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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하늘이 예술이어요"

好學 2010. 8. 31. 21:43

 

[ESSAY] "하늘이 예술이어요"

 

 

 

김광웅·서울대 명예교수

훌훌 털고 묶이지 않고 사랑 없이살 수는 없을까?
참고 또 참고 살면 될 듯하지만…
그러나 얻어 봤자 그게 나를 묶는 짐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좋아서 선택했어도 짐이다.

추석 즈음해 내게 손님이 왔다. 해맑은 웃음과 찡그린 울음이 뒤범벅이 된 녀석, 돌도 채 안 된 외손주가 뭘 안다고 내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엄마 품에 안겨 먼 길을 왔다. 반갑기 그지없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족이라는 얼개에 묶인다. 출생신고하는 순간부터 법과 제도에 묶인다. 묶이기로는 사랑이 법과 제도에 못지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묶이기를 자초한다. 뭔가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래야 편하다고 생각해서인가 보다. 세상 사는 데는 본질만 추구하면 된다는 입장과, 관계를 파헤쳐야 한다는 입장이 나뉜다. 다 맞는 이야기지만 '관계' 쪽은 남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남성은 여성을 통해 남성을 확인하고, 여성은 남성을 통해 여성을 확인한다"고 괴테가 말했다. 74세 노인이 17세 소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을 확인하려는 안간힘이었을 게다. 사랑 없인 세상을 살지 못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남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생 내내 지적(知的) 여행을 한다. 학교에서 세상을 알 수 있는 종합지(綜合知)를 배우려고 노력하고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합리적이 아닌 손지식도 괜찮다거나 아니면 부시맨처럼 '야생의 사고'만 할 수 있어도 된다고 배운다. 그렇지만 항상 나는 묶이고 말고, 해방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자초한다.

훌훌 털고 묶이지 않고 사랑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참고 또 참고 살면 될 듯하지만 불현듯 발동하는 '지배의 리비도'가 항상 문제다. 비록 허상이더라도 사랑을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얻어 봤자 그게 나를 묶는 짐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좋아서 선택했어도 짐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메시지처럼 내가 좋아하는 친구,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가고 싶은 곳 등등, 사람은 한 생을 살며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도 그게 다 짐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좋은 음식 아무리 먹어도 체지방만 늘어 건강을 해칠 적이 한두 번 아닌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좋은 것 말고 싫은 것을 택하며 살면 되지 않나? 세상 힘든 것만 택하며 사는 성직자들처럼. 그러나 범인들에게는 좀 무리다. 그러면 어떻게 살까?

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관악산 끝자락에 앉아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휴대폰에 문자가 뜬다. "하늘이 예술이어요." 어, 이거 누가 보냈지? 하늘을 쳐다본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다. 예술이 따로 없다. 순간 여유롭게 떠 있는 뭉게구름 뒤로 내가 사라진다. 예술 같은 가을 하늘이 늘 거기 있어 무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순 덩어리 세상에 대한 생각을 접고 있는 근심 없는 걱정 다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게 현명한 거라는데. 말이야 쉽지.

순진무구한 아이를 반기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이를 사랑하는 것, 이는 상대방이 있어서 가능한 일인데…. 그러나 정말 내가 반기고 사랑하는 건가? 그건 나 자신이 누군지를 알고 상대방이 누군지를 알 때 가능한 일인데…. 한 영국 생물학자의 말대로, 세상엔 시간도 공간도 없고 오직 내가 의식할 때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니까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줄 알고, 우리가 모여 있으니 여기가 장소이고 공간이겠거니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게 아니고 오로지 세상에는 각자 내 소우주만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성적으로 판단해 선택한다는 것도 틀렸다고 말한다. 엊그제 노벨 경제학상을 탄 오스트롬 교수의 연구가 그렇다던가. 공원이나 공기, 아니면 바다에 사는 물고기같이 주인 없는 공공재가 훼손되고 포획될 때 그걸 막기 위해 정부나 시장 둘 중 한쪽에 의존해야 한다는 기존의 학설을 버리라고. 대신 가운데 완충지대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그래서 이성을 금쪽같이 생각하고 지키는 이분법의 논리에서 벗어나라고.

가을 하늘이 자꾸 나에게 재촉한다. 합리적일 필요 없다, 게으르고 싶은 만큼 게을러도 좋다, 대충대충 넘어가라, 설명이 쉬운 쪽을 선택하라고…. 그래 우리는 편견 덩어리다. 하늘빛 때문에 눈알이 시리다. 외손주의 살결이 한없이 부드럽다. 아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아이 덕분일까. 둘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젠 점차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 또한 합리적이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하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에 다가갈 수 있다. 그게 잘되지 않으면 나를 잊을 도리밖에.

'가을하늘을 쳐다 봅니다/ 파란 하늘아래/ 당신이 내가 우리가 보입니다/ 우리 함께/ 손잡고 갑니다/ 가을하늘 그리워/ 마음 열고 갑니다/ 먼 줄만 알았던/ 당신/ 가을하늘은 당신이었습니다/ 가을하늘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늘 같은 임이 있으면 내 삶이 확인되겠지. 그런 사랑이 내 육신이 사그라지는 날까지 내 삶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좀 쉬자. 숨만 쉬자. 몸으로만 느끼자. 가을 하늘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