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의 기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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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큼 사랑과 미움, 존중과 저주를 받은 책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어떤 이들은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성경은 인간을 고무시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상한 행동들을 하게 했으며, 또한 가장 몹쓸 짓과 퇴보적인 행위들을 유발시켰다고 비난을 받았다. 성경으로 인해 전쟁들이 일어났으며, 성경의 갈피 속에서 혁명들이 성숙되었고, 성경의 사상들 때문에 왕국들이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유주의 신학자로부터 자본주의자까지, 파쇼주의자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까지, 독재자로부터 해방자까지, 평화론자로부터 군국주의자까지 온갖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킬 어구를 찾고자 성경을 상고한다.
성경의 독특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과 주제에 있다. 성경은 유일한 신-인(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일반 계시. 역사, 인간의 행동, 양심, 천연계 등이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통찰은 흔히 "일반 계시"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관찰할 수 있고 이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친구, 가족,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의 행복스런 관계와 놀라운 사랑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본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사 66: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복잡 다단한 신호들을 보냄으로써 의문과 대답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끝날 줄을 모른다. 세상은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떻게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누가, 왜 싸우고 있는지, 또한 누가 궁극적으로 이기게 될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특별 계시. 죄는 하나님의 증거를 해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켜,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제한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해답을 얻을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특별 계시를 주셨다. 구약과 신약 모두를 통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의 품성에 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하셨다. 처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그분의 계시를 주셨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궁극적인 계시를 주셨다(히 1:1, 2).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는 명제와 그분을 한 인격체로 계시하는 명제들을 모두 담고 있다. 두 방면의 계시는 모두 필요하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엡 4:21, NIV)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필요가 있다(요 17:3).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지적, 도덕적, 영적 제한을 돌파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분의 갈망을 전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초점이시다.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의 구속주 메시야로 제시한다. 신약은 그분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한다. 각 장마다 상징이나 혹은 실제 상황을 통해서 그분의 사역과 품성의 어떤 면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궁극적 계시이다.
십자가는 두 개의 극단, 즉 인간의 측량할 수없는 사악함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궁국적인 계시를 가능케한다. 그 무엇이 죄악에 빠지기 쉬운 인간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까? 그 무엇이 이보다 죄의 진상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십자가는 자기의 독생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희생인가! 이보다 더 큰 사랑의 계시를 보여주실 수 있으셨을까? 진실로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우주적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 계신다. 멀지않아 갈바리에서 거두신 그분의 승리는 악을 완전히 제거하심으로 절정에 달할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은 다시 연합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특히 같바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에서 볼 수 있는바 우주의 가장 위대한 진리인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의 초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주요 진리들은 이 관점에서 연구되어야만 한다.
성경의 독특성은 그 기원과 근원에 있다. 성경기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기별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신적 근원으로부터 기별들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적 계시를 통해서 그들은 그들이 전해주는 진리를 볼 수 있었다(사 1:1; 암 1:1; 미 1:1; 합 1:1; 렘 38:21 참조).
성경 기자들은 성령을 선지자를 통해 백성과 교통하시는 분으로 가리켰다(느 9:30; 슥 7:12 참조).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말했다. 에스겔은 "그 신이 내게 임하사", "신이 나를 들어"(겔 2:2, 11:5, 24)라고 기록했다. 미가는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채움을 얻"(미 3:8)었다고 증거 했다.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고전 14:32)는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영같은 선지자의 인격과 개성, 이성, 성실성 등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기사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 양식에 따라 신적 명령과, 사상, 생각들을 전달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전달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서로 다른 책들은 그 어휘가 다르며 기자의 교육과 교양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양식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어떤 표현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어와 논리와 수사(修辭) 가운데 당신 자신을 두어 성경상 비판의 대상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필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필촉이 아니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상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의 정신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거룩한 정신으로 물들여진다. 거룩한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혼합되어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오직 한 경우에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정확한 말을 직접 기록하셨는데 곧 십계명이다. 이것은 인간의 작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다(출 20:1-17, 31:18; 신 10:4, 5). 그러나 이것들까지도 인간 언어의 제한성내에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신적 진리이다. 양자(量子) 물리학을 아기에게 가르친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죄악되고 제한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하실 때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의 제한성이다.
성육신이신 예수님과 성경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된 분으로, 신성과 인성이 한 개체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신다고 한 말씀은 성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성경을 다른 문학서들과 구별되게 한다.
성경을 기록하는 데 참여했던 이들은 선천적인 재능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신적 계시가 필연적으로 인물을 변화시켰거나 그에게 영생을 보증하지도 않았다. 발람은 하나님의 조언과는 반대되게 행동하면서도 영감아래에서 하나님의 기별을 선포했다(민 22-24). 성령이 사용하셨던 인물 다윗도 엄청난 죄를 저짙렀다(시 51 참조). 성경의 모든 기자들은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필요로 했다(롬 3:12 참조).
성경 기자들이 체험했던 영감은 조명(照明)이나 신적 지도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이르러오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경 기자들은 때때로 그들이 전달하는 신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기록했던 것이다(벧전 1:10-12).
스가랴는 상징적인 것을 제시받은 후 설명까지 들었다(슥 4). 바울과 요한이 받은 하늘의 이상들은 구두 지시를 동반했다(고후 12:1-4; 계 4, 5). 에스겔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보았다(겔 8). 어떤 기자들은 자신의 이상에 참여하여 그 이상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계 10). 내용에 대하여 말하면, 몇몇 사람에게는 성령이 장래의 사건들을 계시하셨으며(단 2, 7, 8, 12), 다른 기자들은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하여, 혹은 기존의 역사적 기록들로부터 자료를 선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기도 했다(사사기, 사무엘상, 역대하, 사복음서, 사도행전).
성경은 추상적 교리들의 집합 속에서가 아닌 하나님과 인류와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한다. 그분의 자기 계시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건들 속에 뿌리박고 있다. 역사적 설명의 신빙성은 지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골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해는 영생에 이르게 하나 부정확한 견해는 혼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은 특정 인물들에게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취급하신 역사를 기록하도록 명령하셨다. 세속 역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민 33:1, 2; 수 24:25, 26; 겔 24:2 참조).
신적 관점에서 본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를 알려준다. 성령은 기자들에게 특별한 통찰력을 부여하여, 선악간의 쟁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고, 구원을 찾는 백성들을 인도한다.
역사적 사건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한 "표상" 혹은 "실례"이다(고전 10:11),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본(本)" 혹은 경고의 역할을 한다(벧후 2:6; 유 7). 아브라함의 칭의 체험은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된다(롬 4:1-25, 약 2:14-22). 깊은 영적 의미가 가득 찬 구약의 민법까지라도 오늘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록되었다(고전 9:8, 9).
누가는 자기가 복음서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눅 1:4)고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 중 자기의 복음서에 포함시킨 것들을 선택한 기준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었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인도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를 제시하도록 하셨다.
노아의 자제심 부족과 아브라함의 기만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모세, 바울, 야고보, 요한이 보였던 감정의 폭발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역사는 이스라엘의 가장 현명한 왕의 실패, 열두 족장과 열두 사도들의 연약성을 폭로한다.
성경은 추호도 그들의 실수들을 변명해 주거나 그들의 범죄를 극소화시키지 않는다. 성경은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또는 어떤 인물이 되기에 실패했는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신적 영감이 없었더라면 그 어느 전기 저술가도 그토록 지각력 있게 분석한 글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 기자들은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역사 이야기들을 신화나 상징이 아닌 참된 역사적 기록들로 보았다. 수많은 현대 회의론자들은 아담과 하와, 요나, 대홍수 등의 이야기를 배척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이며, 영적으로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마 12:39-41, 19:4-6, 24:37-39).
그러나 오류라고 주장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학자들편의 오해였음이 성서 고고학을 통하여 얻어낸 증거로부터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 중 상당수가 서구적 안목에서 성경의 역사와 풍습을 읽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우리는 인간이란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 곧 신적 행위에 대한 인간의 통찰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때문에 성경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실제로 잘못인 경우보다도 우리의 부정확한 이해에서 기인된 경우가 자주 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과 본문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심판할 것인가? 우리는 결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설명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성취된 예언들은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한다.
성경의 권위
주님의 기별자로서(학 1:13; 대하 36:16)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겔 2:4: 사 7:7 참조)라고 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신적 신임장이요 권위가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인간 대리자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마태는 "이 모든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 1:22)라는 말과 함께 구약을 인용하면서 구약 선지자의 배후에 있는 권위를 시사하고 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매개자요 권위자로 보고 있다. 선지자는 간접 매개자인 것이다.
베드로는 바울의 저작들을 성경으로 분류한다(벧후 3:15, 16).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것에 대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증거한다. 신약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들이 구약의 글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딤전 5:18; 눅 10: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간의 전통과 의견들보다 위에 놓으셨다. 그분은 성경의 권위를 제쳐놓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으며(막 7:7-9),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기를 권하셨다(마 21:42; 막 12:10, 26 참조).
그분은 예언적 말씀의 권위를 강하게 믿으셨으며, 그것이 당신을 가리킨다고 밝히셨다. 그는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39, 46). 당신이 신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지극히 확신에 찬 단언은 구약의 예언을 당신이 성취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눅 24:25-27).
그와같이 그리스도는 성경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권위 있는 계시임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성경을 진리의 본체요 객관적 계시라고 생각하셨으며, 인류를 거짓된 유전과 신화로부터 구원의 지식의 참 빛 속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셨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고백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신적 조명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마 16:13-17). 바울은 이 진리를 강조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뜻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전 2:11)기 때문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다. 오직 "하나님의 깊은 것"(고전 2:10)을 통찰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서만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계시로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기에 이를 수 있다. 그 때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 되고, 그는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성령과 성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성경 진리의 저자시요 계시자이시다.
그러나 기자들이 아무리 연약한 인간이었다 해도 우리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한다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일에 절대적 권위가 된다(딤후 3:16). 모든 인간의 지혜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경 진리는 규범으로서, 이에 의하여 모든 사상은 시험을 받아야만 한다. 유한한 인간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은 막대자로 별들을 재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경은 인간의 규범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의 지혜와 문예보다도 우월하다. 우리가 성경을 판단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성경에 의해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모든 체험과 생각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것들은 성경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하며, 만일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므로 배제되어야만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본서 17장을 보라). 성경의 통일성
성경은 단조롭게 획일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를 띤 증언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기드물게 뛰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다양한 면모 때문에 성경은 모든 시대를 통해 인간의 필요를 더욱 잘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지 않으시고 계속되는 시대들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계시하셨다. 모세가 미디안의 광야에서 기록을 했든지, 혹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기록을 했든지 그 책들은 동일한 성령으로 영감받은 교통을 나타낸다. 이러한 "점진적 계시"에 대한 이해는 성경과 그 통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러 세대의 시간차를 두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의 진리들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신구약은 하나이다.
구약은 예언과 상징을 통해 오실 구주의 복음을 계시한다.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오신 구주 곧 실체화된 복음을 계시한다. 둘 다 동일한 하나님을 계시한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역할을 한다. 그것은 신약을 여는 열쇠를 제공하는 한편 신약은 구약의 신비들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당신과 사귀도록 우리를 은혜스럽게 초청하신다. 그 속에서 우리는 구원의 보증의 풍성한 축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수 있다(딤후 3:16,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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