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15과 출애굽기(1)(1-12장):애굽에서의 이스라엘 1

好學 2011. 1. 29. 22:15

제15과 출애굽기(1)(1-12장):애굽에서의 이스라엘 1

                                     
A. 서  론


1. 명 칭
 1) 히브리 성경: "웨엘레 쉐모트"(`또...이름들은 이러하니라')
                 "쉐모트"(`이름들') 

 2) 헬라어 70인경: "엑소도스"(εξδοs: "나간다")
  (출 19:1)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란 말에 근거함.

 3) 라틴어 벌게이트 역: "Exodus"

 4) 영어성경과 개역 성경
  영어성경은 `Exodus'라고 하였고, 개역 성경은 "출애굽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출애굽이 이 책의 주요 주제이긴 하지만, 이 책에는 출애굽 사건 외에도 율법과 성막에 관한 많은 언급들이 있으므로 이것이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말해주는 완전한 제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 저자와 기록 연대

  오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출애굽기의 저자는 모세이다. 이는 B.C. 3C경에 실라의 아들 예수가 쓴 `지혜서'(45:5)에 언급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막 1:44, 요 7:19-22) 사도들에 의해서도 인정을 받았다(요 1:45). 또한 출애굽기 자체도 이 책이 모세가 썼다는 사실을 즈억하고 있다.-(예)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출 24 :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출 34 : 27).- 출애굽기에는 가끔 모세가 3인칭으로 등장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1인칭을 3인칭으로 개체화하는 표현기법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기법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서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모세의 소명이 기록된 출3장의 내용은 이 책을 쓴 사람이 모세임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해준다.


3. 기록 목적

 

 1) 역사적 목적
  가. 야곱의 일가가(약70명)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 (약200만 명)으로까지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이러한 계산은 남자의 수가 60만 명(민1:16)이었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에 하신 언약대로 (4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일에 대해 간증한다(창 15:13-16).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전 우주에 걸친 크신 능력과 주권을 행사하셨다.

  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임을 고백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이 언약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2) 교리적 목적
  가. 유월절 어린양과 홍해를 건넌 사건을 통해 묘사된 `구속과 구원'의 주제.
  나. 거룩한 백성이 언약 백성으로 지켜야 할 율례들.
  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창 13:14-,출 3:7-)에 신실하신 하나님.

 3) 기독론적 목적: 여러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를 계시함.
  가. 모세와 그리스도: 모세는 사환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하심(신18:15).
  나. 유월절양과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유월절양으로 인류를 위해 희생됨(출12:,고전5:7).
  다. 성막과 그리스도-성막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요1:14).
  라. 대제사장과 그리스도-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한 대 제사장이다(히 7:25).
  마. 기타: 5대 제사, 7대 절기, 출애굽, 홍해 도하(구원, 세례), 만나 등.


4. 내용 개관

초점

구원

예배

구분

노예
생활
1-2

모세
소명3-6

10대
재앙
7-10

유월절

11-12

홍해
도하
13-15

시내산까지
16-18

십계명

19-24

성막
설계
25-31

우상
숭배
32-34

성막
건축
35-40

구원의 준비

구원을 위한 사역

구원

훈련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준비

주제

내용

노예 생활 하는 이스라엘

구속과 하나님의 은총

예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노예생활과 속박

구원과 예배

율법수여, 성막 건축

애굽에서

시내 산을 향해

시내 산에서

장소

애굽

광야

시내 산

시간

430년

2개월

10개월


 B. 내용 연구

* 참고: 애굽 역사 개관

1. 고왕국과 제1 중간기(주전 3000-2133년; 1-10왕조)-제1 황금기와 제1 중간기
  주전 3000년에 나르메르가 델타 지역을 통일함으로 최초의 이집트 통일왕국을 건설함. 그 후 제 1-3왕조 기간동안 이집트는 발전을 계속했고 제 4왕조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주전 2500년경). 이때는 이집트의 제 1황금기로서 피라밋이 건설된 시기이다. 그러나 이집트는 제 5왕조에 이르러 약해지기 시작하고, 제 6왕조에 이르러 완전히 무력해지고 말았다. 그 후 제 7-10왕조에 이르는 기간은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제 1중간기라고 부른다.

2. 중왕국과 제2 중간기(주전 2133-1785년; 11-17왕조)-제2 황금기와 제2 중간기
  제 11-12왕조의 때에 이집트는 중왕국 시대였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다시 나라을 통일하고 국경을 확장했다. 이 시기에 이집트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벌였고, 국가체제를 정비했다(제 2황금기). 그러나 계속된 13-15왕조는 무력한 왕조였기 때문에 이 기간 중에 이집트는 국력이 매우 쇠약해졌다. 이로 인해 아시아계인 힉소스 민족이 이집트왕을 누르고 왕이되어 제 16-17왕조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13-17왕조 기간을 제 2중간기라 부른다.

3. 신왕국(주전 1567년-1080년; 18-25왕조)-제3 황금기와 제3 중간기
  제 18왕조부터 20왕조까지의 이집트는 신왕국시대였다. 이때에 이집트는 다시 정치,경제,문화의 각 부분에서 크게 번영했다. 이때에 이집트는 북으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으로 수단까지 영토를 확장했다(제 3황금기). 그러나 그 후에 계속된 제 21왕조부터 25왕조까지는 다시 국력이 약해�으며, 이 기간을 제 3중간기라고 부른다.

4. 후기왕조(1080년-30년; 26-31왕조)
  제 26-30왕조 기간에 이집트는 이집트 출신의 왕들이 다스렸지만, 국세가 쇠퇴하고 외적의 침공으로 인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가 제 31왕조에 이르러 페르시아 출신의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은 알렉산더를 막지 못하여 332년에 헬라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알렉산더 사후에 이집트는 프톨레미스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헬라와, 시리아, 그리고 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살게되었다. 그러다가 주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의 자살과 함께 이집트는 로마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때에 이집트는 로마의 옥타비누스 장군이 다스렸다. 그 후 이집트는 다시 부흥하지 못했다.

    

1. 출애굽의 필요성(1-2장)

 1-1. 신음하는 이스라엘(1장)

 
* 배경 역사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때는 중왕국 기간의 제 12왕조 때(주전 1991-1786년)였다. 이때에 애굽은 제1 중간기를 마치고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고, 상하 이집트로 나뉘었던 이집트는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시기에 이집트는 다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그 영향력이 국경을 넘어 세계로까지 확장되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도착한 때(주전 1876년경)는 바로 이 중왕국 시대인 제 12왕조때였다. 이 때의 이집트 왕은 매우 호전적인 세누세르트 3세(주전 1878-1871년)로 보이며,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준 왕은 그의 선임자인 세누세르트 2세(주전 1894-1878년)였을 것이다.

 
* 이스라엘 후손들의 증가(1:1-7)


  이 부분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과 그 형제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요셉이 죽은 때는 주전 1805년 경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이집트 제 12왕조의 아메넴헤트 3세(주전 1841-1797년)가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이 시기에 야곱의 가족은 애굽 사람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축복해 주셨으며 그 수가 크게 증거하게 되었다. (출 1:7)을 보면 이때에 이스라엘이 "생육이 중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다했다"('파라')는 말은 `열매가 많다'는 말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식하다'는 말은 `늘어났다'는 말이며, `창성하다'("쉐레츠")는 말은 `�지어다닌다', 또는 곤충이나 동물들이 `우글우글 거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강대하다'("아촘")는 말은 글자 그대로 `강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크게 증가하고 강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 같이 되고,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약속을 비옥한 애굽 땅에서 이루시고 계셨다(창 35:22-26, 46:8-27 참고).

 

 * 바로의 박해 정책(1:8-22)

 * 요셉을 알지 못하는왕은 누구인가?


  출애굽 기자는 그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 일부 학자들은 이 왕은 아시아계 사람으로 애굽인을 누르고 정권을 차지한 힉소스 민족일 것으로 주장한다. 힉소스 민족이 왕이 된 제 16왕조는 요셉이 죽은 지 약 75년 후에 애굽의 왕이 되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힉소스 민족이 애굽을 점령한 후에 엄청난 숫자로 증가해가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인과 연합하여 자기들을 몰아낼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힉소스 왕이 이스라엘 박해 정책을 폈다고 주장한다.

 2)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은 힉소스를 쫓아내고 다시 권력을 잡은 애굽의 제 18왕조였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힉소스 왕조는 요셉과 같은 셈족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야곱의 가족을 관대하게 대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야곱의 가족이 크게 번성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애굽의 제 18왕조가 일어나서 힉소스 왕을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잡은 후에 크게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해서 박해정책을 펴게되었다고 주장한다. 힉소스를 몰아낸 이집트 신왕조의 제 18왕조 시기에 애굽은 가장 강력한 시기였으며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을 과시하던 때였다. 제 18왕조의 첫 통치자인 아모스(주전 1584-1560년)는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의 통치권을 회복했고, 그의 손자인 두트모세 1세(주전 1539-1514년)는 나일강의 셋째 폭포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인 두트모세 3세(주전 1504년-1450년) 역시 더욱 더 영토를 확장했으며, 나라를 크게 안정시켰다. 그리고 두트모세의 아들인 아멘호텝 2세의 군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였으며, 이때에 애굽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바로의 이스라엘 박해 정책

 1)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로 삼고 힘든 육체적 노동을 시킴.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 위에 감독을 세우고, 그들에게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박해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이 더욱 더 번성하게 만드셨다. 그러자 애굽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인해 고민하였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흙 이기기나 벽돌 굽기, 또는 농사일과 같은 고역을 시켜서 괴롭게 만들었다(8-14).

 2) 산파들에게 남자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함.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고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러자 바로는 이번에는 산파들에게 남자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셨다. 산파(십브라, 부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남자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는 산파들에게 왜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살려두었느냐"고 책망하였다. 그러자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이 건강해서 자기들이 가기 전에 먼저 출산을 했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3) 산파를 축복하신 하나님
  바로의 박해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그 수가 증가했으며 강성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준엄한 명령을 듣고도 이스라엘 자손을 해치지 않은 산파들과 그 집과 자손들을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신실 하게 지켜주셨다.


 1-2. 구속의 지도자 모세의 출생(2장)

 

 * 모세의 출생과 성장(2:1-10)
  계속되는 바로의 박해 정책을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크게 고통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할 사람을 준비해 주셨다. 그 사람은 바로 레위 지파인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난 모세였다. 이 때의 역사의 무대는 신왕국 시대인 제 18왕조 때였다. 이 왕조는 애굽 본토인으로 힉소스족을 몰아내고 다시 왕권을 회복한 왕조였다. 바로는 히브리 부모들에게 남자 아이를 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이로 인해 히브리 부모들은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께 중대한 죄를 짓는 행위였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자를 제사장 지파인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게벳을 통해 태어나게 하셨다.

  모세의 부모는 그 아이가 준수한 아이인 것을 보고 그 생명을 해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3개월간 그 아이를 숨겨서 키웠다(히 11:22). 그러나 3개월이 지나면서 모세의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를 숨겨 키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그 아이의 생명을 맡기고 갈대상자에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을 칠한 후에 그 아이를 나일 강 위에 떠내려보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때에 바로의 딸을 나일 강으로 보내셨다. 바로의 딸은 강에서 아이를 발견하고 측은한 생각이 나서 그 아이를 살리도록 지시했다.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다가 공주가 아이를 건지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주에게 유모를 데려올 것을 허락 받고 모세의 친부모를 소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극적으로 모세를 살려 주셨으며, 공주의 양아들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우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친부모의 양육을 통해 모세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신앙을 준비시켜 주셨다.

 

 * 모세를 구한 공주는 누구인가?
  모세가 탄생한 때(주전 1526년)는 두트모스 1세가 애굽을 통치 할 때였다. 두트모스 1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바로 모세를 강에서 건진 하�수트 공주였다. 하�수트 공주의 아버지인 두트모세 1세는 정실부인을 통해서 4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3 자녀를 모두 죽게하시고, 하�수트 공주만 살아 남게 하셨다. 이로 인해 그녀는 왕실에 남은 유일한 법적인 상속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였기 때문에 후처가 낳은 아들과 결혼하여 왕위를 잇게되었다.

  공주의 남편은 후에 두트모세 2세가 되었는데(주전 1514-1504년), 그가 왕으로 있을 때에 모세의 나이는 12살-20살 정도였다. 그는 하�수트 밑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과 문물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두트모세 2세 역시 하셉수트를 통해 아들 없이 딸 하나만을 낳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의 딸 역시 후처가 낳은 다른 아들과 결혼하여 왕권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후에 하�수트의 딸과 결혼하여 왕이 된 사람은 두트모세 3세라고 불렀다(주전 1504-1450년). 그가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겨우 10살도 안된 나이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모든 권력은 하�수트에게 손에 주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원하기만 하면 하�수트를 설득하여 어린자녀 대신에 애굽의 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 미디안으로 도피한 모세(11-25)
  그러나 모세는 어렸을 때에 부모님을 통해 배운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세의 친부모는 그가 히브리인이며 따라서 애굽의 영화보다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모세는 어느 날 히브리 민족을 박해하는 애굽인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땅에 묻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소식이 다른 히브리인을 통해서 발설되었다. 모세는 바로를 두려워하여 광야로 피신하였다. 그 동안 두트모세 3세는 계속하여 모세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견제해 왔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바로가 자신이 히브리인을 위해 애굽인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모세를 제거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를 두려워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모세를 다시 한번 훈련시켜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혈기와 인간을 의지하는 애굽적 사고 방식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로서 40년 동안을 보내게 하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지리도 익히고, 인도자로서의 온유한 성품을 연단 하셨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한 후에 아들을 낳았다. 모세는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쫓아내다', `추방하다')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자신이 애굽에서 추방당해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이 곳에서 모세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하셨다.  

 

 *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응답(23-25)
  얼마 후에 두투모세 3세가 죽게 되었다(23).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