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 비교종교론 -이슬람

好學 2011. 1. 30. 18:59

★  비교종교론 -이슬람

 

 

피상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슬람교도(무슬림, 모슬람)는 흔히 테러리스트이다. 이것은 미국의 문화적 지배로 인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들이 영화일 것이다. 항상 악당이나 테러리스트로 나오는 이슬람교도...
그러나 이슬람의 교리가 사랑과 선행 등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미국식의 주장은 사라질 것이다.
 
7세기 초 마호메트가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예언자로서 세운 종교. 유대교·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일신교(一神敎)이다. 한국에서는 마호메트교·회교(回敎), 중국에서는 청진교(淸眞敎)·후이후이교〔回回敎〕라고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성전(聖典)인 코란에 <나(알라)는 이슬람을 너희를 위한 종교로 승인했다(표준이집트판, 5:3)>라고 나와 있다. 원래 아라비아어의 <이슬람>이란 <신의 의지나 명령에 절대귀의(絶對歸依)·복종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뒤 이러한 귀의 방법을 제도화한 문화적·사회적 복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를 나타내는 <무슬림>도 원래는 <귀의한 자>를 의미했다. 이슬람교는 불교·그리스도교에 비길 만한 세계종교이다. 성지 메카를 중심으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오늘날 세계 무슬림의 총수는 약 6억 3000만으로 추정된다.

 

기원과 배경 : 자힐리야시대


자힐리야란 이슬람성립 이전의 <무지(無知)>의 시대, 또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남아라비아의 여러 왕국과 그 밖에 북아라비아의 나바테아왕국(그리스어로 나바타이오이왕국)·팔미라왕국의 시대를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슬람성립 전의 1세기 정도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아랍부족들 사이의 투쟁시대로서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부족만이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부족만이 모든 것이었다. 이 시대에 후세의 모범이 된 시(詩)가 탄생했으며 시인이 활동했다. 카힌이라고 하는 샤먼이 사람들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한편, 사막에서는 <진(Jinn;靈鬼)>이 사람에게 해를 가한다고 두려워하며 자연석이나 신의 모습을 새긴 돌을 성석(聖石)과 신상(神像)으로 숭배했다. 그 가운데 신의 저택인 메카의 카바신전의 검은 돌은 사각형의 칸막이가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으나, 신전(神殿) 안팎에는 많은 신상이 안치되어 메카의 쿠라이시족뿐만 아니라 헤자즈의 전지역에서 숭배했으며, 신성월(神聖月)에는 싸움을 중지하고 이곳으로 순례하러 왔다. 이때는 시장(市場)이 서고, 시인들이 모여서 재능을 겨루었다. 신 가운데 특히 알라트·우자·마나트의 세 여신이 유명했으며, 알라도 최고신으로 쿠라이시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당시 아랍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였으며, 애니미즘적 성격을 강하게 띤 원초적인 것이었다. 아랍에 유대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70년 예루살렘신전이 파괴된 이후이다. 홍해 연안의 통상로(通商路)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유대교도는 대부분 야스리브(후에 메디나)와 예멘 등에 정착하고 있었다. 북부 변경지방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단성론파(單性論派)와 네스토리우스파가 침투하고 있었고, 헤자즈지방이나 남부의 나지란시에는 다수의 그리스도교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랍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다신교나 유대교·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부족의 현세적 번영에 이바지하는 덕(德)과 가치, 즉 <무루아(남자다움)>라는 것이었으며 또한 <다흐르(時)>라고 표현하는 운명관이었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로 번영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는 빈곤과 악폐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에 쿠라이시족의 한사람으로서 마호메트가 태어났다. 전승에 의하면, 남아라비아의 힘야르왕국을 멸망시킨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장군 아브라하가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메카를 공격한 <코끼리의 해>, 즉 570년이 마호메트가 태어난 해라고 한다.

 

마호메트의 출현


마호메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25살 때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상업을 하는 한편, 메카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을 했다. 610년, 40살 무렵 최초의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유일신 알라의 계시인지를 믿을 수 없어 고뇌하지만, 곧 예언자임을 자각(自覺)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천지의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중지하고 알라에게 귀의하여,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메카사람들은 마호메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와 소수의 신도들을 박해하여, 622년 마호메트는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버리고 포교의 활로(活路)를 찾아 야스리브로 옮겨갔다. 이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대다수의 메디나주민과 메카에서 이주한 신도들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 공동체인 움마를 만들었다. 630년에는 종교지도자·정치가로서 메디나에 살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주변의 아랍 여러 부족들을 교화하여 메카를 정복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전지역이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호메트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성전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심는 데 성공했다.

 

교의와 실천
이슬람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마호메트가 나타나기까지의 전사(前史)로 보고 있으며, 이슬람의 교리 및 실천 속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와 공통된 내용이 많다. 교리 및 실천의 기본은 <육신(六信)과 오주(五柱;五行)>로 되어 있다. <육신>은 신·천사·성전·예언자·내세(來世)·예정(豫定) 등 6가지의 신앙개조(信仰箇條)를 말하며, <오주>란 신앙고백·예배·자카트(喜捨)·단식·순례 등 5가지의 주요 의무를 가리킨다.

 

<육신>
⑴ 신(알라):코란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희의 신은 유일하신 신(2:163)>이라고 하는 엄격한 일신교의 원리이다. 알라신은 절대 유일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신의 의지와 능력에 의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신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신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2:11)>는 뜻이다. 이것은 신이 동반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본질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며, 피조물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초월신(超越神)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과 피조물과의 격절성(隔絶性)이 강조되는 한편, 신은 또한 <각 사람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가까이(50:16)>에 있으며, 인간의 말로 자신을 말하고, 인간처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고, 다시 생각하기도 하는 인격신이다. 신은 또한 악인을 벌하고, 믿음을 갖고 올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선한 보답을 하는 의로운 신이다.

 

 또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17:25)> 자비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신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 신의 유일성(타우히드)에 대한 문제, 즉 신의 초월성·내재성·인격성을 신의 본질·속성과 관련시켜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는 뒤에 신학적 논의의 최대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코란과 하디스(예언자의 언행에 대한 전승)에 있는 신의 의인적(擬人的) 표현을 긍정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입장(하슈위파 등)과, 그러한 표현을 모두 비유라고 해석하고 피조물과 공통된 속성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무타질라파·철학자 등)을 양극단으로 본다면, 정통파는 의인적으로 표현되는 신의 속성을 공정하면서 그 신의 속성을 신의 초월성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려 한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

 

⑵ 천사(말라크):이슬람교는 천사를 신과 인간의 중간적인 초자연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천사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고 <성령>으로서 예수를 강화시키는 가브리엘, 나팔을 불어 천지의 종말을 고하는 이스라필, 만물의 질서와 생명을 감시하는 미카엘, 죽음을 관장하는 이스라엘의 네 천사 외에, 하늘의 보좌(寶座) 곁에서 항상 신을 찬송하는 천사, 사람의 선악을 기록하는 천사, 지옥을 지키는 천사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신의 명령을 배반하고 인간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또는 이블리스), 진이라 하는 영귀, 진 중에서도 특히 힘이 센 이프리트가 있다.

 

⑶ 예언자(나비) 및 성전(聖典;키타브):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지혜나 이성만으로 절대적인 신 앞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고 또한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캄캄한 밤에 홀로 남겨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신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한 이래 계속 예언자들(사도들)을 각 공동체(움마)에 보내어 올바른 신앙과 행위규범을 전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아브라함·이삭·요셉·모세·다윗·솔로몬·요한·예수 외에, 살리흐·슈아이브 등 28명의 이름이 코란에 올라 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총수가 약 12만 4000명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이 예언자들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가 마호메트이며, 특히 모세·다윗·예수·마호메트는 신으로부터 각기 천계서(天啓書)로 <율법> <시편> <복음서> 및 <코란>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계시 및 성전 내용은, 보편적 일신교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며, 코란은 앞의 성전들을 확증하고 보정(補正)하는 마지막 성전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코란 이전의 여러 성전들은 왜곡되어 본래의 계시를 올바로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은 마지막으로 마호메트를 보내, 인간이 지켜야 할 신조(信條)와 법(法)을 완전하게 제시해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하도륵 했다는 것이다.

 

⑷ 내세(아히라):천지만물은 과거의 어느 순간 신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영원하지는 않다. 곧 천지만물의 종말의 때는 온다. 종말은 천변지이(天變地異)로 나타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기의 계시에는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언하는 내용이 많다. 모든 것이 멸망한 뒤에, 죽은 자들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신 앞에서 생전의 신앙과 행위를 심판받는다. 신앙이 깊고 행위가 올바른 사람은 천국에서 평안한 생활을 보내고,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한 자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이런 것들에 관한 코란의 기술(記述)은 구체적이고 사실적(寫實的)이다.

 

⑸ 예정(카다르):과거·현재·미래에 인간과 세계에 일어나는 일이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늘에 수호(守護)되어 있는 서판(書板, 56:78)>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란에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최선의 보답을 주신다(53:31)>는 내용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부분도 많다. 이 자유의지와 예정의 문제는 타우히드의 문제와 함께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은 신학적 논의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결국,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대한 신의 관여를 부정하는 자유의지론(카타리파·무타질라파)은 이단시되고, 인간 자신의 의지적 관여를 일체 부정하는 극단적인 예정설(자브리파)은 배격되었으며,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갖는 윤리적 책임과 조화된 형태의 예정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이 정통설로 받아들여졌다. 이 밖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정통신조로 인정하고 있다. ① 코란은 신의 말씀이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② 믿는 자는 내세에 최대지복(至福)으로서 신을 보게 된다. ③ 죽은 자는 무덤 속에서 문카르와 나키르 두 천사의 심문을 받는다. ④ 죄로 인하여 신앙이 증감(增減)되지 않는다. ⑤ 큰 죄를 범한 자를 위하여 사도들은 신과 인간을 중재할 수 있다. ⑥ 마호메트는 각성(覺醒)한 상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천상비행(天上飛行)한다. ⑦ 성자(聖者)의 기적은 진실하다. ⑧ 예언자 다음으로 훌륭한 인간은 초대 정통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2대 우마르, 3대 오트만, 4대 알리의 순이다. ⑨ 이맘(칼리프)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 ⑩ 죄인의 뒤를 따라서 예배해도 그 예배는 유효하다. 11 성자가 예언자의 영역에 도달하거나, 인간이 신의 명령이나 금지가 소용없는 영역에 도달하는 경우는 없다.

 

<오주>
⑴ 신앙고백(샤하다):<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그 사도(예언자)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앙의 길로 들어갈 때 고백하는 말이며, 예배나 그 밖의 경우에 무슬림이 항상 표명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코란에는 없지만, 이것은 무슬림이 되는 것과 무슬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명하는 일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일신교의 원리를, 뒷부분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마호메트를 통해 신이 계시한 말씀(코란)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⑵ 예배(살라트):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양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1일 5회씩(새벽·정오·오후·저녁·밤)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형식을 따라 행한다. 금요일 정오, 단식 직후의 제사(祭祀), 희생제(犧牲祭),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원제(祈願祭) 등을 지낼 때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본다.

 

⑶ 자카트:희사(喜捨)나 시혜(施惠)를 뜻한다. 사다카가 자발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것인 데 대해, 자카트는 일정량 이상의 재산에 부과되는 종교세(宗敎稅)·구빈세(救貧稅) 라고 할 수 있다. 금전·곡물·가축 등 종류에 따라 과세율이 정해져 있으며 가난한 사람, 나그네, 고아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세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무슬람 여러 나라들은 자카트를 개인의 발의(發意)에 맡기고 있다.

 

⑷ 단식(사움):이슬람력의 제9월, 즉 라마단월에 행하는 단식을 말한다. 단식하는 사람은 새벽부터 해가 지기까지 일체의 음식을 끊고, 근신(謹身)해야 한다. 병이나 여행으로 단식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달에 똑같은 일수(日數) 만큼 단식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베품으로써 보상(補償)할 수 있다. 단식기간은 인간 최대의 욕망인 식욕을 이기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환기시키는 때라고 한다.

 

⑸ 순례(하지):이슬람력 제12월, 즉 두알히자월 7∼10일 사이 메카의 카바신전 및 메카 근교의 성역(聖域)을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 능력과 재산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 일생에 1번은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상의 오주를 <이바다트>라고 하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봉사의무를 말한다. 이에 대해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예를 들어 혼인·상속·계약·매매·재판·형벌·성전(聖戰) 등을 규제하는 인간의 의무관계를 <무아말라트>라고 한다.

 

이바다트와 무아말라트가 이슬람법(샤리아)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법학(피크)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란 이와 같은 생활규범 속에 표시되어 있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이슬람교는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무슬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일상과 다른 특별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자각적으로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슬람은 그것을 추상적인 도덕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활규범까지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 속에 현세의 복지(福祉)와 내세의 구원이 있다. 왜냐하면, 신이 그 말씀 속에 보여준 명령은 이슬람의 정의를 뜻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신에게 순종하며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슬람의 신앙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나아가서 국가적 형태를 취하려고 한다.

 

이슬람의 이 실천적 성격은, 최초로 그리고 가장 고도로 발달한 학문이 신학이 아니고 법학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명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슬림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어떠한 행동이 신의 뜻에 적합한가>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규범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제일의 근거인 코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과정에서 코란학과 문법학, 나아가 고시학(古詩學)과 전승학(傳承學)이 생겼고, 이슬람법 해석의 방법론을 밝히는 법리론(法理論) 외에 신학(칼람)이 생겼다.

 

역사 : 정통칼리프시대


예언자 마호메트는 교우들에게 성전 코란과 공동체 및 무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의 모범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여러 부족들의 배교(背敎;리다)로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칼리프)>로 선발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 아부 바크르가 다시 통일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대정복(大征服)을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를 아라비아반도의 동·서로 확대시켰다. 이 정복을 수행한 세력은 아랍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전사단이다

 

. 그 뒤 3대 칼리프 오트만으로부터 4대 알리로 넘어가자 공동체는 다시 내란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家)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었으며, 이에 깊이 관련된 파(派)가 하와리지파였다. 그들은 이슬람공동체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파이며,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에 의한 세속화를 종교적 위기로 보아,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 두 파와 싸웠다.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되자 정통칼리프시대는 끝이 났으며, 이후 90년 간 공동체 지도권은 옴미아드가(옴미아드왕조)가 독점했다. 이러한 기존 이슬람체제(나중에 수니파)에 대하여, 공동체 지도권은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시아파 그룹과 옴미아드왕조 체제를 비(非)이슬람적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지파는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옴미아드왕조시대


반(反)옴미아드왕조 움직임에 대하여 옴미아드왕조는, 신앙은 행위(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무르지아파의 설을 근거로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탄압을 가했다. 이 옴미아드왕조시대에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으나 정복에 의해 즉시 이슬람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옴미아드왕조 말기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서쪽으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북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구(舊)비잔틴제국령 및 에스파냐, 동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더스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영역확대에도 불구하고 옴미아드왕조시대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않았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과 아랍을 중시하는 정책이 비(非)아랍무슬림 및 경건한 신도들의 불만과 반발을 낳았으며, 이것이 시아파·하와리지파 등의 운동과 결부되었다. 또한 아랍의 부족대립이 이것과 얽혀 반(反)정부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750년 옴미아드왕조는 붕괴되고 정권은 아바스왕조로 넘어갔다. 옴미아드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공동체를 확대하고, 그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속에서 유지, 발전시켰지만 공동체를 이슬람적인 성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무엇이 이슬람적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


아바스왕조시대


아바스왕조는 국가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 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구했다. 그리하여 쿠라이시족 출신의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아래 단일국가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실현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달과 함께 고대오리엔트·헬레니즘·그리스도교 및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이슬람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1세기 뒤 칼리프의 실권은 약해졌으며, 각지에 독립·반(半)독립 왕조들이 나타났다. 특히 10세기 무렵,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왕조가 칼리프를 칭했으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시아파내 카르마트파가 지배했다. 에스파냐에서는 같은 수니파인 후(後)옴미아드왕조가 칼리프를 칭하면서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시아파 부와이왕조의 아미르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서 일어난 수니파의 셀주크왕조에 의해 칼리프의 권위는 회복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한층 깊게 한 것은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의 침공이었으며, 1258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아바스왕조 칼리프가 멸망했다. 몽골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세계에 타격을 주었으며, 아랍적인 고전이슬람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담당자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수피즘과 이슬람세계의 확대


수피즘이란 이슬람신비주의를 뜻한다.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신학적 사변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에 반대하고 행위의 동기, 성전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9세기 무렵 발생한 것이다. 수피에게 있어 타우히드(신의 유일성)라고 하는 것이, 다만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신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명상 속에서 자아의식을 무(無)로 하고, 자기와 신이라고 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초월한 극한상황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신을 실감하는 것(파나)을 뜻한다. 이러한 사람을 성자(聖者;왈리)라고 하며, 수피들은 그 전형(典型)을 예언자 마호메트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일체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신에게만 사념(思念)을 집중하는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이슬람법은 이와 같은 수행을 의무로 규정짓고 있다. 이리하여 고전이슬람이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통교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것에 비해 수피즘은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통교하는 개인형(個人型)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곧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었다. 12∼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오로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이화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성자에 대한 신앙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교단(타리카)의 형태로 이슬람세계 전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14세기 이후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대한 오스만제국은 16세기 술레이만1세 무렵, 남쪽으로 예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주변 아랍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통일국가를 만들고, 술탄은 칼리프를 칭하여 수니파 이슬람세계의 수호자로 등장했다. 16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술탄 셀림 1세가 시리아를 정복했을때, 13세기 초기의 수피사상가 이븐 알아라비의 묘를 건립한 것은 이 왕조의 수피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무렵 페르시아에서는 일한국·티무르왕조를 거쳐 이란민족을 통일하고 12이맘(시아파의 한 파)의 사파비왕조가 일어났다.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오스만제국과 대립하면서 16∼17세기 아바스 1세무렵 정치적·문화적 융성기를 맞이했다. 수니파 이슬람세계에서 이븐 루슈드 이후 소멸했던 그리스철학의 전통은, 수피즘과 융합한 페르시아의 시아사상 속에서 살아 있었고, 몰라 사드라를 정점으로 하는 사상가들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인도대륙에 이슬람문화가 발전한 것은 13세기 이후부터이다. 즉, 인더스강 상류의북서변경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고르왕조 이후, 무슬림의 본격적인 인도침입이 개시되었다. 1206년에는 고르왕조에 이어 델리술탄왕조(노예왕조)가 성립되었지만, 1526년 무굴제국이 등장하여 무슬림의 전(全)인도적 지배를 확립하고, 이슬람화를 한층 더 진행시켰다.

 

무굴제국은 16세기 후반 악바르대제 때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했다. 이슬람이 동남아시아·중국·아프리카 등으로 전파되어 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로 인해 아랍무슬림이 활동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자 이슬람은 몽골인 정복자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터키인·이란인·인도인·말레이인·인도네시아인·중국인·아프리카인 속에서 존경받는 무슬림을 찾아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 이 발전과 이슬람화에 활력을 준 것은 수피적 이슬람과 수피교단의 성자 및 상인들이었다. 16∼17세기를 정점으로한 발전의 시기가 지나고 이슬람세계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피들은 체험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며, 이성(理性)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은 주술화되었다. <신에게로의 귀의(타와쿨)>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무활동·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었고,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현상(現狀)과 동향(動向)


침체된 이슬람공동체의 자세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인도의 샤 왈리 알라와 아라비아반도의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이다. 샤 왈리 알라는 영국이 인도로 진출할 무렵,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각성에 자극을 받아 내부개혁을 통해 쇠퇴하는 무굴제국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것은 중세적 이슬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나(예언자가 보여준 範例)와 수피즘을 순수한 형태로 결합한 이슬람이었으며, 그의 개혁사상은 후세에 전해져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화되었다. 이에 대해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는, 이슬람공동체의 쇠퇴와 타락은 수피즘적 협잡물이 부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코란과 수나의 순수한 원시이슬람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네지드에 있는 사우드가문(家門)의 이븐 사우드와 동맹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네지드지방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랍의 투르크인 정부에 대한 반항은 중세이슬람의 근대이슬람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와하브파의 운동은 오스만제국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운동 자체는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성립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와하브파가 가지고 있는 우상파괴적 개혁사상은 무슬림 속에 잠자고 있던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켜 공동체현상에 눈을 돌리게 했다. 19세기 후반 이슬람공동체 전체가 서양의 침략 위기에 놓이게 되자 자말 웃딘 아프가니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했다. ① 세계의 무슬림이 단결해서 <이슬람의 땅>을 방위해야 한다. ② 이슬람 땅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강화하고 전통적 이슬람의 악폐를 고쳐야 한다. ③ 이렇게 해서 지난날의 통일적 이슬람국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④ 이슬람은 근대문명과 모순되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 종교이다. 자말 웃딘 아프가니가 역설한 이 범(汎)이슬람주의의 꿈은, 제1차세계대전 뒤 1924년, 터키인 케말 파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해 칼리프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 그러나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개혁사상은 내셔널리즘과 작용하여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鄕愁), 호교(護敎), 근대주의적 이슬람해석과 함께 그 뒤의 근대이슬람사상 및 개혁사상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의 제자 무하마드압두는 전통적인 아즈하르대학을 개혁하고 이슬람법을 재해석하여,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사상을 살리려고 했다. 한편, 이와 같은 근대주의적 이슬람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전통적인 울라마(學者)가 아니라, 원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무슬림 동포단(同胞團) 등의 행동주의를 지지했다. 제2차세계대전 뒤 이슬람공동체는 민족국가로 분열되어 각기 정치적 독립을 달성했는데,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모습은 다르다.

그 예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세속화를 단행한 터키, <이슬람공화국>을 이슬람의 근대적 이념의 국가형태로 보는 파키스탄,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는 왕제(王制)의 사우디아라비아, 79년 팔레비왕조를 넘어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공화국과 리비아를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이슬람공동체가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974년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한 뒤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슬람을 부정하고 압도적 다수인 힌두교도와의 공존을 목표로 한 인도무슬림이다.

 

한국의 이슬람교

 

최초의 한국이슬람교도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강제이주된 한국인들 중 극소수가 그곳에 정착한 무슬림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 광복 후 이들이 귀국하여 국내에 이슬람을 정착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본격적인 포교는 6·25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1955년 9월 한국이슬람협회를 창립했으며 최초의 이맘을 선출했다. 56년 <청진학원(淸眞學院)>을 개설하여 교육사업을 실시했고, 61년에는 문교부에 <한국이슬람교협회>라는 사회단체로 등록했으며, 65년 격월간지 《이슬람의 소리》를 창간하여 세계 267개 무슬림단체에 무료로 배포함으로써 한국이슬람의 국제적 활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66년 군소교단을 통합한 <범협의위원회>를 해체하고 새로이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를 발족했으며, 67년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로 법인등록하고, 70년 서울특별시 용산구(龍山區) 한남동(漢南洞)에 이슬람성원인 모스크를 건립함으로써 한국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수 종교가 공존하고 있고 같은 유일신앙인 기독교의 확산과 이슬람의 종교적 특성 때문에 독자적인 한국이슬람교의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