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舊約의 聖靈論

好學 2009. 4. 26. 19:55

 

 

舊約의 聖靈論
                                                               김희성 교수


구약의 성령 혹은 구약의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우리 구약학자들이 다룬 글들은 몇 가지 있다 민영진, 구약성서의 영(루아흐) 이해, 신학사상 31(1980). 617-637쪽; 박동현, 야훼 하나님의 영과 그의 백성, 예언과 목회 IV,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11-65쪽; 차준희, 구약성서의 신앙, 한국신학연구소, 1997. 209-241쪽 등등
. 그러나 신약의 성령론에 대한 전이해로서 구약의 성령을 다룬 만족할 만한 글은 찾기가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본인은 전제된 신약의 성령론의 빛에서 구약의 성령을 다루고자 한다.


1. 성령을 위한 단어 “루아흐”의 세 가지 용법
구약성경에서 성령이란 낱말은 시 51:11; 사 63:10.11 세 구절에만 등장한다. 그 이외에는 하나님의 “영”[חור(루아흐)=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 역에서는 πνεύμα(프뉴마)]이라는 낱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령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아흐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낱말은 구약성경에 총 378회 나온다. 그 뜻에 따라 분류해 보면, 세 개의 양적으로 비슷한 크기의 의미 그룹이 형성된다 참조. Y. Congar, Der Heilige Geist, Freiburg, Basel, Wien, 1982. 19쪽.
. 그것은 적어도 113 곳에서는 자연적인 바람, 폭풍을; 129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력, 숨, 깨달음과 감정의 자리를; 136 곳에서는 하나님의 입김-영을 의미한다 J. Schreiner, "Wirken des Geistes in alttestamentlicher Sicht", Theologie und Glaube 81, 1991. 7쪽. 재참조. 차준희, 상게서, 217쪽 이하.
.
1.1. 바람, 폭풍으로서의 루아흐
어원학적으로 루아흐는 “‘(바람이) 불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랍어 동사 raha와 어근이 같으며, 이 동사의 명사형 rih는 ‘바람’을 의미한다” A.H.J. Gunneweg, "Aspekte des alttestamentlichen Geistverständnisses”, in: P. Höffken(Hrg.), Sola Scriptura Beiträge zu Exegese und Hermeneutik des Alten Testaments, Göttingen, 1983. 97쪽. 재인용 차준희, 상게서, 218쪽.
. 이 낱말은 서늘한 바람을 가리키기도 하고(창 3:8), 폭풍의 뜻으로도 사용되었고(왕상 19:11; 욥 8:2; 사 27:8; 겔 1:3; 13:11.13; 호 4:19 등), 태우는 바람으로도 쓰였다(시 11:6).
성경의 오래된 증언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적이고 기상학적인 바람, 폭풍을 신학적으로도 사용한다. 그들은 바람 등의 자연력을 하나님의 루아흐의 외적 작용으로 돌린다. 모세의 승전가를 보면, 물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이 하나님의 “콧김”(코의 루아흐)으로 시적으로 묘사된다(출 15:8). 사 40:7에서 봄의 신록을 말려버리는 열풍이 하나님의 루아흐로 표현된다. 만약에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그 위에 분다면, 풀과 꽃은 마른다 참조. W.H. Schmidt, Geist/ Heiliger Geist/ Geistgaben I, TRE 12, 171쪽.
. 이러한 표현들은 이 자연력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일어나고 보내졌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창 8:1; 출 10:13.19; 민 11:31; 암 4:13; 욘 1:4; 겔 37:8ff 등등).
또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은 바람을 창조하셨을(암 4:13) 뿐만 아니라, 바람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신다(시 104:4; 148:8)고 믿는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때 강한 바람을 일으켜 물을 감하게 하고 땅을 건조하게 하여 그곳에서 사람이 다시 살도록 하셨다(창 8:1).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 때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셨다. 그래서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다(출 14:21). 이처럼 하나님은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동풍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또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때에도 하나님은 바람을 사용하셨다(출 15:10). 하나님은 루아흐를 통하여 심판하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상학적인 바람, 폭풍을 신학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바람의 특성 때문이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실재이다.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아무도 모른다(전 11:5). 바람은 누구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바람은 정체되어 있는 “실존하는 현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불어서 나타나는 능력, 힘” R. Albertz/ C. Westermann, Art. "חור Geist", THAT II, 1993. 728쪽. 재인용. 차준희, 상게서, 221.
으로 이해된다. 이 바람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한 형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상응한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는 힘이나 능력으로 느껴지고 경험될 수 있다. 이처럼 바람으로서의 루아흐는 비가시적인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계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조정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상징이다 A.H.J. Gunneweg, a.a.O., 98쪽 이하 재참조. 차준희, 상게서, 222쪽.
.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하나님의 호흡-영과 관련을 시켰다. 이러한 관련성은 “희랍인의 영혼 신앙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자연관찰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동.

1.2. 인간의 루아흐
인간의 루아흐(영)는 호흡, 생명력, 감정과 인식과 의지의 자리 등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참조. 민영진, 구약성서의 영(ruah) 이해, 신학사상 31(1980). 624-633쪽; 차준희, 상게서, 225쪽
. 인간에 관한 한 루아흐는 우선 인간의 “호흡”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욥의 탄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루아흐(숨/호흡)를 내 아내가 싫어하며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욥 19:17). 이 호흡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이 있고, 호흡이 끊어지면 생명도 끊어진다. 이 호흡은 곧 “생명의 드러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호흡은 생명의 유무를 보여주는 생명의 드러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루아흐는 생명력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참조. 차준희, 상게서, 224쪽.
.
루아흐가 인간의 생명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루아흐는 생명력의 표출인 인간의 감정, 인식, 의지의 자리로도 사용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루아흐는 “분위기, 감정과 열정의 장소” W.H. Schmidt, 상게서, 170쪽.
이다. 이렇게 정서적인 면을 나타내는 인간의 루아흐는 흥분, 용기, 내적 불안, 교만, 질투, 절망, 급한 마음 등을 표현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인간의 루아흐가 인간의 마음과 상호교환해서 사용될 수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시바의 여왕이 그녀 안에 더 이상 루아흐(호흡 내지는 영)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놀랐다는 표현이 있다(왕상 10:5). 이 말은 그녀가 정신이 나가 어쩔 줄을 몰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루아흐가 짧다는 것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잠 16:32; 29:11), 루아흐가 길다는 것은 인내심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참조. 상동.
. 다음으로 정신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인간의 루아흐는 지혜와 이성, 예술적인 재능을 표현한다. 성막의 성구를 만든 브사렐에게서처럼 하나님의 작품을 다룰 때 루아흐는 그 작품을 완성시키는 지혜와 재능을 의미한다(출 31:3이하). 마지막으로 인간의 의지의 활동으로서의 루아흐는 의지의 결단을 보여준다. 애굽왕 바로는 루아흐(마음)를 강퍅하게 하여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출 7:13.22; 8:15.19.32).
그런데 인간적인 루아흐로 표현되는 감정과 의지와 인식은 서로 날카롭게 구별되어 사용되지는 않는다 참조. 상동.
. 뿐만 아니라 인간의 루아흐와 하나님의 루아흐 사이에 항상 엄격한 구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욥 27:3의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는 욥의 고백을 보면, 거기에서는 신적인 루아흐와 인간적인 루아흐는 인간 안에 있는 생명력으로서 동일시된다 참조. 상게서, 171쪽.
. 또한 성막을 만들라는 기사에서 인간의 지혜로서 루아흐(영)와 하나님의 지혜로서 루아흐(영)가 동일시된다. 출 28:3(비교. 31:3.6)에서 하나님은 “루아흐(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루아흐(영)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라고 모세에게 분부하신다. 또 슬기로운 여인도 루아흐(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으로 표현한다(출 35:25.26). 여기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지혜와 재능과의 관계가 반영된다. 인간의 재능이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활동이 된다.
바람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사람의 영인 생명의 호흡도 하나님의 루아흐로부터 왔고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듯이 참조. 차준희, 상게서, 225쪽.
, 사람의 영의 표출인 인간의 감정과 의지와 인식이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의존되어 있다.


1.3. 하나님의 루아흐
성경은 하나님의 루아흐(성령)의 본질에 대해서보다도 오히려 그의 활동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참조. 상게서, 237쪽.
. 왜냐하면 하나님의 루아흐는 자연적인 루아흐(바람)처럼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먼저 본질을 시사하는 하나님의 루아흐의 명칭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다음 항에서 그것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하나님의 루아흐(성령)는 그것으로부터 나가는 영향에 따라 다음과 같은 다양한 명칭을 얻는다: 이해의 영(출 28, 30), 지혜의 영(신 31, 3; 34, 9; 35, 31),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사 11:2), 질투의 영(민 5, 14)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나쁜 영”(삼상 16, 14; 18, 10) 등등. 하나님의 루아흐가 때로는 하나님 자체를 지칭할 때도 있고(사 40, 13; 63, 10), 하나님의 현존을 위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시 139:7). 하나님의 영은 거룩한 영이다. 다윗의 통회시편에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표현인 “성령”이 나온다(시편 51장 13절). “성령은 그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존재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성스럽다.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증명하기 위하여 더 이상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스럽고 성령은 그 하나님의 영이기에 성스럽다.” Y. Congar, 상게서, 21쪽.
이 영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참조. 상동.

2. 하나님의 루아흐(영/호흡)의 작용


2.1. 창조적인 힘
하나님의 루아흐는 태초의 혼돈과 무질서에서의 창조에 관여한다(창 1:2). 거기서 루아흐는 창조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창조사역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참조. 민영진, 상게서, 633쪽.
. 이러한 사상은 시 33:6에 반영된다: “여호와의 말씀(드바르)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루아흐)으로 이루었도다”. 하나님의 루아흐(입김)는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관련된 창조적인 힘이다.


2.2. 호흡과 영을 불어넣어 주심
하나님의 루아흐의 작용은 비육체화가 아니라, 인간의 몸에 호흡과 영을 불어넣음이다 참조. Y. Congar, 상게서, 20쪽.
(비교. 창 2:7). 이러한 사상이 사 42:5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들에게 루아흐(영)를 주시는 하나님”과 슥 12:1에 “사람 안에 그 루아흐를 만들어 주신 분”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이 루아흐를 받음으로 숨쉬는 생명체가 되고, 하나님이 이 루아흐를 거두어 가시면 죽는다: “주께서 저희 호흡(루아흐)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 29b). 그러므로 사람의 호흡/생명과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며 창조의 결과로서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창조주가 그의 루아흐로 호흡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인간의 영을 형성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힘과 생명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지 알아야 하고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속적인 삶의 원칙에 따라서만 살면, 하나님의 영은 인간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인간은 육체가 된다(비교. 창 6:3이하). 인간이 육체가 된다는 말은 인간의 허무를 의미한다.
인간의 내면에 영을 형성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영을 자극하고 감동시켜서 의지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루아흐(마음)를 감동시킴으로 고레스가 포로가 되었던 유대인들을 해방하였다(참조. 대하 36:22-23) 참조. 박창건, 성서에서 본 성령, 기독교사상 1(1991), 11쪽.
. 그러나 황폐한 고국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루아흐를 감동시킨 사람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참조. 스 1:5). 그 반면에 하나님은 인간의 루아흐(의지/마음)를 강퍅하게 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이 바로(출 4:21; 9:12)의 루아흐(마음)를 강퍅하게 하심으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지 않으려고 했고, 헤스본 왕 시혼의 루아흐(마음)를 강퍅하게 하심으로 그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는다(신 2:30; 비교. 출 8:15; 대상 5:26) 참조. 상게서, 11-12쪽.
.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의 루아흐는 호흡/생명뿐만 아니라 영을 불어넣어서 행동하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이며 특히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행동에로의 자극이며 그것을 완성하는 능력이다 참조. Y. Congar, 상게서, 20쪽.
.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서의 루아흐를 통해서 인간의 육체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의지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행동하시고 행동하게 하신다.


2.3. 각종 재능과 능력을 주심
하나님의 루아흐는 인간의 루아흐(영/마음)를 지속적으로 감동시켜 지혜, 슬기, 재능, 꿈해석 등의 각종 능력을 부여한다. 브사렐과 오홀리압이 보여준 지혜와 여러 가지 기술들은 다 하나님의 지혜의 루아흐를 영속적으로 받음으로써 가지게 된 것이다 참조. 민영진, 상게서, 632-633쪽.
(출 31:3; 35:31).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루아흐에 감동되어 꿈을 해석하고(비교. 단 4:5이하; 4:18; 5:10이하) 흉년에 대한 대책을 세울 지혜를 가지게 된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루아흐)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 하라”(창 41:38-40a).
또한 탁월한 전술능력, 행정 및 경영상의 수완 등도 하나님의 루아흐가 임함으로써 가능하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사들은 하나님의 루아흐를 받고 전쟁에 나가 싸울 때 승리할 수 있었다 참조. 상게서, 632쪽.
: “여호와의 신(루아흐)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웃니엘의 손이 구산리사다임을 이기니라”(삿 3:10; 비교. 6:34; 11:29; 13:25; 14:6.19; 15:14).
야훼의 종도 하나님의 루아흐를 받아 공의를 세우게 될 것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42:1).


2.4. 황홀경과 말씀선포의 능력
하나님의 루아흐는 사사들에게 한 것처럼 초기 예언자들을 사로잡아서 황홀경에 들어가 열광적으로 예언하게 한다. 황홀경 가운데서 예언한다는 기사는 민 11:25에 처음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루아흐)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루아흐)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예언을 하다는 말(와이트나베 אבנתיו)은 황홀상태에서 행하며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차준희, 상게서, 231쪽.
.
하나님의 루아흐가 임하므로 황홀한 가운데 예언한다는 이야기가 삼상 10:5-6.10(비교. 19:23-24)에도 나타난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불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미트나빔)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네게는 여호와의 신(루아흐 야훼)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히트나비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하나님의 신(루아흐 엘로힘)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와이트나베)”.
삼상 19:20이하에는 선두에 있는 사무엘과 함께 하는 예언자 무리를 예언적인 황홀경 속에서 보았던 사울의 사자들에 대하여 언급된다: 그 때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 일이 나중에 사울에게도 일어난다. 하나님의 루아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하는 이런 종류의 예언에 특징적인 것은 말씀이 보고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황홀경 자체가 루아흐의 작용이고, 그 황홀상태는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이될 수 있다.
이 황홀현상을 야기시키는 야훼의 영은 또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부여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이 이하는 민영진, 상게서, 631쪽, 을 참조.
. 발람의 예언적 신탁은, 그가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부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하나님의 신(루아흐)이 그에게 임하여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다윗의 마지막 말도 여호와의 신(루아흐)이 그를 통하여 한 말이다(참조. 삼하 23:2).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하나님의 신(루아흐)가 임하여 그가 말한다: “...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대하 15:1이하).
레위 사람 야하시엘도 여호와의 신(루아흐)이 임하므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대상 20:14이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말씀“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 순교 당한다(참조. 대하 24:20이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말씀을 전하는 힘은 주로 “이전 선지자”들에게 임하였다(스 7:12; 비교. 느 9:30).
그런데 예언자 집단을 황홀경 상태로 몰입시키고 말씀을 전하게 하는 루아흐의 작용은 BC 8~7세기 포로기 이전의 문서 예언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참조. 차준희, 상게서, 232쪽; 민영진, 상게서, 636쪽.
. 이 문서 예언자들은 그들의 말씀 선포에 대하여 하나님의 루아흐(영)를 증인으로 끌어대지는 않는다. 그들은 열광적인 예언의 범주에로 들어가는 것을 피한다 참조. 차준희, 상게서, 232쪽.
.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를 루아흐를 통한 사로잡힘 안에서보다도 훨씬 더 말씀 안에서 경험한다(암 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특히 예레미아 선지자는 자신의 말씀선포에 대하여 하나님의 루아흐를 증거로 끌어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한다 참조. Y. Congar, 상게서, 24쪽.
(렘 23:28이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사야 선지자도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을 하나님의 루아흐에 감동되었어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환상 가운데 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인했다고 밝힌다(참조. 사 6:8-9).
그런데 포로기의 에스겔 선지자는 예외가 된다. 그는 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을 말씀선포의 증거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고대 예언자들과의 연결 안에서 하나님의 루아흐(성령)를 통한 사로잡힘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하실 때에 그 신(루아흐)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겔 2:1-2; 비교. 3:12.14.24; 8:3; 11:1.24; 43:5).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황홀경에 빠지기도 할뿐만 아니라(참조. 겔 8:3; 11:24), 엘리야처럼(왕상 18:46) 야훼의 권능에게 사로잡히기도 한다(참조. 겔 1:3; 3:14.22; 8:1; 37:1; 40:1). 이 에스겔 선지자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로 예언자들의 전권을 다시 성령의 작용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참조. W.H. Schmidt, 상게서, S.171; 차준희, 상게서, 234쪽.
.
3. 포로기 전후의 세 예언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영”
이 영이해에 관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저자 세 명이 있다. 그들은 이사야, 에스겔, 요엘이다. 그들의 책 가운데 이사야서는 루아흐라는 단어를 50번 사용하고, 에스겔서는 46번 사용한다.


3.1. 이사야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영”


3.1.1. 왕조기 시대 이사야의 사용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루아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바르게 통치하는 능력과 지혜의 영으로 이해하면서 그 루아흐를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그의 성령에 관한 언급은 그의 말씀선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선포의 핵심주제는 임마누엘의 탄생(7:11-17)과 불의한 백성에 대한 심판과 “남은 자”들의 구원(6:8-13; 10:20-23; 17:4-11)이다. 그의 선포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주는 희망찬 미래에 대한 약속(참조. 37, 21-35)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러한 남은 자의 구원,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이사야는 한편으로는 메시아적 왕에 대하여 예언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루아흐)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야훼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11, 1-3).
여기서 야훼의 영이 임하는 자는 메시아적 왕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의 루아흐(성령)으로부터 공정한 통치를 하고 법을 관철하는데 에 필요한 모든 천부적 재능과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참조. Y. Congar, 상게서, 24쪽.
. 첫 번째 왕 사울과는 달리 메시아적 왕에게서는 야훼의 영이 더 이상 앗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동경하는 지혜와 통찰의 영을 얻고, 모사와 강함의 영으로 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고, 지혜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으로 유일한 특별지위를 얻는다. “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람들에게 대면해 서서 비교할 바 없는 과업을 소유하고 논쟁할 수 없는 권위로 행한다” H. Wildberger, Jesaja 1, Neukirchen-Vluyn, 21980. 450쪽.
. “이 미래의 왕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주변 참모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영향력을 끼치려는 시도들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Otto 카이저 저, 번역실 역, 이사야 (I), 한국신학연구소, 1985. 209쪽.
. 그는 권리의 본체로서 작은 자와 적은 자들을 위하여, 권리를 위하여 등장한다 참조. H. Wildberger, 상게서, 450쪽.
. “그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야훼를 두려워하면서 그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식이란 단지 지적인 일도 아니요 지적인 것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모든 현실은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현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행위와 무관한 하나님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등을 돌리고’ 야훼께 ‘돌아가는 것’이며 그를 ‘찾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다. 야훼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과 법과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Otto 카이저 저, 상게서, 209쪽.
이 메시아적 왕의 통치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편으로는 메시아의 백성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을 예언한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32:15).
성령은 높은 곳, 즉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어져서 이스라엘의 활력을 놀랍게 증진시킨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용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며 황폐한 땅을 아름답게 만들어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사막은 과수원으로 바뀌고 과수원은 숲으로 변할 것이다 참조. 오토 카이저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 옮김, 이사야(II), 한국신학연구소, 1991, 442쪽 이하.
. 변화된 자연 속에서 성령의 부음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롭고 평화로운 공동생활을 한다. “이 공동생활은 정의로 규정된다” 상게서, 443쪽.
(참조. 32:16이하). “정의의 파급효과는 우선 인간과 동물들과 들판이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항존하는 것과 포괄적인 평화와 구원 곧 샬롬과 그 외에도 사람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겸손하게 신뢰하는 것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 짐승과 짐승이 안전하게 동거하는 것이다(참조. 겔 34:25 이하; 신명 33:28; 사 11:1-9).” 상동.

이처럼 성령에 관한 이사야의 사상은 메시아왕과 메시아의 백성으로 구성될 이스라엘의 회복 내지는 갱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나라를 야훼의 영을 부여받은 메시아적인 왕은 법과 정의로 이상적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며, 성령의 부음을 받은 메시아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동생활을 하게 되고, 메시아의 왕국을 대외적으로 지키기 위해 군인들도 야훼로부터 힘의 영을 부여받는다(비교. 28:5-6).


3.1.2. 포로기 시대 이사야의 사용
포로기 시대에 활동한 제2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이사야의 성령의 용법을 받아들여서 그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루아흐를 야훼의 종의 임명식과 이스라엘의 성장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는 야훼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보라. 내가 나의 루아흐를 그에게 주었은 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로다”(사 42:1-4).
이 말씀에 여호와의 종의 임명식이 반영된다 참조. C. Westermann 저, 번역실 역, 이사야 (3), 한국신학연구소, 1990. 111쪽.
. 이 임명식에서 그에게 야훼의 영이 주어지고 임무가 주어진다. 그의 임무는 하나님의 판결을, 즉 그의 계획, 그의 법과 정의를 뭇민족들 사이에 집행하는 것이다(42:1c.3c.4b). 그가 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는 2-4절에 어렴풋하게 암시되어 있다. 이 말씀들은 야훼의 종이 선교사로 이방민족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기보다는 그가 그의 민족 가운데서 고난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이방민족들에게 하나님의 판결을 간접적으로 내리고 그리하여 뭇민족들의 빛이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참조. 상게서 113쪽 이하.
. 이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세계사에 진입하고 하나님의 영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추진한다.
제2 이사야는 또한 하나님의 루아흐를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어줌을 통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성장을 노래하고 있다.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루아흐)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44:3).
여기서 ‘갈한 것’과 ‘마른 땅’은 이스라엘의 현상태를 가리킨다 참조. 상게서, 158쪽.
. 야훼의 루아흐는 육체의 생명을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 내지는 생명력으로 사용된다. 이 말씀은 지금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루아흐를 부어줌을 통한 성장을 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까운 장래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오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야 비로소 그 열매를 맺는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조. 상동.
. 여기서 반영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인해 열린 이스라엘의 미래에 하나님은 계속 루아흐를 통해 일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를 늘릴 것이라는 신념이다 참조. 상동.

3.1.3. 귀환 후 시대 이사야의 사용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활동한 제3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구원메시지를 전하도록 준비되었다는 자의식을 가진 어떤 사람의 선언” 상게서, 415쪽.
을 보도한다.
“하나님, 주님의 영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내 위에서 머무른다. 그는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나를 보내셨다. ...”(61, 1-3).
여기서 ‘야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의 모습보다는 예언자의 모습을 더 가진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는 어구는 하나님이 야훼의 종에게 “나는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다”는 사 42:1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미가 선지가가 한 “그러나 나는...야곱의 불법...을 꾸짖도록...야훼의 영을 충만히 받았다”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제3 이사야는 이 어구를 통하여 포로기 이전의 구원예언에서 소명에 대한 진술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참조. 상게서. 416쪽.
. “기름을 붓다”라는 말은 원래 왕에게만 사용되었는데 후대에는 사제에게도 사용되었다. 이 말은 여기서 “전권을 위임하다”의 비본래적인 의미로 전 의되어 사용된다. “그가 나를 보내었다”라는 말이 본래 예언자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 상동.
. 여기서 하나님의 영을 충만히 받아서 전권을 위임받은 예언자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직무는 “전하고...싸매 주고...선포하고...위로하고...주는 것”이다. 그의 임무의 본질은 전적으로 말하는데 있다. 그는 그러한 선포를 통해서 그가 보내진 사람들에게 모종의 변화를 일으킨다. 즉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구원을 일으키는 것, 곧 유발시키는 것과 거의 같다 참조. 상게서, 417쪽.
. 말하자면 그는 그의 선포를 통해 상처를 치료하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그리하여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예언자가 선포한 구원의 시대가 동터옴으로써, 지금 수난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고통도 제거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선포를 채무노예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전령의 외침에 비유할 수 있었다 참조. 상동.
. 그의 임무는 결국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한 예언자가 아무 거리낌 없이 그토록 자신 있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시고 메시지와 함께 그의 백성에게 보낸 자라는 확신에 대한 표명이 반영되고 있다 참조. 상게서, 418쪽.

3.2. 에스겔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루아흐
에스겔서에는 하나님의 루아흐를 부어준다는 말씀이 세 군데에 등장한다. 이 모두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말씀 가운데에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토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는 맥락에서 나온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 24-28).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결정적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워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참조. W. Zimmerli, Ezechiel, II Teilband, Neukirchen-Vluyn, 21978. S.878-9.
. 첫째 단계는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제의적으로 정결케 하심이다. 둘째 단계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줌이다. 몸의 의식적 정결에 내면의 새로워짐이 따른다.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새 마음, 새 의지와 새 정신 상태를 수여하는 것이다 참조. W. 아이히로트 지음, 강원돈/ 김상기 옮김, 에제키엘, 한국신학연구소, 1991. 586쪽.
. 순종에로의 부름에 닫혀져 있는 돌처럼 굳은 마음이 고기처럼 부드럽게 된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고기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셋째 단계는 야훼의 영(관주 성경에는 “신”)을 인간의 마음에 부어주심이다 참조. W. Zimmerli, 상게서, 879쪽.
. 인간의 굳은 마음과 생각의 전환은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이룩된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영은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다 참조. W. 아이히로트 지음, 상게서, 587쪽
. 이 영을 통하여 새롭게 된 존재는 하나님의 뜻에 합일하게 만드는 충만한 능력을 얻게 된다. 여기의 영은 지혜나 총명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이 새로움의 능력은 야훼의 뜻과 계명에 대하여 순종할 수 있는 힘이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단계를 통하여 선지자들이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인 완악함 자체가 정리된다 참조. 김정우, 새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새 언약의 영 - 에스겔 36:22-32 -, 신학지남, 241(1994) 가을/겨울호. 70-71쪽.
. 새롭게 된 백성은 이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 언약 하에 들어가는 새로운 신분이 된다. 이 언약은 옛계약을 훨씬 넘어서는 새계약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새로운 생명 결합이 이루어지는 계약이다. 야훼가 처음부터 그의 백성들과 맺었던 것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야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 참조. W. 아이히로트 지음, 상게서, 587쪽.
.
다음으로 골짜기의 바른 뼈들을 살리는 이야기 가운데, 특히 그것을 해석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루아흐를 주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이 마른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37, 5.10.11.12a.14a).
에스겔의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은 망해서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진” 이스라엘 포로공동체의 낙담을 향하여 이야기한다. 예언자는 죽은 뼈들의 골짜기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어 창조주의 말씀을 그것들에게 대언할 과제를 받는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겔 37:5). 이 과제에 따라 죽어 마른 뼈들을 향해 하나님의 생기가 돌아오라는 에스겔의 외침은 인간의 몸의 회복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야기시킨다.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 모이고 힘줄이 그 위에 덮이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인다. “최초의 인간 창조에 대한 창 2:7의 보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형체는 완전히 만들어졌지만, 그들을 살리는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W. 아이히로트 지음, 상게서, 596쪽.
. 그들을 실제로 살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루아흐(숨)가 필요하였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예언자에게 새로운 선포 명령이 주어진다. 그대로 대언하니까 생기가 사방에서 와서 죽은 자들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그들을 살게 한다. 그들이 살아나는데 엄청나게 큰 무리였다. 이 이야기는, 그 다음에 따라오는 해석을 참조하면, 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절망적인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에 대한 서술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의 부음 받음을 통하여 회복되어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영의 부어줌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마른 뼈 환상기사에서 언급되는 생명의 영의 불어넣어 줌뿐만 아니라, 겔 36:26의 민족을 새롭게 하는 영의 부어줌을 의미한다. 이것은 환상 기사에서는 기피하지만 36:26에서 사용되는 “내 신(영)”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의 부어줌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넘어서서 민족 전체의 내적 갱신까지를 지시한다 참조. W. Zimmerli, 상게서, 898쪽.
.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심에 대한 말씀이 하나님의 자비로 이스라엘이 재건될 것을 예상하는 기사에 나온다.
“전에는 내가 그들로 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39:28-29).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부어주셨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영을 부어주심은 이스라엘 집에 자비를 끊임없이 베풂과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합일을 표시한다. 이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사귐은 다시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다. “여기서는 구원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행위는 뭇민족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 W. 아이히로트 지음, 상게서, 621쪽.
. 야훼가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였고 이스라엘을 한사람까지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참조. W. Zimerli, 상게서, 970쪽.
. 이스라엘이 그 분이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나타난 성령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만드는 새 창조의 영이다. 그는 인간을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며, 언약을 실현시키시는 새 언약의 영이시다 비교. 김정우, 상게서, 76쪽.
. 그 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다.
3.3. 요엘서에 사용된 하나님의 루아흐
요엘서에는 다음의 한 군데에만 성령의 부어줌에 관한 말씀이 나타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28-29.32a).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는 약속은 “그 후에”라는 종말론적인 도입 구로 시작한다 참조. A.바이저/ K.엘리거 지음, 박영옥 옮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즈가리야, 한국신학연구소, 1992. 194쪽.
. 그러므로 여기서는 엄청난 종말론적 사건이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옛 시대에는 지도자나 선지자 등 몇몇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셨지만 종말적인 새로운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 이 때에는 나이, 성, 사회적 신분의 차별이 없이 이스라엘의 늙은이와 젊은이, 남종과 여종 모두에게 성령이 부어진다. 아들과 딸들과 늙은이들과 젊은이들 외에 종들도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결코 제한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는 사회적 한계들도 철폐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A.바이저/ K.엘리거 지음, 상게서, 194쪽.
. 이들은 성령을 받아 “예언, 꿈, 환상”을 볼 것이다 김정우, 요엘 2:28-42(MT 3:1-5)에 나타난 성령강림의 약속과 그 신약적 성취, 신학지남, 238호, 1993. 겨울호. 19쪽.
. 예언과 꿈과 환상은 예언자가 영을 부여받는 현상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명히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민 11:29b에 표현된 모세의 소원이 종말론적인 영의 내림으로 약속되는 것 같다 참조. H.W. Wolff, Dodekapropheton 2 Joel und Amos, Neukirchen-Vluyn, 21975. S.80; A.바이저/ K.엘리거 지음, 상게서, 194쪽.
. 그런고로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성령의 부어주심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순종을 목적으로 하는 성령의 부음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새창조에로의 성령부어줌도 아니다. 그것은 예언자 민족을 만들기 위한 성령부어줌이다 참조. H.W. Wolff, 상게서, 78쪽.
. 요엘 선지자는 여기서 성령을 받아 새롭게 생명을 얻은 민족은 예언자의 민족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대한다. 모두가 하나님에게 직접적이다. 이 약속은 너희 자녀들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요엘의 현재 세대가 아니라 미래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된다. 미래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과 성령의 부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두려움 없는 교제 속에서 살게된다. 약 400년 후에 “지금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사도 베드로가 성령 강림절에 설명할 것이다(사도행전 2, 16).

결론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등의 재앙과 시련이 위대한 예언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하고 신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왔다. 이 비전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약속, 새로워진 백성 등,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새로워짐에 집중된다.
이들의 영에 대한 비전을 살펴보면, 우선 하나님의 영은 메시아적인 왕(혹은 야훼의 종 등)에게 지혜와 총명과 모사와 능력과 인식과 하나님 경외의 영으로 임한다. 그는 그에게 임한 영으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을 법과 정의로 다스리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임한다. 이들에게 임한 영은 인간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이 영의 부어줌을 통하여 마침내 목이 곧고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고질적 병폐가 고쳐진다. 새롭게 된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야훼가 처음부터 그의 백성들과 맺었던 언약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야훼는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 이제 새 언약에 따른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이 전개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은 종말에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게 된다. 이 영은 선지자의 영이다. 이 영을 부어줌을 통해서 이스라엘 모두가 성과 나이와 사회적 신분의 차별 없이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직접적”이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예언자의 민족, 선지자의 나라를 이룩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보았던 비전이었다.
이러한 비전에 따라 이미 구약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인간의 약속을 시 51편(7.12절)의 기도자가 취한다. “그는 생각, 원함과 능력을 포착하는 영을 통한 새로워짐의 기도와 깊은 죄의 타락 안으로의 통찰을 결합한다: ‘나에게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주소서’. 이 기도에서 구약에서 아주 드문 ‘성령’이 나온다: ‘당신의 성령을 나로부터 거두지 마옵소서’. 이 기도의 응답으로 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높고 거룩한 분이 기가 죽은 자들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상하고 겸손한 자’(= 기가 죽은 영)에게 거할 것이다(사 57:15; 비교. 시 34:19; 31:6; 51:19 등등)” W. H. Schmidt, 상게서, 172쪽 이하.
.
이러한 선지자들의 하나님의 영에 대한 비전도 신약의 빛에서 보면 한두 가지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한계는 우선 하나님이 보낸 중보자와 영을 부어줌을 밀접하게 결합시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을 선물로 준다는 신약성서의 언급은 바로 그와 같은 결합을 특징으로 한다 참조. W. 아이히로트 지음, 상게서, 589쪽.
. 이러한 결합이 구약에 없기 때문에 신약에서처럼 성령을 통하여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재하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사상이 결핍되어 있다. 다음으로 기독인의 희망의 본질인 부활도 구약의 성령 이해에서 추출해 내기가 쉽지않다는 한계가 있다. 성령을 통한 죽은 자의 부활이 구약에서는 에스겔서에서만 유일하게 그것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신약에서는 다음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사용된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말의 영이 역사한 부활의 첫 열매이고 부활의 마지막 열매는 그리스도에게 딸린 자들의 부활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의 성령론과 구약의 성령론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앞당겨 내릴 수가 있다. 신약과 구약의 성령론은 서로 연속성과 동시에 불연속성을 갖고 있다. 신약의 성령론은 물론 구약의 성령론의 조명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구약의 성령론의 빛에서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을 통하여야 제대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