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1

好學 2011. 1. 30. 18:22

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1

 

a) 이스라엘의 멸망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에 대해 알아 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ㄱ)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ㄴ)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ㄷ)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개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
(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나님, 찬양받으소서."

 ㄹ)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
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b) 중세시대의 유대인

 

유대인은 기독교와 모슬렘의 통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모슬렘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여기지도 않고 코란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을 박해했다.
모슬렘 통치하에서는 기독교 국가에서보다 다소 억압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고난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기독교 국가에 정착한 유대인은 모슬렘 세계에 서구의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 상인이 이러한 무역을 연결함으로써,

 근동과 서유럽을 왕래하는 무역에 종사하게 된다.
이들 유대 상인 중 일부는 궁정과 연결되어 상류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유대인 무역상이 지방 무역에 개입하자,

봉건 영주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유대인 무역상을 활용하였다.
화폐가 중요성을 더 할수록 그들의 활동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모슬렘 세계에 살던 유대인은 또한 아랍 문화를 유럽에 전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십자군은 유대인을 핍박하고 그들의 거주지를 파괴시켰다.
무역과 농업에 종사하던 이들은 생계 유지를 위한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12,13 세기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고리 대금업은 때로 금지 당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자(1348-1349),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는다.
1492년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유대인은 개종을 강요당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이스, 북아프리카, 오스만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 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16세기 주변 세계는 유대인을 격리시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킨다.

16세기에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구역이 할당되었으며 같은 이름이 주어졌다.
이리하여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 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55년에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명에 이르게 되었다.
곧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난다.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어,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한다.
그러나 주변 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 나갔다.
게토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c) 나치의 유대인 학살

 

1933년 2월 28일 히틀러는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후 의심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없이 투옥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33년 독일에는 50여 개 이상의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들 수용소는 나치 친위대가 관장했다.

가장 유명한 수용소는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다.
처음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유럽에서 유태 인종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이 수립되면서부터

아유슈비츠는 유대인 학살의 중심지가 된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하루 1,000명 이상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했다.
강제 노역과 기아,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산 목숨이 아니었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인종 위생 캠프'를 설치하여 유대인을 포함한 900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