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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프로기사면 다인가요?

好學 2010. 11. 13. 22:10

[ESSAY] 프로기사면 다인가요?

 

 

조혜연 프로기사 八단·고려대 3년

눈물이 흐르는 사이에 옷은 마르고 있었고
난 느지막이 대국실로 돌아갔다.
물벼락을 맞고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상대 대국자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돌을 던졌다.

대학영어 수업에서 영어 연극 UCC 동영상이 팀 과제로 주어졌다. 교양수업인 만큼 팀원들의 전공은 다양했는데, 영문학을 전공하는 나를 포함해 법대생 두 명, 경영대생이 두 명, 정외과생 한 명이 과제를 위해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국수전 예선 날짜가 UCC를 찍기로 한 바로 그날 잡히는 바람에 참 난처했다. 보통 때처럼 예선전이 격일로 진행되는 경우라면 상대 대국자의 양해를 얻어 비어있는 날로 대국날짜를 조정할 수도 있으련만, 급하게 잡힌 국수전의 예선 진행은 날마다 예선이 진행되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하기만 했다.

마침 그날 나랑 두게 된 대국자가 어릴 적부터 함께 공부해 온 같은 도장 후배여서 좀더 반가운 마음으로 내 사정을 설명했고 일단 점심시간을 좀 앞당겨 달라고 부탁했다. 12시에 학우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국 중에 슬그머니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1시에서 2시로 정해져 있는 점심시간을 12시로 앞당겨 상대 대국자의 식사시간에 동영상을 찍고 오면, 팀 과제도 해결하고 대국도 계속 이어갈 수 있으니 힘들더라도 그나마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심을 먹지 못하겠지만.

그런데 막상 동영상을 찍으려다 보니 예정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대국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각자 3시간으로 세팅되어 있는 대국용 시계는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초읽기에 돌입하고 그 안에 착수하지 않으면 바로 시간패. 한국기원과 고려대는 택시를 타면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서 난 종종 시합과 시험을 동시에 치르곤 해왔다. 시험을 재빠르게 친 다음 택시를 잡아타고 기원으로 날아가는 식이었다. 이른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버전!

"저. 죄송합니다만, 예상치 못하게 시합이 생기는 바람에 더 이상 이 일을 진행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정말 죄송합니다만, 다른 날 촬영을 마저 하면 안 될까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거듭 머리를 조아려 내 사정을 설명한 다음 학우들의 도움을 청했고, 남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자고 승낙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법대 여학생 두 명. 영어실력이 너무 뛰어나 평소 수업시간에도 자주 눈길이 가던 그녀들은 팔짱을 낀 채 얼음장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금 뭐라고 했어요? 뭐 시합이 있다고요? 다른 날 하자고요?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고 남학생들은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빠른 억양으로 내 얼굴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들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옳은 만큼 아팠다.

내 마음속에는 그녀들이 던진 "프로기사면 다인가요?"라는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보통 학생이 아니라 특수 신분이라는 것, 사실 그것은 대학 캠퍼스에서 어떤 명분도 핑계도 될 수 없었다. 우리는 공정한 관계여야 했다.

난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프로기사면 다인가요?"에 박힌 그녀의 하이톤 악센트는 자꾸만 이명처럼 귓속을 때렸다. '울면 안 돼. 여기서 울면 안 된다고. 그래. 상대 대국자도 힘들게 하고 학우들도 괴롭혀가면서 난 지금 뭐 하는 거야.'

하필이면 여주인공의 역할을 맡아 연인과 춤추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 나에겐 고통의 시간 그 자체였다. 우거지상을 한 채 연인과의 행복한 춤이라니.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두 연인이 잔디밭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난데없이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더니, 온 천지에 물벼락이 쏟아졌고 우리는 꼼짝없이 비 맞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과제는 그렇게 간신히 마쳤고 일초라도 빨리 대국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난 발걸음을 선뜻 옮길 수 없었다. 비척비척 걷다가 아무도 없는 빈 교실을 발견하고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누가 뭐라니? 시합을 포기하면 간단하지. 아니면 학업을 포기하든지. 그렇지만 난 학생이고 프로기사야. 둘 다 동시에 해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아?'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프로기사들의 대국장에서 내가 매일매일 학교수업을 들어야 하는 대학생이란 점이 참작될 수 없듯이, 거꾸로 캠퍼스의 학교 활동에서도 프로기사라는 점 역시 이런저런 봐주기의 핑계가 돼서는 안될 것이었다. 그래도 나도 사람이었다. 그녀들에게 대들고 싶었다. 뭐, 잘난 직업이라고? 바둑이 뭔지 아니? 바둑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짐작이나 할 수 있냐고.

눈물이 흐르는 사이에 옷은 마르고 있었고 난 느지막이 대국실로 돌아갔다. 물벼락을 맞고 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상대 대국자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돌을 던졌다(패국을 선언했다).

대국자에게 주어진 제한시간이 끝나면 그냥 판을 걷고 가버려도 될 것을, 나의 정신없는 사정을 이해해주고 끝까지 기다려 준 후배에게 미안했다. 마치 나의 괴로움을 측은히 여기는 듯 조심스레 바둑 알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그의 손길을 보자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져 나왔던 물줄기처럼 강렬한 그 무엇이 내 마음을 휘감았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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