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고사성어]故事成語

[살롱] 부자와 君(군)

好學 2010. 9. 12. 21:27

 

[살롱] 부자와 君(군)

 

 

 

조선시대 부자는 농토(農土)가 많은 사람이었다. 1년 쌀 수입이 1만 석이면 ‘만석군’이라 불렀고, 1000석이면 ‘천석군’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7~8인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이 대략 5가마 정도였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쌀 1만 가마를 환산하면 2000가족, 1만5000명이 1년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지역적으로 볼 때 산간 지역이 많아서 논이 적은 영남 지방에서는 3000석 이상의 부자가 나오기 힘들었지만, 평야가 넓은 기호 지방에서는 1만 석 이상의 부자가 수두룩했다. 영남 지역이 상대적으로 먹고 살기 힘든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천석군(君), 만석군(君)’이라고 호칭할 때 끝에 붙는 ‘군’(君)이라는 표현이다. ‘군’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여기서 군(君)은 영지(領地)가 있는 경대부(卿大夫)나 제후(諸侯)를 지칭한다. 보통 국가에 큰 업적이나 공을 세우면 왕이 그 보상으로 상당한 넓이의 토지를 주어 제후로 삼았다. 이것을 봉군(封君)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군’은 봉토(封土·領地)가 있는 제후를 가리키는 품격 높은 호칭인 것이다. 식객(食客) 3000명을 거느렸다고 하는 고사(故事)를 남긴 맹상군(孟嘗君)이 그러한 사례이다.

그러나 나라에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봉토를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돈을 벌어서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부자들을 가리켜 ‘소봉(素封)’이라고 불렀다. ‘소봉군(素封君)’의 약자이다. 비록 제후라고 하는 공식적인 벼슬은 받지 않았지만, 재산은 봉토를 가진 제후에 못지않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부자를 부를 때 ‘군’(君) 자를 집어넣은 호칭이 성립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적인 대접과 존경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부자는 결코 혐오와 질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군(君)의 대접을 받았던 천석군과 만석군은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았는가. 그럴 수가 없었다. 흉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밥 굶는 사람을 책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존경과 책임은 같이 가는 법. 이번에 삼성가(家)의 8000억원 사회 헌납을 계기로 한국의 최고 부자인 ‘삼성가’(家)도 ‘삼성군’(君)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好學의 漢字文學 > [고사성어]故事成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롱] 江流石不轉과 言論   (0) 2010.09.12
[살롱] 千山大學   (0) 2010.09.12
[살롱] 三笑會   (0) 2010.08.21
[살롱] 음의 공덕   (0) 2010.08.21
[살롱] 響山古宅 사랑방  (0) 201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