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 비교종교론 - 한국의 유교

好學 2011. 1. 30. 19:03

★  비교종교론 -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녕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