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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텅 빈 시간을 찾아서

好學 2010. 8. 21. 18:19

 

[ESSAY] 텅 빈 시간을 찾아서

 

 

정이현·소설가

시계를 볼 필요도,이유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마냥 텅 비어 있는시간은 내 인생에서 진정 처음이라는것을.

라오스에 다녀왔다. 루앙프라방. 라오스의 옛 수도다. 벼르던 휴가지를 그곳으로 정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뭐? 어디라고?" 라오스인도 옆 어디쯤 붙어 있지 않으냐는 질문은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물론, 세계 지도에서 라오스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뜨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묻곤 했다. "거긴 왜 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뉴욕타임스에서 뽑은 최고의 여행지 1위래요.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사를 중얼거렸다. 내부의 자신감이 콩알만 할 때는 권위 있는 이름에 슬쩍 기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이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므로. 대체 나는 왜 라오스에 가려는 것일까?

방콕에서 프로펠러기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날아서 루앙프라방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몹시 작았다. 얼마나 작은가 하면 비행기가 하강을 하며 착륙 구도를 잡을 때 '설마 지금 저기 착륙하겠다는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작았다. 로비 역시 내가 여태껏 가 본 어떤 나라의 어떤 공항보다 초라했다. 퇴락해가는 소도시의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 정경과 비슷했다.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땐 당황할 기력마저 없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태양이 머리통 한가운데 맹목적으로 내리꽂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느릿느릿 움직였고, 차가 달리는 길엔 누런 흙먼지가 꽃처럼 피어났다. 짐을 풀자마자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국립박물관. 대문은 닫혀 있었다. 허술한 자물쇠가 채워진 철문을 공연히 흔들어 보다가 그냥 돌아섰다. 너무 더운 한낮시간에는 공공기관조차 잠시 쉰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시내라고 해봐야 길이가 총 200미터나 될까. 좁다란 길을 따라 프랑스풍의 이층짜리 목조주택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 짧은 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온몸에 땀이 뻘뻘 흘러내리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빨리 걷기란 불가능했다. 눈에 띄는 아무 카페에나 쓱 들어가서 라오라오 맥주를 마셨다.

해가 질 무렵엔 뒷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을이 지는 광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노을이 졌다. 붉게 물든 하늘은 분명코 아름다웠으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거나 할 만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제야 나는 이 많은 젊은이들이 왜 죄다 여기 산꼭대기에 모여들었는지 눈치 채고 말았다. 노을을 구경하는 것 말곤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슬그머니 옆을 보니 모두들 더없이 심심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쿡 웃음이 터졌다. 오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라오스의 첫날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다음 날 또한 다르지 않았다. 오늘 무얼 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쌀국수와 열대과일로 아침을 먹는다. 동네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사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오후의 일정은 매번 즉흥적이다. 어떤 날은 과연 멀쩡히 굴러갈까 의심스러운 미니버스에 실려 코끼리를 타러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구명조끼는커녕 폐타이어 하나 비치되지 않은 통통배를 타고서 황토색 물이 흐르는 메콩 강을 왕복 네 시간 동안 부유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카페에 들어앉아 책을 읽은 날도 있다. 벽에는 아기손바닥만 한 도마뱀들이 소리도 없이 지나간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깜깜해지면 잠을 잔다. 시계를 볼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마냥 텅 비어 있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진정 처음이라는 것을.

이십대 시절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백수 기간이 내게도 존재했지만 그때도 나는 늘 분주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준비 중'이었다. 논문을 준비했고, 입사시험을 준비했으며, 곧 벼락처럼 들이닥칠 삼십대를 준비했다. 서른살 무렵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고부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쓰고, 쓰고, 또 썼다. 그것이 성실한 직업인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여행을 떠날 때면 맨 먼저 여행서를 구입하곤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목적지까지 가는 저렴한 교통편을 이 잡듯 뒤지고 입소문이 좋은 숙소를 예약한다. 내가 예약한 가격보다 싼 금액을 내건 여행사 사이트를 뒤늦게 발견하면 짜증이 솟구친다. 꼭 방문해야 할 명소를 알아보고, 블로거들이 추천한 맛있는 식당을 메모한다. 하루하루의 동선은 이동시간과 휴식시간까지 고려하여 결정된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동선에 맞추어 열심히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한순간 삐끗했다간 크나큰 낭패를 보고 말 테니 언제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나는 그러는 것이 합리적인 여행을 위한 기본자세인 줄 알았다.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글로 된 여행서 한 권 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떠났던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나날들.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식당에서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했고(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기쁨은 더 컸다), 가끔 무참히 실패하기도 하였으나 한 끼쯤 비싸고 입에 안 맞는 음식을 먹었어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립박물관도 방문하지 못했지만, 아침마다 산책했던 사원의 이름이 무언지 지금도 알지 못하지만, 라오스는 내 마음속에서 영영 잊히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