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1. 종교란 무엇인가?

好學 2011. 1. 30. 18:52

1. 종교란 무엇인가?

 

 

1) 인간과 종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의 삶과 함께 해 왔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라든가 매장지, 주거지 등 유물과 유적지에서 이미 종교적인 행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어느 문화권에서나 종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종교는 인간이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그 이해와 가치관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의 하나로서도 종교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리하여 종교는 관습을 비롯해서 규범과 윤리 등 사회제도와 예술, 정치, 경제, 국제 관계 등 온갖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종교적 삶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구 조사 자료에 의하면, 특정 종교의 신자라고 스스로 답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반이 넘는다.  통계 숫자로만 보면, 종교에 친화적이지 않은 이른바 과학의 시대, 또한 세속화의 추세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종교 인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굳이 특정 종교에 성직자나 신자로서 참여하지 않더라도, 어느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많건 적건 종교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시간의 단위를 이레를 한주로 묶어서 계산하면서 그 이레를 주기로 하여 정기적으로 휴일을 갖는 것은 이제 세계 공통의 관습이 되었다. 그런데 잘 알려졌다시피 그 관습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우주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정 공휴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은 특정 종교 교조의 생일을 기리는 것이고 개천절은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제정된 기념일이다.  또한 가장 큰 명절인 설날과 추석에는 온갖 종교적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식목일은 한식과 겹쳐서, 성묘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풍속의 날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뜻밖의 곳에서도 종교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의 산물을 향유하는 것과 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서로 결합하기에 어색하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 기술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무궁화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고사를 지냈다거나,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새로 구입하면 우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동차를 새로 사면 떡 한 시루 올려놓고 촛불 켠 제상(祭床)을 마련해서 무사고, 무고장을 빌며 고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직접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기는, 종교학자들은 인류가 워낙 그 특질적 본성으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라는 말이 그 점을 가리킨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호모 파베르(homo faber),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등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특성 이외에도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워낙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를 운위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모는 그런 여러 가지 본질적 특성을 다 고려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행태에는 그 모든 방면의 특성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특정 종교에 참여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외형적인 차원의 구별일 뿐이다.  아무리 무종교인이다, 또는 비종교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간인 이상 그런 외형 아래 깊숙한 본성의 차원에서 이미 종교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곧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사안을 두고 벌이는 담론의 핵심 주제가 된다.  그러니까 또한 역으로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지성,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 또는 경제 및 정치 행위 등으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운위할 때, 그런 특성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정리된 보편적인 답변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답변을 끌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발휘되느냐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되는 모양, 즉 종교 현상이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부터 고대 문명의 종교들, 그리고 지금껏 전 세계의 많은 인류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쉽게 싸잡아 부르는 인간의 행태는 사실상 극히 다양한 모습과 내막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우리가 종교라는 말과 가장 흔히 연관시키는 것이 신(神)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 종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 개념과 신에 대한 신앙을 포함하지 않는 종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에서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 개념을 크게 확장하여, 도(道)라든가 붓다 등도 편의상 신이라 부르자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에서 신과의 관련이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신이라는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개념이 너무 다양한 것들을 한꺼번에 가리키게 되어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그런 규정은 인간의 종교성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난관으로 인해서,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래도 종교를 정의해 보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여러 가지 종교 정의가 제시되었다.  한 때에는,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찾으면 그것이 곧 종교의 본질을 말해 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기원을 찾는 방법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원용하였다.  진화론은 워낙 생물의 진화 과정에 관하여 제시된 이론이지만, 생물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모든 부문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화론적인 시각의 핵심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단순한 상태에서부터 복잡한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 각지로 탐사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다양한 종교에 관해 수집되는 자료의 양이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는데, 이 진화론적 시각을 그에 적용하여 종교의 진화 과정을 정리하고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우선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들은 원래 해, 달, 별, 바람, 벼락, 계절 등 자연 현상을 그렇게 상징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 자연 현상에다가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작용과 힘을 묘사하다가 보니, 점차 정말 의지를 가지고 세상일을 움직이는 신이 따로 있는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물과 현상에 각자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이른바 아니미즘(animism), 즉 정령신앙(精靈信仰)이 종교의 시원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정령신앙보다 더 단순하게 사물과 현상에 작용하는 어떤 힘을 믿는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조상숭배가 종교의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주술로부터 종교가 발전해 나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세상일들이 일정한 인과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의도하는 대로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방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원인이 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주술이다.  다만 그 인과법칙이 과학적,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릇되게 상정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본떠 인형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해를 끼치면 그 실제 사람에게 비슷한 해악이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그 인과율의 효능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영적인 존재들에게 빌거나 그들의 기분을 맞추도록 제의(祭儀)를 지내는 종교 행위로 발전해 갔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개개인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그 삶을 규율하는 사회의 힘이 신적인 존재로 투사되었다고 하는 종교의 사회적 기원론을 제시하기도 했고, 인간 본연의 공포감, 또는 콤플렉스가 종교를 낳았다고 하는 심리학적 이론도 제기되었다.


종교의 기원을 찾는 그런 이론과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결합하면, 종교가 어디에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도식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사물에 깃 든 힘에 대한 신앙이든 주술이든 간에 결국에는 정령신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차차 이 세상에 여러 신들이 있다고 믿는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즉, 정령들이 반드시 특정 물체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신의 형태와 능력을 갖추게 된 단계이다. 다음에는 신들 사이에 계층화가 일어나 특별히 강력한 높은 신이 부각되는 이른바 대표신교(henotheism) 단계가 되고, 그 과정이 심화되어 결국에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전능의 신만을 섬기고 나머지는 다 그것에 흡수되어 도태되는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잡다하게 수집되는 여러 가지 종교 자료들을 각자 그 진화의 도식 속 적절한 자리에  배치시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화론적 도식은 곧 허물어지게 되었다. 특히, 유일신교의 특징인 최고신, 지고(至高)한 존재에 대한 신앙이 역사적 발전의 꼭대기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나 치명타가 되었다.  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수준의 문명에 머물고 있는 원시 사회에서도 유일신교의 신 관념에 상응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자 절대적인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었고, 더욱이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진화론적 도식에 정반대되는 역(逆)의 과정이 종교의 역사적 전개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나왔다.  원래 유신교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잡다하게 이해되어 다신교, 애니미즘, 그리고 주술이 차례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진화론적 시각의 몰락은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하였다.  다양한 종교현상들을 서구의 유일신교 문화를 기준으로 해서 재단했다는 점, 그리고 이성(理性)을 최고의 준거로 여기며 인지(人智) 발달 수준을 서구적 합리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가늠하는 태도로 임했다는 점 등이 특히 비판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종교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 진화의 과정을 그려본다고 해도 그 모두가 사변적 추정에 불과하고, 사료에 입각해서 검증할 수도 또 반증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추적하기보다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양상으로 종교적 사유와 행위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지, 등등의 주제를 가지고 종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즉, 모든 종교에 공통된 본질적 요소를 찾아서 그것을 종교의 기원으로 여기며 그것으로써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실제로 다양하게 벌어지는 종교의 모습이 어떠하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서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종교 연구의 추이를 대강이나마 길게 언급한 것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헛된 수고를 덜고 의미 있는 결실을 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흔히 종교에 보편적으로 공통된 어떤 핵심적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리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이는 귀납적 결론으로 제시되는 답이 아니라 연역적 선언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의 본질 규정은 대개 특정 개인이나 문화권에서 익숙한 종교 개념을 기준으로 삼아 내려지게 마련이다.  특정 문화권의 종교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종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그것이 하나의 선험적 전제가 된다. 그에 맞지 않는 것들은 통념상 아무리 종교로 인정되어 온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범주에서 억지로 배제시키게 된다.  아니면, 종교의 범주에 끼워 준다고 하더라도 역시 뭔가 좀 잘못된 종교로 치부하게 된다. 불교나 유교를 두고 종교냐 아니냐 따지는 것도, 종교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신에 대한 신앙으로 규정하는 유신론적 문화 배경 때문이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주어진 선입관이나 개인의 취향에 의거해 성급한 규정을 내리기보다는, 우선 통상 종교라고 불리우는 현상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이 무너진 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종교를 어떤 하나의 측면, 특히 종교 자체에서 압도적으로 중시되는 것이 아닌 측면에 준거하여 규정하려고 하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론들은 대부분 계몽주의에 연속되는 합리주의의 시각에서 종교에 접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선 인지(人智)의 발달이 종교를 포함해서 문화 전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건이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임했던 것이다.  아니미즘이든 주술이든 조상숭배든 모두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해 합리적으로 깨우치지 못한 미혹한 인지 때문에 발단된 것으로 보며, 그 이후의 전개 과정도 모두 인간 인식의 변천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 이외의 영역을 방대하게 펼쳐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다 보면, 종교의 활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 너머의 방대한 부분에 대해 눈길을 주지 못하거나 그것을 왜곡되게 보기 십상이다.  인간이 한 개체로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주어지는 근본적인 제약 조건들을 넘어서 무한과 영원을 지향하는 인류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 종교이고 바로 거기에서 종교가 인류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원동력이 나왔는데, 합리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두는 시각에서는 그 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3) 종교의 특징

 

그러한 교훈을 명심할수록 종교에 대해 간략히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서나마 종교 연구자들이 그 동안 많이 사용해 온 종교의 정의 몇 가지를 참고하면 종교가 일반적으로 다른 인간 현상과 구별되는 특징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종교를 "경험적인 존재와 초경험적, 초월적 존재를 구별하면서 경험적인 것이 초경험적인 것에 종속된다고 믿는 일단의 신앙과, 또한 그러한 신앙의 표현하는 일단의 상징(그리고 그런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는 가치)"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자연 및 인간의 존재 질서와, 초경험적이라 할까 아니면 초자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원의 질서를 구별하고 그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는 데에서 종교의 한 특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성(聖)과 속(俗)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특질을 보는 견해도 매우 널리 받아들여졌다.  초경험적인 것을 성스럽다고 하고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속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정의도 앞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이 그 두 가지 질서 또는 차원에 대해 갖는 가치판단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특질이 보다 직접적으로 시사된다.  성스러움에 대해 인간은 외경, 경이의 감정과 태도를 보인다. 루돌프 옷토(Rudolf Otto)는 성스러움의 정서를 분석하여 장엄함에서 느끼는 두려움, 신비감, 그리고 매혹됨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과 장대한 규모의 초일상적 차원을 감지할 때에는 전율을 일으키는 두려움이 엄습하며, 또한 그 세계의 불가사의함, 유현(幽玄)함이 신비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인간이 그 세계를 감히 범접치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성스러움의 정서에는 반대로 그 세계에 이끌려 가게 하는 느낌도 더불어 있다.  성스러움의 세계, 그것은 두렵도록 장엄하고 장대하며 신비하여 그것을 감지하는 인간은 그 앞에서 위축되지만, 한편으로 그에 이끌려서 그것을 향해 가려는 열망이 있다.


근래에 또 많이 운위되어 온 것으로 종교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한 정의가 있다.  궁극적인 권위와 가치를 갖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중요성만 갖는 것을  구별하는 점도 종교의 특징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종교에서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는 것은 그 궁극성이 인간이 다른 어느 부문에서 기울이는 관심에 비할 수가 없다.  이 정의를 제시한 폴 틸릭히(Paul Tillich)도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관심사와 그렇지 못한 관심사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기꺼이 후자를 포기한다. 

 재산, 지위,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종교적 신념 상의 궁극적 관심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포기하는 종교인들이 종교사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어떤 일에 대해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전심전력으로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 그 일에 거의 종교적으로 매달리고 있어'라든가 '그 사람한테는 그 일이 곧 종교야'하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이것도 종교의 한 특징이 궁극적 관심사와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는 데에서 파생된 어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