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세계文學名作]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메이컴의 수수께끼 1.

好學 2010. 11. 13. 13:07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 -  메이컴의 수수께끼 1. 
     젬 오빠가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상처가 아물어가고 축구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차츰 누그러질 무렵, 
    오빠 역시 후유증에 대한 두려움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오빠의 왼팔은 오른팔보다 약간 짧아졌고, 
    서 있거나 걸을 때면 손바닥이 뒤쪽을 향해 있어서 다소 어색해보였지만, 
    공을 차거나 던지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우린 그 사건에 대해 가끔 논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그 사건의 발단이 이웰 집안 사람들 탓이라고 주장했고, 
    나보다 네 살 위인 오빠는 그게 아니라 훨씬 전인 어느 무더운 여름날 
    딜이 부 래들리를 집 밖으로 끌어내자고 우리에게 말했을 때부터라고 우겼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오빠에게 
    나는 그렇다면 앤드류 잭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 옛날 잭슨 장군이 크릭스 인디언과의 싸움에서 기세를 뻗치지만 않았다면 
    사이먼 핀치가 앨라배마까지 노를 저어 오진 않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고 따졌다. 
    주먹다짐으로 시비를 가려내기에는 우리는 제법 어른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께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우리 의견이 모두 옳다고 했다.
     남부사람들은 해스팅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어떤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록은 조상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이곳에 첫발을 디딘 사이먼 핀치는 영국 콘월 출신으로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인이었다.
    모피와 약을 취급하는 장사꾼이었던 사이먼 핀치는 
    구교도였던 탓에 감리교도들의 박해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하는 수 없이 스스로 감리교도임을 자처하며 
    대서양을 건너 필라델피아로, 자메이카로, 거기서 다시 모빌로 돌아다녔다. 
    이렇듯 여러 지역을 누비고 다니던 그는 세인트 스티븐을 흘러들었다.
    물건을 사고 파는 데 있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격언을 잊지 않고 있던 사이먼은
    장사에 성공을 했고 부자가 되었지만, 청교도적 생활습관에 익숙한 나머지 
    값비싼 옷으로 치장함이 신의 영광에서 벗어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느라 행복하지 않았다.
    고심하던 사이먼은 사유재산에 대한 성경말씀을 접어두기로 하고
    세인트스티븐에서 사십 마일 떨어진 앨라배마 강둑 근처에 
    세 명의 노예와 함께 농장을 만들었다.
    그가 다시 한 번 세인트스티븐으로 떠난 것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였고, 
    아내와 함께 앨라배마로 돌아온 사이먼은 
    딸이 많은 부유한 가정을 이루며 장수를 누렸다고 한다.
    집안 내력에 따라 핀치 집안 남자들은 그들의 영토 사이먼 농장에 남아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이먼 농장은 목화재배를 주로 하였고 
    다른 농장에 비해 생필품은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였으나 
    얼음과 밀가루, 옷감은 모빌에서 배로 공급받곤 하였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사이먼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하는 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이먼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겨우 영토만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이십 세기인 오늘날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적 삶의 뿌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법률을 공부하러 몽고메리로 떠났고, 
    삼촌은 의학공부를 하러 보스턴으로 갔다. 
    고모 알렉산드라만이 사이먼 영토에 남은 핀치 가문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고모는, 강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찌의 흔들림으로 물고기가 잡혔는지를 확인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해먹에서 보내는 조용한 남자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메이컴으로 돌아와 개업했다. 
    메이컴은 핀치 가문의 영토로부터 이십 마일 정도 떨어진 메이컴 군의 마을이었다. 
    법원에 있는 아버지의 사무실에는 
    모자걸이, 침 뱉는 그릇, 체스판, 때묻지 않은 앨라배마 법전 등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맡은 두 명의 소송의뢰인은 메이컴 군에서 교수형을 받은 마지막 죄수들이었다. 
    아버지는 주 정부에 특별사면을 요청, 사형만은 면하도록 변호했지만 
    그들은 하필 메이컴 군에서 악명 높은 하버포드 집안의 문제아들이었다.
    그들은 말다툼 끝에 메이컴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를 
    세 사람의 목격자가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 
    그랬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누구든지 변호하기 좋은 여건이라고 떠들며 
    일급 살인죄를 무죄로 변론해달라고 고집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소송의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할 수 있는 건 그저 교수형에 처해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그 사건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범죄사건을 변호하는 일에 
    심한 혐오감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