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구약성서개론] 개관

[스크랩] 욥기 - 개론

好學 2011. 5. 7. 22:16

 

욥기 - 개론

 

 

욥기-서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욥기의 처음 두 장과 마지막 장의 극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별로 이용하지 않는다. 나머지 부분은 긴 연설을 모아 놓은 것 같으며, 어느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화일 것이다. 그러나 욥기를 주의깊게 읽어 보면 그 전하는 내용이 매우 근대적이며 창세 이래 신자들이 직면해 온 한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욥기: 욥기서를 연구할 때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자.

(1)이 책은 동양사람들의 사상과 표현들로 채워진 동양의 책이다.

(2)이 책은 시적인 책이다(1-2장/ 42:7-27 제외). 그리고 히브리 시는 우리의 시와는 전혀 다르다.

(3)이 책은 하나의 어려운 문제, 즉 “왜 하나님은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는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 때문에 욥기서는 읽고 해석하기에 난해하다. 그러나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 인물: 욥은 이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시에 등장하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라 역사에 나오는 실제 인물이다. 에스겔이 그의 이름을 말하며(14:14-20), 야고보도 그의 이름을 들춘다(5:11). 욥은 경건한 사람이며 부자이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그에게 그처럼 혹독한 많은 시련을 경험케 하시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당황했던 사람이다.

 

● 주제: 가장 단순하게 주제를 밝힌다면 욥기는 오랜 세대를 두고 내려오는 의문을 주제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왜 경건한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가?“ 며칠 사이에 욥은 그의 사업과 부와, 아내를 제외한 가족과 건강을 잃었다! 이러한 일이 왜 생겼을까?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이 실제로 위선자였으며, 그의 생활에 숨겨진 죄가 있어서 여호와께서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이 문제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욥은 숨겨진 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리하여 논쟁이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욥을 해칠 이유가 없다고 2장 3절에서 친히 언급하고 계심에 유의하라! 42장 7절에서는 세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사실이 아닌 말을 한 것에 대해 문책하신다! 욥은 그의 생활에서 더욱 향상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우리들 모두가 그렇듯이), 욥이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다. 종국에 가서 그는 향상되어야 할 여지가 있음을 시인하였다(42:1-6).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빠져 고집을 부리는 자녀들에게 징계를 가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히 12:1-13). 그리고 이러한 징계는 그의 사랑의 증거이다. 사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즐기며 살지만 곧 베임을 받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시 37편 / 73편). 그러므로 신자가 기다리노라면 상받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욥의 생애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못한다. 그는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의 생활 가운데는 징계의 필요성이 없었다. 물론 하나님은 욥이 고난을 당하게 하심에 있어서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그 한 가지 실례로서 사단과 천사들에게 욥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보이셨다. 천사들이 성도들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배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원 세계에서만 알 수 있을 것이다(엡 3:9-10/벧전 1:12 참조). 하지만 욥기의 핵심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다루심에 있어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순종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는 그에게 유익이 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일은 생기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우리에게 반드시 설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그의 친구들: 여기에는 다른 네 사람이 개입되는데, 모두 욥의 친구들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은 수 개월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임을 명심하자(7:3). 친구들과 이웃들은 욥의 경우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6:15/12:4/16:10/17:1-9).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먼저 말을 했는데 그의 생각은 모두 그가 어느 날 밤에 경험한 “영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다(4:12-16). 빌닷은 “지혜의 말들“을 알고 있는 “전통주의자“로서 욥의 경우를 그 말들에 적용시키려 하고 있었다. 엘리바스처럼 그도 역시 욥이 위선자라고 믿고 있었다. 소발은 매우 독설적이며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들은 욥에게 논쟁적으로 말하였고 욥도 역시 이를 받아 논쟁하였다.

종국에 가서 한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는데(32-37장), 이 사람 엘리후는 젊은이였으며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기에 앞서 연장자들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많은 세 사람이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고 사악한 사람을 벌하신다고 주장한 반면,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자기의 뜻에 따라 의로운 사람을 징계(형벌이 아님)하실 때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욥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를 의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심판관적이고 비판적이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엘리후의 위대한 발언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으셨다.

 

● 인내의 축복: 어떤 의미에서 욥기는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 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주고 있지 않다. 물론 욥은 시련을 겪고 난 후에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며, 우리가 주님께 순복하고 헌신하는 한, 고난은 정화시키는 효력을 줄 수가 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은 욥을 그 인내로 말미암아 추천하고 있다. 인내(견딤)는 시련 가운데서의 충성을 뜻한다. 이 말을 “참다“라고 번역하면 오해할 수가 있다. 욥은 분명히 그의 친구들과 환경들에 대해 참지 못해 했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고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함을 입증해 주시리라 믿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이 책의 가장 큰 교훈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그의 뜻에 대하여 우리에게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며(롬 8:28), 그의 뜻이라면 더이상 문제삼을 것이 없다.

 

욥기 개요

 

1. 욥의 재난/1-3장

그의 재산/1장 1-5절

그의 불행/1장 6절-2장 13절

그의 당황/3장

2. 욥의 변호/ 4-37장

일회전 / 4-14장

(1)엘리바스:4-5장/ 욥의 대답:6-7장

(2)빌닷:8장/ 욥의 대답:9-10장

(3)소발:11장/ 욥의 대답:12-14장

이회전 /15-21장

(1)엘리바스:15장/ 욥의 대답:16-17장

(2)빌닷:18장/ 욥의 대답:19-20장

(3)소발:20장/ 욥의 대답:21장

삼회전 /23-37장

(1)엘리바스:22장/ 욥의 대답:23-24장

(2)빌닷:25장/ 욥의 대답:26-31장

(3)엘리후:32-37장

3. 욥의 구원/ 38-42장

하나님 이 욥을 겸손케 하심 / 38장 1절-42장 6절(40:3-5/42:1-6 참조)

하나님 이 욥을 영예롭게 하심 /42장 7-17절

(1)하나님이 그의 비판자들을 문책하심 / 42장 7-10절

(2)하나님이 그의 부를 회복시키심 /42장 11-17절"

 

욥의 재난-욥기 1-3장

 

우스 땅은 우리가 지금 아라비아 북부라고 부르는 곳인 듯하다. 동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거기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1. 욥의 재산(1:1-5)

어느 면으로 보나 욥은 부유했다. 성품도 부유하여 “완전하고 의로웠다.“ 그가 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여호와 앞에 순전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공포감으로가 아니라, 겸손하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그는 악에서 자신을 분리시켰다. 그의 가족들도 풍성하였다. 아들 일곱에 딸이 셋이었다. 동양에서는 대가족(특히 아들들)을 몹시 선호하였다. 5절에서, 욥이 그의 아들들과 딸들을 위해 영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으며, 제단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음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경건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행운이었을까? 욥의 아내는 욥이 소유했던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물론 그처럼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 하나님은 그녀가 잘못임을 입증하셨다(19:17 참조).

욥은 “소유“에 있어서도 풍족함을 이루고 있었다. 그의 가축은 수천을 헤아렸다.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신 것이 분명하며 욥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찬양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빌 4:12)라고 썼다. 우리들 대부분은 비천에 처했을 때, 그리고 일들이 제대로 안 풀릴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일들이 잘 풀려 번영할 때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기억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욥은 돈과 소유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2. 욥의 불행

사단의 첫 고발과 공격(1:6-22)-사단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계 12:7-12 참조). 하늘에서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고발한다(슥 3 장 참조). 하늘에 우리를 위한 변호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요일 2:1-2)! 욥이 모르게 하나님은 사단과 욥의 경우를 논의하였다. 만일 욥이 이러한 대화를 알았더라면 의문을 가지거나 신경을 쓸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사단의 거짓말을 꾸짖게 하는 데에 욥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늘의 회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으며 믿음으로 이 시련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사단은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이 땅을 오르내리도록 허락을 받았다(벧전 5:8-9).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은 마땅히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는 실례로서 욥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즉시로 사단은 욥을 위선자로 고발하였다. “욥이 순종하는 유일한 이유는 부자이기 때문이니, 그의 부를 취하소서, 그리하면 그는 당신의 얼굴을 저주할 것이니이다!“ 신자들은 주님이 “울타리“가 되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사단이 손을 댈 수가 없다(눅 22:31-34 참조). 사단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못하다! 사단은 전능하지 못하며 그 능력에 있어서 유한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단은 전지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번 경쟁이 어떻게 되어 갈 것인지 알았더라면 결코 대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 세상을 자기의 무릎 위에 놓고 있으나(요일 5:13) “세상에 있는 자(사단)“ 보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더욱 크시다(요일 4:4).

허락을 받자마자 사단은 욥의 소유를 공격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리고 잠깐동안에 욥은 극빈자가 되어 있었다! 사단은 욥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원수의 군대들, 불, 강한 바람과 같은 일반적인 것들을 사용하였음에 유의하자. 욥의 친구들은 이러한 일들이 사단에게서 왔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어떤 이는 불(아마도 번개)을 “하나님의 불“이라고 불렀다(1:16). 욥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그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애도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말은 하기 쉽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져가셨다“는 말은 하기가 좀 어렵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진실한 신앙이 필요하다!"

욥 2"사단의 두번째 고발과 공격(2:1-13)-욥이 믿음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하였겠는지 생각하여 보라. 사단에게는 참으로 비난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가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하나님은 사단을 상기시켰다(2:3). 그런데 사단은 그 혀로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 “나로 그의 몸을 치게 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게 하소서, 그러면 그가 어느 정도로 충성스러운지 알게 될 것이니이다.“ 하나님은 이 말을 허락하셨으나 사단에게 제한을 두셨다. 왜냐하면 사단(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사망의 권세를 가짐)은 하나님의 뜻을 지나쳐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욕창“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문둥병이나 피부병의 형태를 취한 듯하다. 어쨌든 그는 고통으로 가득 채워졌고, 그의 외모는 엉망이었으며(19:13-20) 아무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아내는 그가 고통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으며 한 순간의 불신앙으로 그의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심판을 받아 죽으라고 말하였다(9-10절)!때때로 하나님은 재앙이 우리의 생활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신다(2:10).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은 욥이 자신을 낮추는 행위에 동참하여 일주일 간 그와 함께 울면서 조용히 동정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사단이 욥의 아내와 그의 세 친구들의 말과 행동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사단은 유다와 베드로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사용하였다."

 

3. 욥의 혼란(3장)

이 장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욥은 사단이 예견한 것이나(1:11/2:5) 또는 그의 아내가 제안했던 것처럼(2:9)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 사단이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 미래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이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씌어진 것뿐이다. 욥이 저주한 것은 그의 생일이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소원한다. 태어나서 바로 죽었더라면 살아서 이러한 근심을 견뎌야 하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3-19절에 나오는 무덤에 대한 욥의 묘사는 신약에 나오는 계시를 보충해 준다. 욥은 모든 사람들, 즉 죄인들과 성도들이 똑같이 안식과 축복의 위치로 간다고 암시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들은 죽어서 형벌의 장소로 가는 반면에 신자들은 즉시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간다. “분명히 나는 이보다는 나은 것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욥은 말하고 있다. 욥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지 알지 못했다.

20-24절에서 욥은 “어째서 나같은 곤고한 사람들이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의 비참함이 무엇을 이루는가? 나는 죽고자 하여도 죽음이 오지 않는구나“라고 말한다. 고난은 무엇을 성취하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는 바로 그때 일을 한다.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후 3:7-5:9 참조). 욥은 “하나님의 결말(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약 5:11). 우리는 하늘의 법정을 비추는 희미한 빛(성경)을 소유하였으므로 주님의 목적을 알 수가 있다.

25-26절은 욥이 때때로 시련에 대하여 생각했으며 이런 일들을 직면할까봐 두려워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는 번성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자기의 부와 건강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는 놀랐었다. 그는 육신적인 안전성이나 거짓 평화 가운데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믿고 있었으며 자기의 소유를 믿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닥쳤다.“ “그가 처했던 환경에 처해보기 전에는“ 욥에 대하여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는 말자. 성공의 절정기에서 하나님을 믿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잃을 때, 그리고 우리의 고통이 이처럼 강렬할 때 우리는 죽고 싶어지며, 믿음이란 다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이 책의 어느 곳에서도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였다는 말은 없으며, 주님의능력과 거룩하심에 대하여 의심을 한 일도 없다. 사실상,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문제였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처럼 혹독한 재난을 허락하실 것인가?

경건한 사람이 죽기를 원했다고 하여 우리에게 이상할 것은 없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끈질긴 반역으로 인해 자기의 생명을 가져가 달라고 청하였다(민 11:10-15). 그리고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였을 때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왕상 19장), 요나도 죽기를 원하였다(욘 4:3). 3장에서 욥이 “왜?“라는 질문을 다섯 번 묻는 것에 유의하자(11, 12, 23절). 만일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면 욥은 고통과 근심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물어 보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조정하고 계신 것과, 이러한 사건들이 사랑의 계획의 일부이며 어느 날 하나님은 자기의 목적을 알리실 것을 믿고 있었다.

당신이 생의 시련들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심을 기억하라. 욥기 23장 10절에서 욥이 자기의 신앙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용광로 속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 중의 하나가 용광로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도 그와 함께 거기에 계신다(사 43:1-2/단 3:25 참조)."

 

욥의 변호-욥기 4-37장

 

이 장들은 너무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각 장의 내용을 상세하게 검토할 수는 없다. 만일 흠정역 성경(K. J. V)과 더불어 현대어 번역판으로 이 부분을 읽는다면 이들의 논쟁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버클리 판(Berkeley Ver-sion)이나 표준판(American Version)을 권한다.

 

1. 욥에 대한 비난

욥의 네 친구들은 그를 위로하러 와서는 비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들 각자는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말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사악한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을 주셨다. 그러므로 욥은 사악한 사람임에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생각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것은 못되었다.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무지하다.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틀 속에 적합하게 맞추려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며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세 친구들이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가지는 온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고난은 반드시 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축복으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욥이 자기의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안위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16:2).

엘리바스는 제일 먼저 말하면서 욥이 죄인이라고 논쟁을 시작한다(4:7-11). 그는 자기가 옛날에 경험한 특별한 묵시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있다(4:12-21). 따라서 우리는 엘리바스가 생의 어려운 사실들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따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빌닷은 8장 1-7절에 있는 논제를 택하여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8장 8-10절에서 그는 전통으로부터 논제를 꺼내며 자신의 논점을 지지하기 위하여 일련의 “옛 지혜의 말씀“을 꺼낸다. 소발은 11장에서 욥을 문책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 친구들은 모두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즉, 이들은 욥의 슬픔에 가담하여 그에게 동정심을 베풀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굳고 딱딱한 분“이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진리가 아니다. 또한 이들은 매우 독단적이고 교만하여 욥의 말을 듣고 자신의 이론들을 검토하려들지 않았다.인간의 고난에 대한 문제는 세 친구들이 간단히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복잡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를 범한 일이 없으시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당하셨다! 욥이나 그의 친구들은 하늘의 회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으로서 다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 사단과 천사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욥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친구들은 욥을 “지선자“라고 불렀으나(8:13/15:34/20:5/34:30), 하나님은 그를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부르셨다(1:8/2:3). 2장 3절에서 하나님은 욥을 괴롭힐 아무 까닭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셨으므로 욥은 위선자나 죄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엘리후의 발언과(38:1-2) 세 사람의 발언 내용을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42:7).

세 친구들이 욥의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 반면 엘리후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32-37장).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며 또한 가르치시기 위하여 고난을 보내신다(33:3-20/35:10-16).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한 보다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발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아름답게 지적한다(37장). 그러나, 엘리후도 욥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친구 엘리후의 “무지한 충고“에 대하여 문책하셨다(38:1-2).

 

2. 욥의 논점

각 사람의 발언에 대하여 욥은 엘리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응답을 하였다. 엘리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대답하셨다. 욥이 주장하는 점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심을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 아니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과 내 경우를 논하고 싶은데 그를 찾을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나를 변호하실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 욥이 그러한 처지에 있으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응수하는데는 큰 믿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욥의 인내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한 자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주장하였고, 욥은 악한 자들은 번영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였다! 18장에서 빌닷은 사악한 사람들의 무서운 운명을 꺼지는 빛(5-6절), 그물에 걸린 새(7-10절), 뒤를 쫓아오는 무서운 것(11-13절), 찢어진 장막(거처, 14-15절), 뿌리가 마른 나무(16-17절)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유하였다. 20장에서 소발은 사악한 자의 외적인 번영은 잠시 동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1장에서 욥은 그들의 주장을 거부하고 사악한 자들의 탁월한 건강과 부를 지적한다. 24장에서 욥은 “어째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여하셔서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으시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욥은 사악한 자들의 죄를 열거하며, 31장에서는 자신의 경건한 생활을 다시 설명한다. 세 친구들은 욥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엘리후의 장황한 발언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3. 욥의 호소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들은 욥이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의 친구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내용이다.

동정을 호소함-그의 친구들은 사랑과 이해를 보이지 않았다. 욥은 고난당하는 성도에 대한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요 9:1-3 참조). 6장에서 욥은 생에 대한 맛을 잃었으며(6-7절), 죽고 싶다(8-13절)고 말한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마치 목마를 때에 말라버린 시냇물 같다고 비유한다(14-20절). 7장에는 생의 시련과 덧없음을 몇 가지 비유로 나타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전쟁(1절), 품군(1-5절), 빠른 베틀의 북(6절), 한 호흡(7-8절), 구름(9-10절/ 약 4:13-17 참조) 등의 비유이다. 9장 25절에서 욥은 인생을 빠른 우체부(에 8:9-14 참조)로, 빠른 배로 비유한다(9:26).

하나님을 대면할 기회를 호소함-9장에서 욥은 자기의 경우를 하나님께 제시할 방법이 없다고 불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3절에서 욥은 그와 하나님 사이에 설 판결자가 있기를 호소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는 말은 “어찌 인간이 자기의 경우를 하나님 앞에 탄원할 수 있으랴“는 뜻이다.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 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안에 서신다!(딤전 2:5/요일 2:1-2/슥 3:1-/욥 16:19-22/욥 23:3 참조).

자신의 기본적인 결백에 호소함-욥은 발언할 때마다 남모르는 죄가 있음을 부인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며, 자기의 친구들이 자신을 지독하게 그릇 판단하였다고 고백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친히 욥에게 계시하셨으며 이 노인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경배하며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한다(40:3-5/42:1-6). 그러나 이것은 죄의 고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능자의 면전에서 자신의 무지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욥을 죄에 대해 고발하지는 않으셨다. 그대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국한된 작은 논쟁에 맞추려고 하는 것으로 인해 욥을 고발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친구들이 고발한 내용을 가지고 욥을 심판하지는 않으신다. 욥이 자기의 경건한 생활에 대하여 변호하는 것을 31장에서 찾아보자.하나님을 믿는 자기의 신앙에 호소함-이 점이 문제를 야기시켰다. 욥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나 하나님은 욥을 피하신 것처럼 보였다. 만일 욥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저주하였다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욥의 불신앙을 인하여 벌하신 것이라고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의지할 것이다!“(13:15) “나는 내가 의롭게 될 것을(변호될 것을, 진실로 입증될 것을) 믿는다“(13:18). 욥의 믿음은 대단히 큰 것이어서 만일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변호해 주실 것이라고 언급한다(19:25-29/14:1-14). 욥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성취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행하시는 일에 대해 욥에게 말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3장). 물론 욥이 천국의 비밀회의를 알았더라면 믿음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죽음에 호소함-4장에서 논쟁을 시작할 때부터 논쟁을 끝낼 때까지 욥은 계속해서 죽음을 청하고 있다(6:8-12/7:15-21 참조). 욥이 죽음을 원하였다 해서 너무 비판적이 되지는 말자. 그는 육신적으로 대단한 고통 가운데 있었으며 친구들과 이웃들은 그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30장).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처럼 보였다. 모세, 엘리야, 요나도 똑같은 오류에 빠졌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빌닷조차 “이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일부이다“고 시인하였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 중에서 변두리이며, 옷의 가장자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학보다 더 위대하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경배하며 신뢰할 수 있다."

 

▣ 욥의 구원-욥기 38-42장

 

이제 우리는 본 서의 절정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무대에 등장하신다! 욥은 하나님이 그와 대면하여 말씀하실 것을 요청하였는데(9:35/13:22/31:35-37), 이제 바로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이 행하신 첫번째 일은 하나님의 목적들을 어둡게 하며, 이 상황에 전혀 아무런 빛을 비추지 못한 엘리후의 헛된 생각을 쓸어버리는 것이었다(2절은 언제나 바르게만 말했다고 볼 수 없는 욥에게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하나님은 개인적인 방법으로 그의 종을 처리하는 일을 진행하신다.

 

1. 하나님이 욥을 겸손케 하심(38:1-42:6)

하나님은 욥에게 우주와 그 운행에 관한 간단한 질문들을 하신다. “네가 여호와에 대하여 그처럼 많이 알고 있는 듯하니 내가 만든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꾸나!“ 이 부분에 나오는 핵심을 찌르는 일격이다. “네가 나에게 도전해 왔는데, 이제는 내가 너에게 도전을 해야겠다!“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신다(38:4-11). 물론 지구에는 어떤 “기초“는 없다. 하나님은 과학적인 용어들이 아니라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신다. 사실, 욥기 26장 7절은 세계가 무엇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이 구절은 학식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이 거대한 거북이나 다른 피조물로 말미암아 지탱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에 기록된 것이었다! 26장 10절은 지구가 구형임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는 빛과 어두움 사이의 깊은 경계를 넘어 원을 그린다“(버클리역본). 이 구절 역시 지구의, 한 쪽이 어두울 때 다른 한 쪽은 빛 가운데 있음을 가르친다! 욥기 38장 7절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때 천사들이 기뻐한 것을 말한다. 12-15절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태양이 동터옴과 빛의 퍼짐에 대하여 질문하시며, 16-21절에서는 땅과 바다의 측정에 대하여 물으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를 측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음으로 하나님은 무생물의 자연, 곧 눈과 우박, 비와 얼음으로 방향을 돌리신다(22-30절). 22절은 “눈의 보물창고“라고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눈과 우박을 숨겨두는 비밀 창고이다. 그러나, 눈이 참으로 보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눈은 공기 중의 질산 칼륨을 모아 두었다가 땅에 저축하는 일을 돕기 때문이다. 어디에 비가 오고 눈이 와야 할 것을 결정하는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이 누구겠는가! 하나님만이 이 우주를 다스릴 수있으며 모든 일들을 조화있게 만들 수가 있으시다. 31-38절에서 하나님은 구름, 비와 더불어 별과 별자리에 대하여 질문하신다.

하나님은 다음으로 동물의 생태에 대하여 질문하신다(38:39-39:30). 인간이 사자를 먹이기 위하여 사냥하는가? 까마귀는 음식물을 위해 인간을 의존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24절에서 이에 답하신다. 산에 있는 들염소, 평지에 사는 들나귀, 들소(9-10절)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공급해 주실 것을 바란다. 자기의 둥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끔 잊어 버리는 타조조차 전능하신 분의 돌보심을 즐긴다(13-18절). 18절은 타조의 굉장한 속력을 상기시킨다. 19-25절의 말(馬)은 전쟁에서 원수를 직면했을 때의 모습이다. 26-30절에는 매와 독수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욥이 생태계를 바라볼 때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역사하고 계신 손을 보게 된다.

“이제, 네가 나를 비난하고 나와 논쟁을 했는데 네 대답을 들어보자!“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욥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40:3-5).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이제 축복으로 한 걸음 가까와졌으나, 아직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을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질문을 계속하신다. 이번에는 두 마리의 큰 짐승, 즉 하마(짐승 /15:24 절)와 악어(괴물/41장)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짐승들은 둘 다 욥 당시에 대단한 감탄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짐승들이다. 이들은 팔레스틴이 원산지는 아니다. 여기 나오는 하마에 대한 헬라어는 단지 “큰 짐승“이라는 뜻인데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하마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욥은 이러한 짐승을 본 일이 없을 것이며 상상으로 창안해 냈을 것이다! 악어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감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없었고 일을 시킬수도 없었으며 애완용으로 여길 수도 없었다(41:1-8). “그 만드신 자가 피조물보다 강함이 확실할진대 내 앞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18절에 나오는 재채기는 “경멸하다“는 말의 고어이며, 악어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가리킨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18-21절에서 고래가 물을 내뿜는 것을 연상한다. 어찌 되었든지, 본 장 전체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위대함을 나타내어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로 욥은 자신을 겸비케하고 회개하였다(42:1-6).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고발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신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의 빛 가운데서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욥의 종교적인 체험은 이제는 더이상 간접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뵙게 되었고 이 일은 그의 모든 고난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2. 하나님이 욥을 높이심(42:7-17)

이제 욥이 자신을 낮춤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높이실 수가 있으시다(벧전 5:6/약 4:10 참조). 하나님이 하신 첫번째 일은 그의 친구들을 꾸짖는 일이었다. 엘리바스가 친구들 중에서 연장자였으므로 책임이 가장 컸다. 하나님은 그들의 많은 논술들에 과오가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이들은 하나님도, 욥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게 했으며, 욥에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지시하신다. 그토록 자신을 지독하게 대했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려면 은혜로운 마음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하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자신을 위하여서가 아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욥의 매인 바를 풀어 주셨고 그의 몸을 고치셨다.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신 다음, 하나님은 욥의 번영을 회복시키셨다. 하나님은 욥이 겸손한 종으로서, 부와 명성을 의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다. 7-8절에서 네 차례나 “나의 종 욥“이라고 부르신 것에 유의하자. 하나님은 욥에게 전소유의 두 배를 주셨다(1:3/42:12 참조). 하나님은 욥에게 14명의 아들들과 6명의 딸들을 주셨다(전에 가졌던 수의 두 배/ 1:2). 전에 죽은 열 자녀들은 천국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7명의 아들들과 3명의 딸들을 주심으로써 총 수는 전에 가졌던 자녀의 두 배가 된다. 이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구약의 증명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단 그의 번영이 회복되자 욥의 친구들과 면식있는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 이 사람들 중의 더러는 의심할 나위 없이 과거에 그를 비판하고 심판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끝이 났다. 이들은 욥에게 선물을 가져왔는데, 이는 아마도 과거의 실수에 대하여 진지하게 슬퍼한다는 증거로 가져왔을 것이다. 행복한 때에 선물을 주는 것은 동양 나라들 가운데 행해지는 풍습이었다.

욥의 딸들의 이름은 재미있다. “여미마“는 “비둘기“란 뜻이고 “긋시아“는 “계피“ 게렌합북는 “눈화장용 상자“ 또는 “화장품 상자“라는 뜻이다. 이들 각 이름들은 이 소녀들이 매력적이고 높임을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욥은 이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더불어 유업을 주었다. 욥은 그 후로 140년을 더 살았으므로(모든 것을 두 배로 환산할 때)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가 70세 때인 듯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처럼 높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벧전 3:17 참조). 욥기의 주된 교훈은 고난이 끝나면 부유해지고 권세있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어떤 것이라도 그 목적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단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에 머리를 숙여야만 하였다. 욥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며, 그의 고난은 그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은 그를 크게 높이셨고, 사람들을 가르칠 만한 기록된 성경이 없던 시대에 증거로 삼으셨다. 현 시대에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보상받지 못할 수 있으나, 내세에서는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롬 8:18-39/고후 4-5장/벧전 4:12-19 참조). 욥의 생애에서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이다(약 5:11). 그는 사단과 환경, 친구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의 믿음이 때로는 요동하며 때로는 하나님을 힐난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같이 여기며“ 견디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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