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세계 유랑과 유대교 3.
15. 시온운동으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과 중동전쟁
a) 시온운동 (Zionism)
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운동.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b) 중동전쟁
아랍 대 이스라엘 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 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c) 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퇴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d) 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e) 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f) 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서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6.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a) 이스라엘
면적은 2만 425㎢, 인구는 625만 8000명(2001), 인구밀도는 306.4명/㎢(2001)이다.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사악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b) 가자지구
면적은 363㎢, 인구는 75만 5200명(1994)이다.
해안선 길이는 40km, 평균너비는 8km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길쭉하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고 가자 주변에 약간의 과수원과 경작지가 있다.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의 격전지가 되었으나, 1949년 UN의 이스라엘-이집트
휴전협정에 의하여 이집트 측에 편입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랍 난민촌에 살고 있으며, 게릴라의 중요한 기지였다.
1956년 수에즈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으나 1957년 다시 이집트의 영토가 되었고, 1967년 중동전쟁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와 함께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는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 점령지의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년 5월 가자와 예리코에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c) 팔레스타인
면적은 2만 6,300㎢이며, 영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라고 한다.
동쪽은 요르단강(江), 남서쪽은 시나이반도,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에 접한다.
지중해를 따라 좁고 긴 평야가 펄쳐지고,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져 중앙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의 동쪽은 경사가 급한 계곡을 이루며, 그 계곡을 요르단강이 흐르고 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이고 비는 적다.
현재 이 지역의 80%는 이스라엘 영토이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 및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결과 요르단 ·이집트령(領)이 되었던 요르단강 서쪽
연안지역과 가자 지구도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베들레헴은 1995년 12월 이스라엘로부터 반환되었다.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른 것은 BC 12세기에 팔레스타인인(人)들의 지배를 받게 된 뒤부터이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여 솔로몬왕 시대에는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되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BC 8세기), 유다 왕국은 신(新)바빌로니아에(BC 6세기) 멸망당하였다.
이 지역은 또한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636년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뭉쳐진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팔레스타인은 오스만투르크령 시대
(1516~1917)를 포함, 이슬람교도들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다만 그 동안에도 12세기의 제1차 십자군(十字軍)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여 이곳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세계대전 기간 중 팔레스타인 처리문제를
두고 영국이 두 가지의 모순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둘러싸고 아랍 ·유대인 사이에 심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移住)와 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를
실력으로 추진하고 미국의 지원도 얻어내어 1948년에는 이스라엘을 건국하였다.
1967년의 중동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비롯하여 부근 여러 나라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의 아랍인들이 요르단 ·레바논으로 달아났으며, 1948년의 전쟁 이후 이곳을 떠난
사람들을 합하여 이른바 팔레스타인 난민의 숫자는 300만 명이나 된다.
이들 사이에는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소망이 있다.
1964년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삼고 여러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PLO의 싸움은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비약적인 진전을 보았다.
같은 해 라바트에서 개최된 아랍 수뇌회의에서 요르단의 후세인왕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였으며, 1975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현재 108개국이 PLO를 승인하고 있다.
1979년 3월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조인되어 요르단강 서쪽 연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
자치문제를 두고 양국간의 협의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d) 유대인 (Jew)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고대에 유대인은 원래 유다, 즉 유다 지파(약속의 땅을 점령한 12지파 중의 하나) 혹은 유다 왕국의(북이스라엘
왕국과 대비되는) 구성원을 의미했다.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 후 유대교 신봉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예후디라는 용어(라틴어 Judaeus, 고대 프랑스어 Gyu, 현대 프랑스어
Juif, 독일어 Jude, 영어 Jew)가 사용되었는데, 유수 이후의 생존자들(과거 유다 왕국의 주민들)만이
이스라엘인으로서 고유의 주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BC 721년 아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뿔뿔이 흩어졌고 점차로 다른 민족들에게
동화되었음)
유대인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유다이우스(Judaeus)와 히브리어의 예후디(Yehd)에서 비롯된 그리스어
이우다이오스(Ioudaios)에서 나온 말이다.
예후디라는 말은 〈구약성서〉의 뒷부분에만 나오는 형용사로서 이복형제인 베냐민의 자손과 함께 유다 왕국을
이루고 있던 야곱의 넷째 아들 예후다(유다)의 후손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즉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유색인(有色人: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종교적으로 유대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이디시어(語)·헤브라이어 사용자, 유대적 문화(유대曆, 시나고그, 특유의 풍속·요리 등)의 보존자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또한 디아스포라 뒤에 가속화한 유랑 때문에 유대인은 민족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스라엘 국민 중에는 많은 아랍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대다수의 유대인은 전세계에 분산되어 있으므로,
유대인은 현재 민족이 아니다.
유대인이란 형질·언어·문화·국적을 막론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유대교도인 자의 자손이라는 조건을 첨가할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유대인이라 생각하고 타인으로부터 유대인 취급을 받고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도 유대인을 이와 비슷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의 인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1,300만∼1,400만으로 그 반수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
이것은 유럽의 유대인이 19세기에 세계 유대인 총수의 약 80%, 1930년에 약 60%였던 것과 대조적이며, 그 변화의
원인은 유럽의 유대인 박해를 피하여 이주한 때문이다.
학자·예술가의 수는 상대적으로 많지만, 대부분의 유대인은 도시에 사는 노동자.중산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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