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광화문

好學 2010. 9. 12. 21:33

 

[만물상] 광화문

 

 

 

1910년 조선이 망하자 일제는 경복궁에 총독부 청사를 세우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다. “아아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이미 경각에 달렸구나.” 서슬 퍼런 일제의 폭정 아래서 용감하게 나선 것은 일본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에도(江戶) 성(城)이 파괴될 처지에 놓인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호소했다. 일제는 광화문을 없애지 못하고 1927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겼다.

▶광화문은 태조 때인 1395년 경복궁 창건과 함께 궁궐의 남쪽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처음 이름은 ‘정문(正門)’이다. ‘태조실록’은 새 궁궐의 작명 책임을 맡은 정도전이 붙였다고 전한다. 세종 때 집현전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광화문’의 유래로 ‘빛이 나라 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해석이 있지만 의견이 엇갈린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대원군이 1868년 왕권을 강화하느라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복원됐다.

▶광화문은 600년 간 역사의 격변을 지켜봤다. 이방원이 1398년 반대파 정도전을 처단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온 곳이 광화문이었다. 중종 반정 때도 박원종이 이곳으로 반군을 몰고 왔다. 종종 사대부들의 상소 장소이기도 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자 유생 수백명이 문 앞에 모여 눈물로 무고를 호소했다.

▶6·25 때 폭격을 맞아 사라진 광화문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 때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자리에 들어섰다. 박 대통령이 쓴 광화문 현판 글씨를 놓고 문화재청이 작년에 정조 임금 글씨로 바꾼다는 방안을 내놓아 논란을 빚었다.

태조 때 광화문 현판을 누가 썼는지는 기록이 전혀 없다. 대원군 때 현판을 쓴 주인공은 그간 학계에서 서화가 정학교로 여겨왔지만 얼마 전 발굴된 ‘경복궁 영건일기’에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기록된 훈련대장 임태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문화재청이 2009년까지 광화문을 남쪽으로 14.5m 당겨 원래 위치에 목조로 짓고 월대(月臺· 섬돌)와 해태상을 광화문 앞에 복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옛 모습을 되찾는 마지막 작업이란다.

서정주는 광화문을 가리켜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라고 노래했다. 예로부터 광명(光明)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을 숭고한 광화문의 모습에서 되찾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