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샤마니즘과 기독교 3.

好學 2010. 11. 13. 22:45

 

 

 

샤마니즘과 기독교 3.

 

C. 샤마니즘이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에 끼친 영향

    

★ 1. 神觀이 끼친 영향

 

샤마니즘의 최고주제신 개념으로서 하느님 사상은 유일신 여호와를 같은 용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하나님을 아무 저항감 없이 쉽게 받아 들이게 했다.  우리 민족이 몇 천년전 부터 우주의 최고神을 그렇게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그렇게 잘 받아들이고 부르는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기독교의 본래적인 하나님일 것인가 하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샤마니즘적인 사고방식이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끼친 몇가지의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神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눅 15:20)이시며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시며 (롬 5:8) 우리의 전존제를 꿰뚫어보시며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리의 소원을 아시는 분 (마 6:8)이므로 하나님과 나 사이는 부모와 자식보다 더 극진한 생명적 관계가 맺어지는데 반해 샤마니즘의 하나님은 소원성취의 도구로나 불리워질 뿐이다. 

그것도 윤리적인 결단이나 神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신앙적인 결단과는 관계없이 제물을 바쳐서 그 효과를 기대하는 극히 공리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다.  샤마니즘의 神觀은 불교를 비롯한 모든 외래종교들을 변질시켜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역시 극히 현실주의적인 除災招福의 기복종교로 변질되게 했다는데 한국기독교의 문제점이 있다. 

 “한국인은 질병이나 재앙을 만났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도와 예배가 다분히 무교적인 신사역할을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 결과로 일반신자들은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차원높은 결단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명적인 순종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적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신앙태도를 갖게 되며, 가정방문이나 안수기도하는 교직자들이 샤만(Shaman)적인 중재역할을 하도록 요청하며 기대한다.  하나님의 인격적 섭리에 대한 기대보다 그의 영력의 주술적인 효과를 기대하는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의 기독교가 특별히 오염되어 있는것이 성령에 관해서이다. 

샤마니즘에서의 神은 엑스타시(Ecstasy)를 통해서 체험하도록 되어 있다.  神이 내렸다는 증거, 神과 교통하고 있다는 증거가 모두 엑스타시를 통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수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개체와 성령의 개성, 성령의 사역, 성령의 세례 같은 문제에 대해 크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령을 받았다’, ‘성령으로 거듭났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케 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성령의 열매를 그 생애에 맺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 5:22),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마치 입신해서 엑스타시에 빠져야만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신비체험이나 방언, 엑스타시 (Ecstasy)만 높이 평가하고 갈구하는 일이 교회내에서도 흔하다.  또한 그런 엑스타시의 체험을 누구에게나 요청하며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과는 거리가 먼 육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는 풍조가 교회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2. 샤마니즘의 영혼관과 내세관이 끼친 영향

 

클락 (Clark) 이 적절히 지적한대로 샤마니즘에는 심판사상이나 인간의 신앙유무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내세의 구원개념이 없다.  저승의 개념도 극히 막연하여 모퉁이를 돌아선 “어느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샤마니즘에는 윤리적이고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없다.  내세는 누구나 자연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것이고 혹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무당을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세나 구원을 위해 자기의 사상이나 생활태도를 바꿀필요도 없고 굿이 끝나면 자신에게 아무 달라진 것이 없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타신앙이 자랄 토양을 형성케 했다.


기독교의 근본교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우리는 누구보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한국인의 마음에 맞고 매력을 끌 수 있다. 예배시나 특히 부흥회때 열띤 음성으로 “믿습니다!”, “믿사오니”를 크게 외치는 것을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는다는 것 즉 믿음의 개념이 어느 정도나 신앙의 자기결단과 관련되어 있는가가 문제다.  도대체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관이 없이 심지어는 자기 인격까지 이양해 버리고 그것이 가장 잘 믿는 것으로 확신하는 샤마니즘적인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한국인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어느 정도나 체득하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신자의 수가 늘지 않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곧 새로운 존재에 이르지 못하는데 있는것이다.”

 

★ 3. 降神체험과 엑스타시 (Ecstasy)가 끼친 영향

 

강신체험과 엑스타시가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샤마니즘적 사고방식은 기독교안에서도 신비체험과 엑스타시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있어야만 옳은 교회요 성령받은 신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성령의 사역과 은사로 오해되었고, 무당의 강신체험이나 엑스타시 비슷한 경험의 간증이 교회에서 환영받게 된 이상풍조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김태곤 교수가 기독교의 성령체험을 샤마니즘에서의 입신현상과 비교해 조사한 것을 보면 성령체험자 거의 모두가 성령체험의 증거로 손끝이 떨리고, 진동이 오고, 몸에 화끈하는 불을 느끼고, 방언을 말하며, 환상과 환청을 체험하는 등 모두가 외형적인 것들 만을 제시하고 있다.

    

★  4. 무당과 굿에 대한 기대가 끼친 영향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치병적인 기능을 과다하게 기대한다.  목회자들도 그 기능을 전문적으로 행사하려고 그 기능을 전도와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까지 삼으려 한다.  그리고 교인들의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안수기도나 치병의 효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등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게 된다.


병의 치료를 하나님께 맡기고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하고 겸손히 그 결과를 기다리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강제하여 억지로라도 기적을 발생시키려는 태도이다.  神靈을 「불러 내리는」 샤마니즘의 의식처럼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불러내리겠다는 생각이다.  안수기도나 통성기도나 금식기도를 하나님을 불러내리고 그에게 내 간절한 소원을 더 인상깊게 전달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극히 위험한 오류에 속한다.


예배의식에 있어서도 상당수의 일반신자들이 말씀과 복음중심의 예배에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큰소리로 울고 통성기도하며 열광적인 분위기를 유도하는 집회에서만 만족을 느끼고 은혜받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말씀과 복음중심의 예배는 어쩐지 답답하고 이해하기도 힘든데 반해 열광적이 집회에 참석하고 나면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고 새로운 힘이 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에서 만족과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열광과 엑스타시와 소음과 격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종의 샤마니즘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Ⅲ . 결    론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기독교는 많은 공헌을 남겼다.  우리민족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고 크게 부흥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다른 종교들이 퇴보내지는 답보상태에 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기독교만은 교회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양적으로 놀라운 발전과 팽창을 거듭해 왔다.  최근에는 물질적으로도 비대해져서 거대한 교회건물들이 경쟁이나 하듯이 들어서고 수만명의 교인들과 수억원의 예산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가 어떤 질적인 성숙이나 근원적인 부흥없이도 이렇게 양적으로 팽창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기독교는 처음에는 샤마니즘과 대결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취근에 와서는 오히려 기독교가 샤마니즘화 되어 간다는 지탄을 받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다.  어느 사이엔가 샤머니즘은 한국교회내에 깊숙히 숨어 들어왔다.”


교회는 하나님을 더 이상 자주 “불러내려” 병치료나 요청하는 그런 하나님으로 끌어 내려서는 안된다.  믿는다는 말은 연발하면서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는 모르고 삶과 신앙의 어떤 결단도 없이 샤머니즘적인 의타신앙에 젖어사는 신자들을 그냥 방치해 두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기독교를 치병과 방언과 엑스타시의 종교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본질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그 복음의 능력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결단하게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도록 해야할 것이다.  치병기복의 신앙만 강조하지 말고 죽음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을 가르쳐야 한다. 

 일부 신자들의 인기에 영합해서 그들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또 교회를 부흥시키는 방편으로 샤마니즘적인 분위기를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것은 단연코 시정되어야 할 일이라 하겠다. 

샤마니즘은 한국 기독교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러한 샤머니즘을 민속의 자리로 돌려보내 민속유산으로서 보존해야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1. 김득황, “한국 종교사”, 서울:해문사,1963.
2. 김태곤, “한국 무속연구”, 서울:집문당,1981.
3. 유동식,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1975.
4. 윤성법, “기독교와 한국사상”,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4.
5. 정진홍,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서울:전망사,1980.
6. 분도출판사편집부, “종교란 무엇인가 ”, 서울:분도출판사,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