오르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그의 보좌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확실하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왕“이다(히 6:20-7:17 참조).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중재하시며, 어느 날 영광 중에 돌아오셔서 나라들을 심판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보좌에 오르실 것이다(마 25:31-46 참조).

 

3. 아들의 음성(7-9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법령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성취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 아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가 아니라 그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였다. 사도행전 13장 28-33절을 주의깊게 읽자. 그리스도는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서 나오셔서 부활의 능력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일어나셨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1:5 과 5:5 에 다시 인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그는 유업을 받으셨다(히 1:4-5 참조). 하나님은 그 아들이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으며(마 3:17 참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의 참혹한 죽음을 직면하셨을 때에도 변화산 상에서 재차 말씀하셨다(마 17:5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의 충성스러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들을 유업으로 받으셨다. 그러나 사단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와 똑같은 왕국을 가지라고 예수님께 제안했었다(마 4:8-10 참조). 만일 예수님이 마귀에게 굴복하셨더라면 고난없이 이 나라들을 받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 밖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물론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유혹은 끊임없이 있었다). 사단은 이 왕국들을 적그리스도에게 넘길 것이며, 그가 잠깐 동안 나라들을 통치할 것이다(계 13:1-10 참조).

그리스도는 언제 “땅 끝까지“ 온 땅을 자기의 소유로 받으실 것인가?(그가 오늘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가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이다(계 19:11-21 참조). 시편 2편 26-29절은 요한계시록 12장 5절과 19장 15절에 언급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장 26-29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다(단 2:42-44 참조).

 

4. 성령의 음성(10-12절)

마지막 세 구절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순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호소하시는 말씀이다. 성령은 인격의 모든 면으로 호소하신다!

정신(10절)-“지혜로우라...교훈을 받으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의 논의“(시 1:1)는 거룩하지 못한 곁길로 인도하였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이다(고전 1:18-31 참조). 우리의 세상은 그 지식을 자랑한다. 그리고 과거보다도 지식이 많아졌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혜는 줄어든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왕들과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는다.

마음(11절)-“그를 섬기라!“ 거역하고 저항하는 대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절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경건한 기쁨은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의지(12절)-“아들에게 입맞추라“는 말은 그에게 사랑의 헌신을 나타내어 경의를 표하라는 말이다. 입맞춤이란 사랑과 화해를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과 화해하셨다(고후 5:14-21 참조). 의와 평화는 십자가에서 서로 입을 맞추었다(시 85:10 참조). 이제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며 그의 거룩하신 법도 지키실 수 있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지는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하다.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 이들은 그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게 될 것이다(빌 2:10/빌 2:11 참조).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했던 모든 일은 주님의 진노를 “조금만“ 타오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멸망하였다! 주님의 진노자 큰 심판 가운데서 이 땅을 태울 때 과연 어떠할 것인가!

시편 1편은 축복으로 시작되며 시편 2편은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그를 의지하는 모든 이에게 복이 있으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주(註): 시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역은 아마겟돈전쟁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여들 것이나(계 16:13-16/요 3:1- ),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후로 말미암아 이들은 연합하여 주께 대항하려 할 것이다(마 24:30). 물론 그리스도는 그들을 속히 멸망시킬 것이며(계 19:19-/슥 14:1-), 예루살렘에서 그의 지상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 인간은 무엇인가?-시편 8편

 

당신이 이 아름다운 시를 처음 읽을 때 “오늘날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주는 멧세지는 무엇인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이 시는 창조에 나타난 인간의 지위에 대한 시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빙산과 같이 이 시에 숨겨진 교훈은 크다고 하겠다. 시편 8편에 대한 신약의 관련 성구들의 도움에 힘입어 여기서 발견되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하려 한다.

 

1. 역사적인 배경

시편의 제목들이 역사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의 두 가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시편 8편의 서두에서 “다윗의 시-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깃딧“이란 “포도주틀“이란 뜻으로, 아마도 추수 때에 사용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음악적인 지시사항은 하박국 3장에서와 같이 앞에 나오는 시의 끝부분에 속한다고 결론짓는 성경학자들도 있다. 이 말은 9편의 처음에 나오는 “뭇랍벤“은 사실상 시편 8편의 끝에 속한다는 뜻이다.

“뭇랍벤“이란 용어는 “챔피언의 죽음“이라는 뜻으로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을 가리킨다(삼상 17장). 젊은 다윗이 거인을 죽인 후, 그 날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그 관심에 놀라워하며 하나님과만 홀로 지새우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다윗은 거인에 비교하면 “젖먹이요 풋나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젖먹이“를 사용하시어 적을 잠잠케 하셨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서 골리앗은 “챔피언“으로 불리워졌으며 40일 동안 교만스럽게도 도전하며 유대인들에게 겁을 주었다(삼상 17:16). 다윗이 적을 침묵시킬 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소년이다“(삼상 17:33 ,젖먹이요 풋나기이다). 사무엘상 17장과 시편 8편 사이의 또다른 유사점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삼상 17:44/시 8:7-8)이라고 한 말이다. 또한 시편 8편이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도 유사하다(8:1/8:9).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패배시켰다(삼상 17:15).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승리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는 젊은 다윗을 보게 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왜 한 목동에게 관심을 기울이셨는가? 다윗에게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토의 놀라운 모형을 본다. 이들은 둘 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였다.둘 다 목자였으며, 둘 다 일시적으로 형제들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또한 둘 다 광야에서 적을 직면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 왕이 되기 전에 추방을 당했으며, 유배되어 있는 기간 동안 신부를 취하였다. 그리고, 둘 다 “사랑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받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교리적인 의미

신약에서 시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때는 언제나 메시야와 관련된다. 시편 8편은 신약에서 몇 차례에 걸쳐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2절/ 마 21:16/히 2:6-8/고전 15:27/엡 1:22 참조). 이 관련성구들을 조심스럽게 읽자(특히 히브리서 2장).

시편 8편으로부터 인출되어 히브리서 2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된 교훈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모든 것을 도로 찾으셨다. 그리스도는 하늘 위에 높이 올리워지셨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다(엡 1:19-23/히 1:1-3 참조).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더이상 천막이나 성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저 위에“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마음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왕들에게 찬양을 받지 못하셨다. 성전에서 그에게 찬양을 돌린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창세기 1장 26-28절을 주의깊게 읽고 하나님은 처음 사람에게 바다의 고기와 새와 가축들을 다스리게 하셨음을 알아보자. 사실상,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받았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그는 이 왕권을 잃었다! 로마서 5장은 “왕들“에게 변화가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이 다스리고(롬 5:14 /롬 5:17) 죄가 다스렸다(롬 5:21). 아담은 자기의 왕권을 잃었으며, 왕은 고사하고 노예였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그는 아담이 잃은 주권을 행하셨다. 그리스도는 물고기를 다스렸고(눅 5:1-6/마 17:24-27/요 21:1-6), 새를 다스렸으며(눅 22:34), 짐승들을 다스리셨다(막 1:13/막 11:1-7 참조). 오늘날 지상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자연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셨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방문하시는 것“이었다(시 8:4/눅 1:68/눅 1:78 참조). 다윗이 밤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에 유의하자(3절). 왜냐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영적으로 밤이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시고 종이 되심으로,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잃어버린 사람들과 잃어버린 세계를 값주고 구속하셨다. 히브리서 2장 8절은 “우리가 만물이 아직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홍수가 나고 지진이 있고 재앙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본다(9절)!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가 재림하실 어느 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영화롭게 된 이 땅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우리는 오늘날 영적으로 주님과 함께 통치한다(롬 5:17/롬 5:21 참조). 또한 주님의 왕국에서 육신적으로 그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계 1:6/계 20:4 참조).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다만 아담의 죄를 풀어주어 본래의 아담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한 것을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든다! 로마서 5장 9-21절에서 “더욱“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눈여겨 보자.

 

3. 실전적인 생활

찬양-만일 다윗이 자기의 지위와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주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야 했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하늘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가시는 것인가?

지위-이 시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인다. 5절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라고 읽어야 한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님의 피조물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가르침은 인간을 동물로 낮춘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혼란하다. 야고보서 3장 9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때 보다 나은 대우를 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내적으로 대단히 불안하고, 심히 잔인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인간을 저하시켰으면서도 왜 혼란 가운데 있는지 의아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러한 형상 가운데서 새로워진 성도로서의 책임도 잊어서는 안된다(골 3:9-10/롬 8:29 참조).

능력-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다스릴 권세를 주셨다. 이 말은 우리가 왕으로서 통치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롬 5:17), 죄와 유혹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다. 우리는 죽음도 다스리며(고전 15:54-57), 죽음은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세울 주님의 왕국에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우리가 섬겨야 할 위치는 오늘 여기서의 생활과 충성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마 25:14-30/눅 19:12-17 참조).

약속-이 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마음을 쓰고 계심을 명백히 밝힌다. 또한 히브리서 2장 6-9절에 나오는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피조 세계를죄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시사한다(롬 8:18-24 참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며 그와 같이 될 때 “우리 몸이 구속될 것“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롬 8:23/요일 3:1-3/빌 3:20-2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보좌에 계시다는 사실은 어느 날 모든 피조 세계가 구속을 받을 것에 대한 증거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약속인가!

물론 시편 8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만 적용된다. 불신자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을 찬양할지 모르나(3절),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의 팔“의 능력을 경험하였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하나님은 자기의 손가락으로 우주를 창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 그 우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팔을 뻗쳐야 하셨다! 하나님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눅 19:44 참조).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 이 땅을 찾아오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였는가?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생활을 다스리시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 하나님의 영광-시편 19편

 

이 시편의 주제는 인간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은혜롭게도 계속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들에게 말씀하신다.

 

1. 하늘을 통해 말씀하심(1-6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은 그의 피조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과학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게 하며 하나님을 떠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시편 기자는 천지의 경이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시 23, 128편/ 사 40:12-31 참조). 예수님은 백합화와 까마귀들에게서 아버지 하나님의 솜씨를 보셨다(마 6:24-34 참조). 낮과 밤이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다(2절).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3절은 “아무 연설도 아무 언어도 없으며 그들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라고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봄으로써 창조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의 우주,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너머의 우주들은 대단히 복잡한 기계로서, 창조자와 유지할 분을 필요로 할 것이 틀림없다. 우주가 무(無)로부터 진화된 것이며 이처럼 질서있는 방식으로 배열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피조 세계는 모든 나라들에게 우주의 언어를 말한다(3-4절).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이 로마서 1장 18-32절을 사용한 것도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방인들은 잃어버린 자들인가?“ 이 질문은 흔히 반복되는 질문이며, 대답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혀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어떤 근거로 잃어버림을 당하는가? 그것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이방인들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영원히 하나님 되심“을 알며, 자신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음을 안다. 바울은 시편 19편 4절을 로마서 10장 18절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다.

자연은 하루에도 수천의 설교들을 인간의 마음에 전파하고 있다! 매일은 빛으로 시작되어 어두움으로 옮겨가며, 깨어나고, 잠든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 생활의 모습이다. 매년 봄에서 시작하여 겨울로 이동하며, 생명에서 출발하여 죽음으로 향한다. 우리는 풀이 마르고(사 40:6-8), 나무가 베어지고(눅 13:6-9/마 3:10), 불이 쓰레기를 소멸하는(마 13:42/마 13:50) 것들을 본다. 하나님의 손 아래서 자연이 활동하고 있음은 죄인의 마음에 주는 생생한 실물교습이다. 그러나 슬픈 일은 죄인들이 보기도 원하지 않으며 듣기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잃어버린 죄인은 이 지구상의 어떤 곳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정죄받는 위치에 있다.

 

2.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심(7-11절)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다(히 1:1-3 참조).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격적으로 받은 계시이다. 여기 사용된 이름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여호와“ 곧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언약의 이름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1)완전한 법-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영적인 진리에 있어서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인간들과 사단의 거짓말도 싣고 있으나 성경의 포괄적인 멧세지는 진리의 멧세지이다(시 119:128/시 119:160).

(2)확실한 증거-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하고 확고부동한 것이다(시 119:89 참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증거이며, 무엇이 참되고 옳은 일인가를 말해 준다(마 5:18).

(3)의로운 법령-“법령“ 즉 “교훈, 일상생활을 위한 규율들“이다. 어떤 규율들은 틀린 규율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옳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축복을 가져온다.

(4)순전한 계명-이 세상 종교의 “경전“ 중에는 육욕이 가득한 것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하며 죄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역시 순전하게 다룬다. 바르게 이해되는 한, 성경 중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죄로 인도하는 것은 없다.

(5)여호와에 대한 정결한 경외심-“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향한 존경하는 마음을 산출하기 때문에 “법“을 나타내는 또다른 용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인간을 정결하게 만든다. 이방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을 불결하게 만든다(신 4:10/벧전 2:17/시 111:10 참조).

(6)참되고 의로운 심판-하나님은 인간과 사물을 참되게 평가하시며 모든 것들을 완전히 아신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믿고 자신의 주관대로 행하지 않을 때 보상을 받는다. 롯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실패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다!

(7)금보다 귀한 것-성경은 참으로 보물 창고이다(시 119:72/잠 8:10/잠 16:16 참조).

(8)꿀보다 더 단 것-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인위적인 일들에서 만족을 찾지 않는다. 말씀이 그의 영적인 식욕을 만족시킨다(시 119:103 참조).성경이 하는 일

(1)개심하게 한다-이 말은 시편 23편 3절에 나오는 “소생시킨다“와 같은 말이다. 말씀은 죄인을 자기의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며, 성도를 그 방황하는 자리에서 회복시킨다. 말씀은 그를 새롭게 하며 치료한다.

(2)지혜롭게 한다(시 119:37-104/사 8:20/렘 8:9/골 1:9/약 1:5 참조).

(3)기뻐하게 한다-영적인 신자들은 말씀에서 기쁨을 발견한다(렘 15:16 참조).

(4)깨닫게 한다-“주의 말씀을 열므로...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참조).

(5)견디게 한다-다른 책들은 시들어가고 잊혀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견딘다.

(6)부요하게 한다-금과 은보다 낫다(잠 3:13-15 참조).

(7)만족을 준다-꿀은 몸에 만족을 준다. 말씀은 영혼에 만족을 준다.

(8)경고한다-죄를 고백하고 실수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죄를 예방하고 피하는 편이 낫다. 말씀을 알고 거기 순종하는 것은 신자를 안전한 길로 안내한다(잠 2장 참조).

(9)보상한다-돈으로는 경건한 생활이 가져다 주는 정결한 양심, 순전한 마음, 기쁨, 평화, 응답받는 기도 등의 보상을 살 수 없다. 11절은 말씀을 지키는 것안에 보상이 들어있으며, 말씀을 지켰다고 해서 상을 주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상은 행함을 통하여 온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참조).

 

3. 영혼을 통하여 말씀하심(12-14절)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다(렘 17:9 참조).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죄를 나타낼 말씀의 거울이 필요하다(약 1:22-25 참조). 시편 기자는 자신의 숨겨진 죄를 나타내달라고 하나님께 구함으로 끝을 맺는다(시 139:23-24 참조), 구약 율법은 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제공된 것이다(레 4, 5장/민15;22 이하 참조). 그러나 공개적인 도전과 반역의 죄에 대해서는 대신 희생해주는 것이 없었다(민 15:30-31). 시편 기자는 은밀한 잘못들을 정결케 해달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인 죄로 내달리는 일이 없도록 막아달라고 하였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죄를 향한 이와 같은 종류의 사악한 자포자기는 노예로 떨어지게 하며 죄가 삶의 주인이 되게 한다. 로마서 6장은 “죄가 우리를 주장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주장하여 죄를 극복할 때 이루어진다. 13절에 나오는 “큰 죄“는 “죽음에 이르는 죄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반복된 반역을 뜻하는 것 같다. 13절에 나오는 작고 은밀한 죄들이 축적될 때 사람은 점차적으로 큰 죄에 빠져들어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즉시 고백하고,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을 정결케 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4절의 기도는 종일토록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마음의 묵상은 입의 말을 조절한다(막 7:14-23 참조). 여기서 “묵상“이라는 단어는 하프의 줄을 튕기는 음악가의 이미지를 전해 준다. 누가 우리의 마음의 음악을 조절하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단인가? 몸에 소화기능이 있듯이 마음에는 묵상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속 사람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음과 정신이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성령은 생활을 인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며(갈 5:16 참조) 영의 생각을 갖는다는 뜻이다(롬 8:1-8 참조).

당신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로서 받아들여져 있는가? 이 시편을 다시 읽고 하나님께 말씀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살며, 말씀에 순종할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다."

 

▣ 목자의 시-시편 22, 23, 24편

 

이 잘 알려지고 사랑받는 세 편의 시는 각기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어 다른 면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를 목자로 제시한다. 다음과 같이 대조해볼 수 있다.

 

시편 22편:

●선한 목자(요 10:11)

●십자가상에서의 과거 사역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은혜

●죄의 형벌을 치름

●구세주의 십자가

 

시편 23편:

●큰목자(히 13:20-21)

●보좌에서의 현재 사역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리스도-능력

●죄의 권세를 극복함

●목자의 지팡이

 

시편 24편:

●목자장(벧전 5:4)

●왕국에서의 미래 사역

●우리를 위해 오실 그리스도-영광

●죄의 면전에서 벗어남

●절대주권자의 면류관

 

1. 선한 목자(22편)

이 놀라운 시편의 1-2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22-31절에서는 그의 부활을 제시한다. 다윗 시대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몰랐기 때문에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일에 대한 이같은 생생한 설명은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기록될 수 없는 것이다. 본 시편의 두 부분을 대조하는 일은 중요하다.

1-21절 22-23절

고난-십자가에 달리심 영광-부활

고통과 기도 찬양과 약속

원수들 가운데 교회가운에서(히 2:11-12)신약에 나오는 십자가의 이야기에서 본 장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1절: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셨다(마 27:46/막 15:34).

●2절: 빛과 어두움이 교체되었다(마 27:45).

●6-8절: 사람들이 수치 중에 매달려 있는 그리스도를 비난하였다(마 27:39-44/막 15:25)이하). “나는 벌레요“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말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겸손하셔야 했던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11-12절: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베풀어지지 않았다(마 26:56). 9-10절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탄생하셨으며, 인간의 어머니(마리아)는 있었으나 인간 아버지는 없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처녀탄생에 대한 구약의 예시이다.

●16절: 주님은 손과 발을 찔리셨다(마 27:35). “개들“이 이방인들(로마인들)을 가리키는 것에 유의하자. 12절에 나오는 “소“는 유대인을 의미할 것이다.

●17절: 그는 벌거벗음과 수치를 당하셨다(요 19:36). 18절에서 우리는 옷을 제비뽑는 것을 본다(요 19:23-24/마 27:35).

●20절: “낸 사랑“, “유일한 것“은 유일한 아들을 가리킨다(창 22:2).

●22절 이하: 이제 장면이 바뀌어 부활로 이동한다. 히브리서 2장 11-12절에서 이에 대한 신약의 설명을 찾아 보라. 그리스도는 더이상 십자가에 계시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주님의 형제(교회)들 가운데 계시다. 24절은 히브리서 5장 7절과 연관하여 읽어야 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교회에서(22절), 이스라엘에서(23-26절) 이방인들 중에서의(27-31절)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31절은 “그가 행하셨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취되었다."

 

2. 위대한 목자(23편)

히브리서 13장 20-21절은 예수께서 오늘날 양을 돌보시는 “큰 목자“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리는 주님의 양이며 우리가 그를 따를 때 그는 우리를 돌보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단지 돌아가신 것만이 아니라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살고 계시다. 그는 큰 목자이시며 큰 대제사장이시다.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는 말은 23편의 주제이다. 쉼과 새로워짐에 있어서(2절), 회복과 의(3절)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을 때의 보호(4절), 광야에서의 예비(5절), 사는 날이 끝날 때에 가야 할 집(6절),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다.

물론, 여기에서는 동양의 목자와 양떼를 말한다. 이 목자들은 양들에게 매우 절친하여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서 안다. 목자는 양들 앞에 가면서 그들이 위험한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준다(요 10:27-28 참조).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는 한 결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을 보호할 것이며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위험한 골짜기로 갈지라도(4절) 목자가 그들 곁에 있다. 골짜기 너머에는 안식의 집이 있다. 날이 저물면 목자는 양떼를 인도하여 우리로 데리고 돌아갈 것이며, 양들이 들어갈 때에 문옆에 서서 양들을 검사할 것이다. 상처를 입었거나 연약한 양을 보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원기를 되찾게 하는 기름을 바르고 치료한다. 우리의 목자가 우리를 돌보시는 것은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들은 모두 이 시에 나온다. 여호와이레(“주께서 준비하신다“/창 22:13-14), 여호와라파(“여호와께서 치료하시며 회복시키실 것이다“/ 출 15:26), 여호와살롬(“주는 우리의 평화“/ 6:24), 여호와치드케누(“주는 우리의 의“/ 렘 23:6), 여호와 삼마(“주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 여호와 닛시(“주는 우리의 깃발“/ 출 17:8-15), 여호와 라(“주는 나의 목자“/ 시 23:1) 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양에게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어린 아이들이 이 시를 잘못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니 무엇을 더 원할 것인가?“"

 

3. 목자장(24편)

유대의 전설에 의하면 이 시는 다윗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시는 아마도 합창대와 독창하는 사람들이 서로 화답하며 불러진 듯하다. 합창대가 1-2절을, 독창은 이에 응답하여 3절을, 그리고 또다른 독창하는 사람이 4절을 부르면 합창이 7절을 부르고, 또 한 사람이 “영광의 왕이 누구냐?“라고 외치면 합창이 8-9절로 응답한다. 한 목소리가 다시 “영광의 이 왕이 누구냐?“라고 하면 이 모두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영광의 왕이시로다“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굉장한 광경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다윗의 보좌를 요구하실 때 예루살렘에서는 더 큰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왕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계 19:11-16 참조). 현재의 이 땅은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속한 것이긴 하지만 죄와 사단의 주권 아래 아직 그 속박으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어느 날 예수께서 자기의 유업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땅에 돌아오시는 일이다. 그 때에 이 땅은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찰 것이다.

3절에 있는 질문은 중요하다. “누가 시온산에서 땅을 통치할 만한가 ?“ 이 질문은 요한계시록 5장에 나와 있는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누가 이 책을 열고 인을 뗄 만한가?“ 대답은 한 가지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시편 24편 4절은 주님을 완전한 인간, 완전한 왕으로 묘사한다. 다윗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깨끗한 손을 가지지 못하였고, 육욕에 빠져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순전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였다. 다윗은 백성을 계수하였을 때 헛되고 교만한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높이 들어 올렸다. 솔로몬왕도 우상 숭배로 인하여 자격이 없었고, 히스기야 대왕조차도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였다. 자격이 있는 유일한 왕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요구하실 때, 그는 전쟁에서 나오는 능한 왕으로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마겟돈에서 세상의 나라들을 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계 19:19-21 참조).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미 그가 다윗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 약속되었다(눅 1:30-33 참조). 오늘날 그는 그의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계 3:21), 그가 심판과 영광 중에서 돌아 오실 때 그는 다윗의 보좌를 요구하실 것이며 야곱의 집을 다스리실 것이다. 물론 그는 먼저 교회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공중에 임하실 것이다(살전 4:13-18 참조). 다음으로는 이 땅에 무서운 7년 대 환란이 있을 것인데, “야곱의 시련의 때“이다. 사단과 그의 조력자들이 최악의 발악을 할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돌아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은 새롭게 되고 이스라엘은 회복되며 1,000년 동안 의로운 왕국이 있을 것이다(계 20:1-5 참조).

그리스도가 당신의 선한 목자이시며, 당신이 그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그로 하여금 당신의 큰 목자가 되게 하여 당신의 삶을 안내하고 축복하시게 하라. 그러면 그가 목자장으로 돌아오실 때 당신은 그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 고백시-시편 32, 51편

 

이 시들의 배경은 사무엘하 11-12장에 나온다. 이 시들은 주의깊게 읽혀져야 한다. 다윗은 자기 이웃의 아내에게 육욕을 품고 간음을 하였으며, 그 남편을 술취하게 하였고 살해하였으며, 최소한 일 년 동안 이 모든 일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이 죄를 범할 때는 젊은이가 아니었으며 성숙한 사람으로서, 광대한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편 51편은 다윗의 고백시이며 시편 32편은 용서의 노래이다. 요한일서 1장 5절-2장 2절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정결함을 받을 대책을 알려 준다.

 

1. 다윗의 고백 기도(51편)

이 기도는 매우 개인적인 기도이다. “나“라는 말과 “나의 죄“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에 유의하자. 그의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 주님을 보고 있다.

죄를 범한 댓가-육욕에 빠져 간음을 저지른 것은 순간적인 행위인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이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 시편 32편 3-4절에서 다윗이 죄에 대해 육체적으로 값을 치루어 병이 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댓가 역시 컸다. 마음의 순전함을 잃었으며(1-2절), 따라서 씻음을 받고 정결해질 필요가 있었다(7절). 여기서 죄에 대하여 쓰여진 단어들을 눈여겨 보자. “죄과“란 반역하는 행위나,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을 지나치는 것을 의미하며 “죄악“은 내적으로 굽어있음을 뜻한다. “죄“는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17절은 다윗의 마음이 더러워졌을 뿐 아니라 굳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마음이 굳어진다. 다윗의 눈 또한 병들었고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죄뿐이었다(3절). 더러운 양심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을까를 궁금해 하며 방어적인 사람이 된다. 죄는 또한 귀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8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유익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다윗의 입술도 병이 났다. 더이상 간증을 하거나 전도를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었다(13-15절). 고백하지 않은 죄만큼 그리스도인의 입을 막는 것은 없다. 다윗의 정신이 병들었다. 그는 지혜를 구해야했다(6절). 속 사람(마음과 영/ 10절)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11절) 기쁨이 없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성령을 가져가시는 것은 아니다(요 14:16 참조).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이에 따라 그와의 교제와 축복을 잃게 된다(엡 4:30-32). 우리는 죄를 범한데 대한 높은 댓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죄를 고백한 댓가-죄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일에는 회개가 내포되어 있으며, 마음의 진지한 변화를 말한다. 다윗이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의 죄를 가지고 대면하자 다윗의 마음은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였다. 죄를 시인하는 것과 죄를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고백이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요일 1:9).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똑같이 말한다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시인하는 자리에 이르렀다(5절). 오늘날에는 값싼 고백이 너무도 많다. 입술로만 “주여, 나는 죄를 범하였나이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고백이 아니다. 참된 고백은 상한 심령과 깊이 뉘우치는 마음(17절) 등의 값을 치루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고행을 행하여 용서를 얻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심히 상하여 하나님께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정결케 하는 죄의 댓가-선한 행위가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종교적인 행위나 희생제사도 죄를 씻지는 못한다(16-17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 낼 수있다(히 10:1-18/요일 1:7-2:2 참조). 용서란 값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나 눈물로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내시고 완전히 깨끗하게 하시기를 즐겨하신다(1, 9절/ 사 43:25). 죄를 씻기 위하여 지불한 높은 댓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며 죄에서 돌리키도록 경고한다.

 

2.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에 대한 다윗의 찬양(32편)

처음의 두 구절은 바울이 로마서 4장 7-8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꼭 읽어 보라. “오, 그 반역이 용서를 받고, 가리워짐을 받는 자의 복됨이여!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그의 영혼에는 속임수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도다!“ 다윗은 이 모든 죄를 범했다. 그는 율법에 반역하여 불법을 행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표준에 접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뚤어진 본성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하였으며, 이 모두 일들을 일 년 동안 덮어 두어 속였다. 잠언 28장 13절을 읽고 다윗의 경우에 적용해 보라.뉘우침에 대한 침묵(3-4절)-다윗이 자기의 죄를 시인하지 않고 고백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고난을 당하였다. 다윗은 51편에서 볼수 있듯이 영적으로 고난을 받았으며 육체적으로도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늙은 사람처럼 되었다. 죄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손이 밤낮 그를 무겁게 눌렀다. 그는 가물 때의 시내처럼 “말라 붙었다.“ 자신의 증세를 보이려고 의사에게 가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보여야 할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은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고백하지 않은 죄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고전 11:23-32 참조).

고백의 흐느낌(5절)-문자 그대로 말하면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기 시작하리라“가 된다. 다윗은 나단이 그에게 말했을 때 즉시로 죄를 고백하였다(삼하 12:13 참조). 그 때 그는 자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의 죄를 하나씩 벗겨내도록 허락하였다. 다윗의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죄를 특별하게 고백하였다. 그가 고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한 나이 많은 작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이 자신을 조금 사용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을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참조)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미안한 생각을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기도한다 해서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므로,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고 십자가에서와 같이 의로우시므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대신하여 지불하신 죄들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시지 않으신다(롬 8:31-39 참조).

죄씻음의 노래(6-7절)-다윗의 탄식은 노래로 대치되었다. 그는 “구원의 노래들“에 둘러 싸여 있어서 어디를 보아서도 노래할 만한 이유들을 찾아내었다. 전에는 어디를 보아도 자기의 죄가 보였었다(51:3). 다윗은 우리가 찾을 만한 때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죄를 발견하였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만한 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사 55:6-7 참조). 만일 우리가 죄를 그대로 버려둔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징계하실 수밖에 없다(히 12장 참조). 다윗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문제가 닥치려면 닥치게 하자. 그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확신의 외침(8-11절)-하나님은 이제 다윗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그의 길을 인도하시겠다고 확신시키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시 23:3). 하나님은 무거운 막대기가 아니라 그의 눈으로 우리를 안내하시기를 원하신다. 순종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얼굴, 특히 그의 눈을 지켜보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하나님의 시야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9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 극단적인 예로서, 충동적으로 앞으로 내달리는 말과 고집스럽게 다리를 버티고 있는 노새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들 중의 어느 하나도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에 찬 순종으로 한 번에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행해야 한다. 말과 노새들은 채찍과 굴레로 조절을 당해야 하고 그렇지 않고서는 가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슬프게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절할 수 있기 전에 “채찍과 굴레“를 써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정상적인 방법은 우리를 향한 그의 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들은 이해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엡 5:15-17 참조).

그리스도인이 회복된 후에는 사단은 그의 평화와 확신을 해치려고 노력한다. 신자들은 과거의 죄들과 그 무서운 결과들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불순종에는 씁쓸한 열매들이 있다. 다윗은 어떻게 이들을 발견하였던가! 그러나 10-11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주신다. 사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고, 슬픔은 불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있다. 그러나 깨끗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인애와 자비를 경험한다. 다윗이 큰 소리를 외치면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는 용서를 받았으며 현재는 즐겁다. 그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 크리스마스의 시-시편 40편

 

이 시는 “크리스마스의 시“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내다보는 시이기 때문이다. 6-8절은 히브리서 10장 5-10절에서 인용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역사적으로는 다윗의 생애에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에 이 시가 씌어졌다. 그는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서 하나님께 소리쳐 외쳤고 하나님은 그를 구원해 내셨다. 전반부에서(1-10절)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증하며 자신을 주님께 새로이 헌신함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끝맺는 구절들에서(11-17절) 다윗은 그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적들로 말미암아 더욱 도움을 베풀어 주실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 17절은 참으로 힘있는 구절이다.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신다.“ “너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 주께서 너희를 권고(돌봄)하시니라“. 이 시는 메시야에 대한 시(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시)이기 때문에 우리는 특히 이러한 면으로 연구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탄생(6-7절)

히브리서 10장 1-18절을 주의깊게 읽자. 그 장은 죄를 씻어 버릴 수 없는 모든 히브리의 희생제사를 제쳐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5-9절에서 기자는 이러한 희생제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서는 육신의 옷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다(물론 죄가 없으시다). 그가 세상에 오셨을 때, 아들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가 왔나이다. 책들은(구약 예언서들) 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5절은 시편 40편 6절을 조금 다르게 인용하고 있다. “당신이 내 귀를 여셨나이다“는 말대신 “당신은 나를 위하여 몸을 준비하셨나이다“로 하였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동일한 성령께서 그가 뜻하시는 대로 말씀을 확대하시거나 설명하실 수 있으시다.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비된 몸을 통하여 오셨다. 즉,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눅 1:26-38 참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데는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다. 즉, 아담의 경우와 같이 흙으로부터 만드심과, 하와와 같이 남자에게서 만드신 방법(창 2:21-25), 일반적인 출생과 같이 여자와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만드신 방법과 그리스도의 출생처럼 남자 없이 여자에게서 만드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준비된 몸을 통하여 오셨으며 그 몸은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몸이 아니었다. 비록 그가 죄가 아닌 육신적인 연약함(배고픔, 고통, 피로함 등)을 느끼셨지만 육신의 죄악된 연약함에 참여하신 일은 없으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는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그는 세상의 구세주가 될 수 없으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1장 1-6절과 이사야 50장 2절을 보자. 구약의 유대인은 그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종에게 귀를 뚫게 했다. 이것은 헌신의 아름다운 상징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도 유의하자. 첫번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 있으며,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남자의 씨가 아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으로 오셨다)이 사단의 씨를 패배시킬 것임을 알리셨다. 하나님은 구세주가 유대인을 통하여 오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알리셨으며, 나중에는 유다 지파를 통하여 오실 것을 덧붙이셨다. 이사야 7장 14절은 동정녀 탄생을, 미가 5장 2절은 그가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을 알려 준다.

 

2. 그리스도의 생애(8-10절)

이 구절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아름답게 요약하고 있다. 그는 말씀을 사랑하셨고 말씀에 따라 생활하셨으며,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다.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 죄가 있다고 고발할 수가 없었다(요 8:46 참조). 유대인들은 그를 재판할 때에 거짓 증거를 대기 위하여 거짓말장이들을 고용하였다.

가룟 유다조차 그리스도를 고발하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댈 수 있었을 터이나, 주님께 죄가 없음을 시인하였다(마 27:1-5 참조). 예수님은 말씀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8:23 참조). 그의 생활과 입술은 여호와의 의와 자비하심을 영화롭게 하였다.

 

3. 그리스도의 죽음(6절)

주님은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물이 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셨다.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동물의 피가 죄를 깨끗이 씻어 준다고 말하지 않는다(삼상 15:22/시 51:16-17/호 6:6/미 6:6-7 참조).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바라보는 대신 동물을 신뢰하였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구원에 대하여 세례(침례)나 또는 교인의식에 의존하고 있는가! 6절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제물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즉, 희생제물은 어떤 종류이든 피가 있는 제물을 의미하고, 예물은 피가 없는 것으로서, 소제와 같은 것이다. 또한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하며, 속죄제는 개인적인 죄를 다룬다.

구약의 모든 제사가(레 1-5장에 요약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번제는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항복하는) 것으로서 “나는 주의 뜻을 행하는것을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소제(레 2장)는 주님의 완전한 본성을 예증하는 것이며 영혼에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에게 공급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화목제(레 3장)는 죄인과 구세주 사이에 생겨난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징하며, 이 평화는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것이다(골 1:20/고후 5:18 참조). 속죄제(레 4장)는 우리의 본성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반면 속건죄(레 5장)는 우리가 범한 죄를 다룬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주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본성을 정죄하셨으며, 이로써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게 하셨다(롬 6-8장 참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모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단번의 제사로써 죄의 문제를 완전히, 영원히 해결하셨다. 수 천만의 어린 양과 염소들이 수 세기를 거쳐오며 할 수 없었던 일을 십자가 상에서의 짧은 여섯 시간 동안에 이루셨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이신가!

 

4. 그리스도의 부활(1-3절)

이 구절들은 어떤 문제로부터 다윗이 구원받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아름다운 상징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의 구덩이로 내려가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입으셨다(벧전 2:24/고후 5:21 참조). 예수께서 그의 죄없으신 몸에 전 시대의,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음을 생각할 때, “혹독한 구덩이“였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구덩이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겟세마네와 갈보리의 공포가 어떠했을 것임을 말해 주며, 예수께서 “죽음에서 건져냄을 받고자“ 기도하셨음을 알린다(그는 죽으러 오셨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기도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이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죽은 자들에게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부활하셔서 더이상 죽지 않으신다. 그의 사역은 끝났으며 그의 발은 반석 위에 있다. 새로운 노래는 승리를 노래하며 하나님께 찬양한다(시 22:22-25/시 40:9-10 참조). 주님은 모든 원수들을 자기의 발 아래 두고 계신다.

 

● 시편 41편: 역시 메시야에 관한 시이다. 왜냐하면 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에 대한 관련성구를 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이 말이 성취되고 있다. 시편 41편은 압살롬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왕국을 탈취하려고 할 때 다윗이 쓴 시이다(삼하 15-18장 참조). 아히도벨은 다윗이 신임하는 고문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압살롬의 편을 가담하였다(삼하 15:31 참조).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현명하게 충고를 했으나 이 젊은이는 그의 진언을 따르지 않았다(이것은 다윗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의 의견이 거절되자 그는 밖으로 나가 목을 매었다(삼하 17:23 참조). 유다와 같다. 사실상 아히도벨은 유다에 대한 구약의 예증이다. 그는 다윗과 가까운 친구였으며 신임받는 관리였다(유다는 제자들의 재정을 맡았었다). 그는 다윗이 그의 손녀 밧세바를 망쳐 놓았으므로 다윗에 대하여 은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삼하 11:3/삼하 23:34 참조). 그는 원수와 거래하며(삼하 15:12) 싸울 병력을 요청하였고(삼하 17:1),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 하나님의 말씀-시편 119편

 

이 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특이하다. 이 시는 가장 긴 시이며(176절) 또한 각 행의 첫 글자를 맞춘 시이다. 성경의 번역판들이 많지만 그 대부분에서 본 시는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22절씩 된 부분이 연속하여 나온다(알레프부분, 테트부분, 김멜부분 등). 히브리성경에서는 각 부분의 첫 절이 히브리 알파벳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면 “알레프“부분(1-8절)의 각 줄은 모두 알레프로 시작된다. “테트“부분을 살펴볼 때(65-72절), 67절을 “Til“로 시작하고 71절을 “Tis“로 바꾸어 시작한다면 각 줄 모두가 영어 문자 “T“로 시작하게 된다(히브리어의 “테트“와 같다). 유대인들은 암송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이와같은 방법으로 썼다. 시편 119편을 암송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본 시를 쓴 사람은 자신을 325회나 말하고 있지만,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므로써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22, 50-53, 95, 98, 115절)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다. 세 구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경을 말하고 있다(84, 9, 132절). 하나님은 각 구절마다 언급되어 있다. 본 시는 8이란 숫자에 맞추어져 있다. 각 부분은 여덟 구절로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일컫는 여덟 가지 목록과 여덟 가지의 말씀에 대한 상징, 말씀에 대한 여덟 가지 신자들의 책임이 있다. 히브리어에서 8이란 수는 “풍성함, 충분한 것보다 많은“의 뜻이다. 8은 부활의 수이다(안식일 다음 날, 제 8일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다. 성경이 있으면 당신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 살아 있는, 말씀이시다. 어떤 의미에서 시편 119편은 시편 19편 7-11절을 확대한 것이다. 본 시의 첫 아홉 구절들 가운데서 성경의 주된 명칭 여덟 개가 나오는 것을 살펴보자. 여호와의 율법(1절), 증거(2절), 도(3절), 법도(4절), 율례(5절), 계명(6절), 판단(7절), 말씀(9절) 등, 이러한 말들은 이 시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1. 성경은 무엇인가?

깨끗하게 하는 물(9절)-이 전체 부분(9-16절)은 죄를 이긴 승리를 다룬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간직하고 암송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읽을 때에 그에 대하여 묵상하라. 말씀은 속 사람을 정화시킨다. 이는 물이 몸을 정결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요 15:3/엡 5:25-27 참조).

부와 보물(14, 72, 127, 162절)-가격과 가치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실제로 성경은 구입 가격은 대단치 않을 것이지만, 참으로 놀라운 보물창고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그리고 무엇으로 대치할 수 있는가?

동료와 친구(24절)-그는 객이었고(19절), 교만한 자들에게 거절당하였으며(21절), 방백들도 그를 거절하였다(23절). 그러나 그는 언제나 말씀으로 그의 고문이 되게 하였다(잠 6:20-22 참조).

노래(54절)-율례로부터 흘러 나오는 노래를 상상해 보라. 인생은 순례의 길이다. 우리는 거주자가 아니라 “여행자“이다. 세상의 노래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노래가 된다.

꿀(103절)-말씀의 맛은 달다. 그리스도인이 만족을 얻기 위하여 세상의 “꿀“을 소유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시 34:8/벧전 2:7/욥 23:12 참조).

등불(105, 130절)-세상은 어두우며 성경만이 의존하고 믿을 만한 빛이다(벧후 1:19-21 참조). 성경은 우리가 순종함으로 행할 때에 한 번에 한 걸음씩 인도한다. 요한일서 1장 5-10절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빛가운데서 행함을 말해 준다.

많은 탈취물(162절)-가난한 군인들이 적을 무찌른 다음에 탈취물로 말미암아 부유해진다. 말씀의 부요함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사단과 육신에 대한 영적인 전투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있는 전쟁이다(눅 11:14-23 참조).

기업(111절)-성경은 얼마나 귀중한 유업인가!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유업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2. 성경이 하는 일

축복한다(1-2절)-성경은 축복을 지닌 책이다(시 1:1-3 참조).

생명을 준다(25, 37, 40, 50, 88, 93절)-“소생시킨다“는 말은 “생명을 준다“는 말이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는 우리가 말씀을 믿을 때에 영원한 생명을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히 4:12). 또한 말씀은 우리가 연약하고, 용기를 잃고, 좌절했을 때 우리를 소생시킨다.

힘을 준다(28절)-말씀을 신뢰할 때 우리는 격려를 받는다(마 4:4/신 33:25 참조).

자유를 준다(45절)-이것은 자유를 주는 법이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 하지만(133절),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요 8:32).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

지혜롭게 한다(66, 97-104절)-사람들은 다른 책에서 지식과 사실들을 얻는다. 그러나 참된 영적인 지혜는 성경에서 발견된다. 97-104절에는 원수, 선생, 노인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얻을 수 있음을 제시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유익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성경의 지식이 있다. 선생들은 책을 통하여 지식을 얻으며, 연로한 자들은 경험으로 지식을 얻는다. 이 둘은 다 존경을 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성경을 떠나서는 온전하지 못하다.

친구들을 만든다(63절)-성경을 알고 순종하면 가장 훌륭한 친구들에게로 인도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된 친구들이다. 세상적인 지혜와 부로써 현혹시키는 잘못된 친구들이 있으나, 그들의 우정은 우리를 곁길로 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성경에 “밀접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31절).

위로를 준다(50, 76, 82, 92절)-이 시편 중에서 60절 이상은 시련과 박해를 언급한다(22, 50-53, 95, 115절 등). 말씀에 순종하려는 신자는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게 지속적인 위로를 준다. 위로자이신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에 적용시켜 우리를 위로하신다.

방향을 제시한다(133절)-행한다(걷는다)라는 단어가 시편 119편에 여러 번 사용된다. 말씀은 걸을 때나 달릴 때에 우리의 발걸음의 방향을 정해 준다(32절). 35절과 116-117절에 있는 기도들을 눈여겨 보자.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고자 기도할 때에 여호와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응답하신다!

 

3. 우리가 성경으로 해야 하는 일

사랑하라(97, 159절)-당신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곧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말씀은 즐거움이며(16, 24 35, 47, 70절), 실망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는 것을 기뻐한다(14, 162절).

존중하라(72, 128절)-성경을 높이 평가하고 굳게 붙드는 것은 참된 성도의 표시이다.

연구하라(7, 12, 18, 26-27절)-최소한 12회 이상 시편 기자는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한다. 성경을 매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성경 연구가 언제나 쉽지만은 않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전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2, 10, 34, 69, 145절). 우리는 다른 책들을 읽고 죄악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그럴 수 없다. 성경연구보다도 이 세상이나 영원 세상에서 더욱 큰 보상을 받을 만한 연구 대상은 없다.

암기하라(11절)-“최고의 목적을 위하여 최고의 위치에 있는 최상의 책이다!“ 젊은 사람들이나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말씀을 암기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율법을 암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젊은이가 아니었다(수 1:8 참조). 한 주일에 한 구절을 학습한다는 것은 그 얻는 유익을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그들 마음의 보물 창고에 새로운 구절들을 간직할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묵상하라(15, 23, 48, 78, 97, 99, 148절)-몸에는 소화 기능이 있듯이 영혼에는 묵상이 있다. 묵상한다는 것은 마음과 정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친다“는 뜻이다. 말씀을 검토하고 성경 구절들을 비교하며 그 놀라운 진리들을 “공급받는“ 것이다. 이 소란하고 혼란한 시대에 있어서 묵상이란 어려운 일이다. 암기하지 않으면 묵상은 불가능하다.

신뢰하라(42절)-매사에 말씀을 신뢰하라(128절). 성경은 진실하며,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성경과 더불어 논쟁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이다.

순종하라(1-8절)-말씀을 지킨다(유지한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명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선포하라(13, 26절)-순종할 때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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