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 비교종교론 - 시크교

好學 2011. 1. 30. 19:05

★  비교종교론 -  시크교

 

 

인도하면 터반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인도를 가기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터반을 두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시크교이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11세기 이후로 계속 되었든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절정에 달하고있던 때였다.

양측이 서로 종교의 이름으로 죽고, 죽이기를 몇세기를 이어내려 오면서 대립도 했지만, 나름대로 이슬람은 힌두교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힌두는 이슬람으로부터 종단 조직에 대한 것들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데,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나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결국 가다 보면 이슬람이니 힌두니 하는 구분조차 필요 없다고 역설한다.

 

이 새로운 비젼으로 그는 3차례의 순례여행을 떠나는데, 그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종교조직을 이룬 것이 시크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슬람제국 무굴제국이 성립되고, 무굴의 지배자들과는 때로는 협력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황제에 따라 대립하기도 했었는데, 17세기 구루 하르고빈대에 이르러서는 무굴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한 상시적인 무장군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두명의 구루들 역시 무굴과의 대립과정에서 죽으면서 10대 구루에 이어서는 법통마저 끊기게 된다.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사원인 황금사원은 이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곳으로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인심좋은 사원일 뿐이다.

 

무굴이 망하고 영국이 들어오면서도 이네들의 신앙공동체는 계속 시련을 겪었는데, 세포이 항쟁당시 영국측 입장에 섰던 관계로 민족 반역자가 되기도 하고, 독립이후에는 시크교의 주 무대인 펀잡주가 파키스탄과 인도에 양분되는 사태에도 이르게 된다.

 

가장 최근인 인디라 간디 수상대에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암릿차르 황금사원을 점거했고, 인디라 간디는 성스러운 사원에 탱크를 몰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몇달후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이던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되게 되고, 이 사건 직후 성난 힌두교도들에 의해 수많은 시크교도 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이들은 터반이라는 외형적 특징 때문에 숨길수가 없다. 이 학살극을 계기로 터반을 하지 않는 시크교도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기마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들은 인도인들에 비해 덩치나 외모가 큼직하기만 한데, 이런 이유로 군대나 경찰쪽에서는 상당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  비교종교론 - 13) 일본 신도
 
신불습합 (神佛習合, Shinbutsu-shugo)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래 불교의 융합을 가리키는 말.

신도와 불교의 융합은 6세기 중엽 불교가 일본에 유입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두 종교의 융합과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한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흔히 가정에 신도의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부쓰단[佛壇]을 두고 있으며 결혼식은 신도식,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곤 한다.

 

신도와 불교의 공존양식은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741년 나라의 도다이 사[東大寺]에 거대한 불상을 조영하기에 앞서 불상 건축계획을 이세 신궁[伊勢神宮]에 모신 신도의 최고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아뢰었다. 또 군신(軍神) 하치만[八幡]에게도 도움을 구했으며 규슈[九州]에서는 도다이 사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원 내에 우사 하치만 신사[宇佐八幡神社]의 한 분파가 건립되었다. 그 이후로 불교사원 경내에 신사를 건립하거나 신사 근처에 사찰 또는 불탑을 건축하는 관행이 발전했으며 신사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신도의 가미[神]는 불교의 부처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 초반에는 신도와 불교의 융합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불교이론인 혼지스이자쿠세쓰[本地垂迹說]가 등장했다. 형이상학적인 부처는 본래의 근본실체(혼지)이며 역사 속의 부처는 그 실체의 화신(스이자쿠)이라는 이론이다. 신도와 불교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처와 신도의 신은 궁극적으로 통일체이지만 부처는 혼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그 화신인 스이자쿠인 것이다.

 

불교의 여러 종파와 신도의 융합(때로는 중국의 도교도 받아들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때 신사의 신관은 불교 승려들보다 지위가 낮았으며 신도의식에서조차 보조적인 존재로 격하되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정신적 각성기 동안 신도는 불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는데 이세 신도[伊勢神道] 운동은 신도의 신이 부처의 현시가 아니며 오히려 부처와 보살이 신도의 가미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두 종교는 메이지[明治] 신정부 초기에 취해진 개혁조치에 의해 분리되었다. 신정부는 1868년 신사에 관계하는 불교 승려들에게 신사의 신관이 되든가 환속하라는 칙령(신불분리정책)을 발표했다. 불교 사원에 속한 토지들이 몰수되었으며 황실 내에서의 불교행사가 폐지되었다. 이후 신도는 국가적 종교로 선포되었으며 종교를 초월하는 국가적 숭배의식으로 재해석되었다.→ 국가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