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대한민국第一號)

[대한민국 제1호] 1950년대 첫 한전(原電) 유학생들

好學 2010. 11. 13. 21:58

 

[대한민국 제1호] 1950년대 첫 한전(原電) 유학생들

 

 

윤세원(왼쪽)·이창건(오른쪽)

1958년 문교부 원자력과장을 맡고 있던 윤세원 박사(전 선문대 총장)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의 호출을 받았다. 외환의 경우 단돈 10달러를 쓸 때도 이승만 대통령의 결재를 받던 시절, 한 해 수천달러가 들어가는 원자력 연구자들의 해외체류 예산안이 비서실에서 거절당하자 다시 올린 게 화근이었다.

비서실장이 "누굴 놀리는 거냐"고 면박을 줬지만 비서실장보다 직급이 한참 아래인 윤 박사는 "공부 대충시키다 들어오게 하면 국가적 손실"이라고 버텼다. 실랑이 끝에 결재안은 이 대통령에게 올라갔고, 비서실의 걱정과 달리 그대로 통과됐다. 원자력에 대한 이 대통령의 기대가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 박사는 우리나라 원자력 유학 1호다. '물리학회 50년사'에 따르면 윤 박사는 김희규 등과 함께 1956년 4월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국제원자력학교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된다. 국제원자력학교에서 유학한 이창건 박사는 "연수생들은 대부분 서울대 등에서 수재로 불리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원자력에 대한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밤잠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공부했었다"고 말했다.

공사현장

아르곤국립연구소의 1인당 학비는 10개월 연수기간을 통틀어 6000달러로 비쌌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미국 국제협력처에서 지원받은 돈으로 유학자금을 댔다. 1기 유학생 이후 4년간 8차에 걸쳐 150여명이 원자력 유학길에 올랐다.

이 원전(原電) 유학생들은 1959년 정부가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세울 때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기 유학생인 윤세원 박사는 1957년 1월 귀국해 원자력과장·원자력연구소 원자로부장을 맡았다. 이들은 1959년 7월 원자력연구소 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전인 '트리가 마크 Ⅱ' 건설을 이끌며 한국의 원자력 시대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원자력연구소 건설부지를 제안하고 공사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며 연구자들을 격려했다.

이런 노력으로 1978년 한국은 첫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를 완성, 가동을 시작했다. 비록 핵심 기술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들여왔지만, 미국에서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지 20년도 채 안 돼 전 세계를 통틀어 21번째 원전 보유국이 된 것이다.

당시 원전 유학생들이 주축이던 원자력연구소는 KNE(현재 KOPEC)라는 자회사를 설립, 미국 벡텔사를 도와 원전 설계 분야에 참여하며 기술을 축적했고 이는 1995년 한국형 원전을 개발하는 기틀이 됐다.

이후 한국의 원전 기술은 계속 발전, 2011년 냉각장치 등 일부 외국에 의존하고 있는 원전 핵심 기술까지 완전히 국산화할 예정이다. 첫 원전 유학길에 오른 지 50여년, 고리1호기를 가동한 지 20여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