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글]긍정.행복글

[ESSAY] 애틋함에 대하여

好學 2010. 11. 13. 22:08

[ESSAY] 애틋함에 대하여

 

 

정현종·시인

내가 학교에 있었던 2003년 겨울,
학교에서 제일 작은 석조건물이며 60년쯤 된,
그 앞에는 역시작은 잔디밭 뜰에 밤나무며 홍단풍나무들이 있었던
그 아늑한 건물을 헐어버리고…

매주 주말에 청계산에 간다. 얼마 전에는 거기 갔다가 수통을 놔두고 왔다. 다 내려와서 남은 물을 마시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그게 없었다. 아이코, 난감하기 짝이 없어서 다시 올라갈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 올라갔다가 내려온 산을 즉시 다시 올라가는 건 거의 없는 일이며 생각만 해도 힘이 좍 빠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잠시 앉아서 다시 올라갈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수통이 거의 30년쯤 가지고 다닌 것이고 형태와 기능이 마음에 들어 아끼는 것인 나머지, 그걸 잃어버렸다 생각하니 애틋한 마음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있었던 곳은 사람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니 내일 아침 일찍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 만일 누가 가져갔으면 새것을 하나 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요새 나오는 수통은 재료나 기능이 더 좋지 않을까…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이튿날 나는 그 자리에 다시 갔고 수통은 거기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애틋함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과 사람의 일들, 그 일들이 일어난 장소와 시간, 물건들이 망라될 수 있을 터인데, 그러한 것들을 둘러싸고 우리의 마음, 기억, 감정, 감각들이 혼융되어 만들어진 증류액 같은 것이 애틋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떻든 애틋함은 귀중한 것에 대한 귀중한 감정일 것이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을 두루 관통하는 움직임이다. 가령, 휴머니즘이나 휴머니티 같은 거창한 말과 활동의 씨앗은 애틋함이라는 감정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고 또 예컨대 정의라는 말에 육체를 부여하는 것도 일이 온당하게 되어가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그동안 인간이 강조하고 예찬해 온 미덕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크고 작은 공공사업에서 온당하다고 생각되는 판단과 처신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반가울 뿐만 아니라 애틋한 친밀감도 느끼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러한 태도가 마땅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만나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린 마음, 선량한 마음 역시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그런 마음을 알아보고 감동하는 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다 아는 말인데, 예를 들어 길이나 집도 작은 것은 애틋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모든 오솔길은 그것 자체가 이미 애틋함의 표상인데, 그것은 고독, 내면, 고요함 쪽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며, 요새 벌써 한없는 이복(耳福)을 누리게 하는 소리들의 원천인 귀뚜라미며 베짱이 등 작은 생명들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솔길은 그리하여 꿈꾸는 공간이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몽상에 잠길 뿐만 아니라, 그걸 바라보기만 해도 오솔길은 벌써 한없는 몽상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오솔길은 그것 자체가 몽상의 육화(肉化)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집 또한 오솔길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그것은 애틋한 느낌에 잠기게 하는데, 그것이 만일 건축자재나 형태에서 나무랄 데 없고 또 오래된 것이며 그래서 그게 서 있는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추억과 역사가 스며 있는데 어느날 없어진다면 그 애틋함은 참으로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는데, 내가 학교에 있었던 2003년 겨울, 학교에서 제일 작은 석조건물이며 60년쯤 된, 그 앞에는 역시 작은 잔디밭 뜰에 밤나무며 홍단풍나무들이 있었던 그 아늑한 건물을 헐어버리고 큰 건물을 짓겠다고 해서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과 함께 학교 당국과 싸웠던 것. 그때 학교 당국과 교수들에게 보낸 두 편의 짧은 글이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적어볼까 한다.

"학교의 옛 건물과 주변 공간은 한 학교에 그 고유한 가치와 위험을 부여하는 기억의 감각적 실체로서, 그것들은 그 학교의 뿌리이며 따라서 생명입니다. 학교의 옛 건물들은 그 고풍스러움을 통해 시간의 깊이와 학교살이의 연속성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의 고향이 되며, 우리의 청년시절을 전설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옛 건물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이 가난한 인생들과 시간들을 신화로 만들면서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옛 건물을 바라보고 그 앞으로 오가며 그걸 느낍니다."

그 건물은 문과대학 바로 옆에 있어서 2층 내 방 창으로 20여년 동안 바라보고, 숲을 산책하기 위해 그 옆으로 수없이 지나다닌 공간이니 아마 남다른 감회를 가졌던 듯한데, 실은 그걸 없앤다고 했을 때(그건 지금 없어졌다) 내가 분노와 함께 강한 애틋한 감정에 휩싸였던 것은, 한 프랑스 철학자가 정확히 짚어준 대로 내가 거기서 '몽상적으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몽상적인 거주'는 실제로 거주하는 것보다 더 뿌리깊은 삶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애틋함이라는 감정에는 그것이 그리움이든 추억이든 슬픔이든 또는 정다움이든 대상을 향해서 움직이는 간곡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마음은 시를 비롯한 예술창조의 중요하고도 자연스런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더군다나 애틋함이야말로 무상(無償)의 감정이라 할 때, 그것은 시의 이상과 일치하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답게 있는 것보다 거대하게 있는 것이 더 쉬운 법'(니체)이라는 말은 인류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특히 시인(예술가)이 아름답게 있기보다 거대하게 있으려 한다면,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거대한 것에 기대고 그 기댐으로 해서 자기가 거대하다고 느껴 가령 기고만장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시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