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법궤
다시 나타난 언약궤
이디오피아에서 보도된 언약궤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침략했던 1935년 미국의 한 신문에 우리의 주의를 끌만한 기사가 실렸다. 9월 21일자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지에 고든 맥그리그가 쓴 ‘왕중 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겪었던 개인적 체험담과 ‘왕중 왕, 유대의 사자(獅子), 기독교의 옹호자, 고대 이디오피아 왕국의 황제, 하나님의 택하신 자’ 라는 많은 칭호들로 불리우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의 면담내용을 보도하였다.
기사의 내용은 고대교회가 보호하여 간직해온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면 이디오피아의 악숨(Aksum)이라는 도시의 교회에 현재 보존되어 있는 낡은 궤가 실제의 언약궤임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 기록에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해서 메네릭 왕조의 시조가 되었던 솔로몬 왕의 아들 메네릭 2세를 잉태하고 본국으로 돌아 오게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메네릭은 장성하자 그는 생부(生父) 솔로몬을 보려고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솔로몬은 아들을 보자 매우 기뻐하며 그를 위해 실제의 언약궤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조품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메네릭 또한 그의 아버지 솔로몬으로부터 상당한 지혜를 물려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송별 파티를 베풀어 그들을 잔뜩 취하게 한 후 모조품을 실제의 궤와 바꾸어서 이디오피아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실제의 궤가 악숨(Aksum)시의 교회에 오늘날까지 보존된 셈이다.
대영 백과사전에는 “악숨(Aksum)시에는 오래된 고대 교회당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교회당에는 솔로몬과 스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토봇(Tobot)즉, 언약궤가 과거부터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5년 9월 호 네쇼날 지오그래픽(The National Geographic)에 Rio B. Roberts가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있다. “한때 그 땅을 다스렸던 여걸 -우리에게는 스바 여왕으로 알려진-에 대한 이디오피아의 각처 널리 퍼져있는 제사장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놀랍게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스바여왕이 예루살렘에 가게 된 동기를 말하고 있다. 당시 솔로몬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스바 여왕은 당시 한 쪽 다리가 삐어서 솔로몬이 이를 고칠 수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예루스알렘(예루살렘)에 갔다는 내력이다. 그녀가 솔로몬에게 예물을 가지고 갔음은 당연한 일이다. 후에 메네릭 1세가 된 아이가 그들 사이에 태어났다. 그 아이는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고 19세가 되던 해 실제의 언약궤와 많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디오피아로 돌아왔다. 이어서 로버츠 씨는 이 궤가 악숨(Aksum)시 근처의 북쪽 경계선 주변에 위치한 어떤 교회당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있다. 고 보도하였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솔로몬 왕의 후손이었을까?
셀라시에 황제는 솔로몬의 후손일까라는 질문을 뒷받침해 줄만한 증거가 충분히 있다. 첫째, 메데릭 왕조를 특정 지어주는 “만군의 왕, 유태의 사자(獅子),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칭호들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어느 나라의 역사적 기록 못지 않게 확실한 이디오피아의 역사적 기록이 있으며 유대의 관습과 신앙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점이다. 셋째, 이디오피아 언어에 히브리어가 혼용되어 있으며 이디오피아의 많은 사람들이 유대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유대인 특유의 윤곽이 뚜렷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용모를 볼 때 그러한 주장을 쉽사리 입증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기록 자체와도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솔로몬 왕이 왕의 규례대로 스바 여왕에게 물건을 준 것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저가 그 신복들로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더라.”(열왕기상 10:13)
“수세기 동안 이디오피아 땅을 다스려온 군주들은 그들의 혈통을 더듬어 가다가 이스라엘왕 솔로몬의 사업과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했던 스바 여왕시대의 기록물을 찾아내었다.”(The Progressive Reference Library)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이디오피아의 역사 속에도 약간 모호한 점이 없지 않으며 수많은 왕조가 거쳐왔고 나라의 경계선도 계속 변하였다. 또 고대 이디오피아 전역을 동시에 통치했던 왕이 한 사람 뿐이 아니었던 시대도 종종 있었다.
언약궤
언약궤는 길이가 5피트, 높이가 3피트, 넓이가 3피트 가량된 아카시아 나무(조각목)로 만든 상자였으며 그 안팎을 정금으로 썼다. 상자의 상단에는 뚜껑을 대신한 금관을 덮어두었고 그것을 속죄소(시은좌)라고 불렀다. 그룹들은 속죄소의 필요 불가결한 요소였다. 날개를 활작 편 그룹들은 한 덩어리의 정금을 쳐서 만들었고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속죄소를 내려보고 있었다. (출애굽기 37:1-9)
금고리 넷을 궤의 네 모퉁이에 달아 이 고리에 장대 둘을 꿰어 먼길을 갈 때 제사장들이 메었다. 장대 역시 금으로 쌌다.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무는 그의 인성을 상징한다. 속죄소가 상징하는 의미는 “속죄하다” 혹은 “덮는다”를 뜻한다. 신약 성서에는 속죄소의 개념이 “화해”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총은 오직 그리스도의 안에서 속죄함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렸다. 일곱은 완전한 수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위해 단번에 드리셨으며 이것은 완전 무결하였다. 궤 안에는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을 기초로 한 두 개의 율법판이 들어있었다. 나중에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궤 안에 함께 추가되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보호하심을 상징하며 지팡이는 부활과 영생을 말한다. 오랜 후에 궤가 솔로몬 성전으로 옮겨졌을 때 궤 안에는 겨우 율법이 새겨진 돌판 뿐이었다.
궤가 성막에 있을 때에는 성막의 가장 은밀한 곳인 지성소에서조차도 궤가 보이지 않았다. 일년에 겨우 한번 대제사장이나 볼 수 있었으며 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에는 궤를 완전히 덮어씌웠다.
활동하는 궤
언약궤에는 위엄과 영광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지성소 안의 궤였다. 속죄소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하늘에 있는 궤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이 궤에 나타났던 적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고 요단 강을 건널 때, 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앞서 나아갔다. 마침 밀물 때이었다. 언덕에 넘치던 물에 제사장들이 닿았을 때 강 전체에 흘러내리던 물이 그 발 닿은 곳 아래에서 말라버려 이스라엘의 온 무리가 마른땅을 건넜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강바닥 가운데 궤를 내려놓았다가 모두 건넌 후에 다시 궤를 들어올렸다. 강 건너편에 그들이 다다르자 강물이 본래대로 여전히 흘렀다.
궤는 신성한 곳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궤와 함께 계셨다. 때문에 궤를 모독하거나 심지어는 만지기만 해도 즉사하였다.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가면 반드시 승리하였다. 궤야말로 역사상의 어떤 사람이 가졌던 물건들보다 이상할 정도로 훨씬 강한 것이었다. 궤를 치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는 무엇이고 간에 성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인들이 궤가 상징하는 언약을 지키는 동안 궤는 장벽이나 요새 못지않게 강한 힘이 되었다. 궤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해 싸워주심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위험한 곳에 진을 쳤고 강물은 본래대로 여전히 흘렀다. 후퇴할 길은 막연했고 수 천 세대가 먹을 식량도 없었으며 강한 군사력도 없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가장 강한 민족들끼리 동맹한 무리들과 맞섰다. 30여명의 왕들이 동맹하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약한 군대에 대항하였다.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줄지어 행진한 성읍이었다. 그 성읍을 점령키 위해 군대가 아닌 제사장들이 파견되었다. 무사들은 싸우는 대신 궤를 호위하여 줄지어 행진만 해야했다. 나팔을 불어 신호를 하면 궤, 대제사장, 무사들이 장엄하게 행렬을 지어 성 주변을 행진하였다. 오직 이것 뿐이었는데 성벽을 무너져내렸고 성읍 백성들은 도망쳤다.
궤로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성읍 백성들은 궤를 둘러싼 초자연적인 능력에 감명을 받았다. 만일 권한 없는 자가 궤에 손을 대기만 해도 마치 고압 전선을 만진 것처럼 즉사해버렸다. 궤 주변이나 궤가 놓인 곳이 연기로 뒤덮여있어 종종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면 궤의 능력은 줄어들고 말았다.
빼앗긴 궤
사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패하여 궤를 빼앗겼다. 나라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사무엘상 4:22)
블레셋 사람은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보호를 잃은 이스라엘인들로부터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아스돗으로 가지고가서 다곤 우상이 있는 신전 안에 그것을 두었다. 이튿날 아침에 아스돗 사람이 다곤 신전에 들어가 보니 궤 앞에 다곤 상이 넘어져 있어서 제자리에 다시 다곤 상(像)을 세워놓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도 다곤상이 궤 앞에 엎어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손이 끊어져 있었다. 게다가 독종(출혈 치질)이라는 전염병이 성읍 전체에 퍼졌다. 그러자 성읍의 방백들이 급히 회의를 열어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의 함께 있게 못할찌니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궤를 싸서 가드로 보냈다. 가드 사람은 궤를 공개하여 거리를 지나 시골로 옮겼다. 그러나 궤가 가는 곳곳마다 성읍 사람들은 즉시 독종에 걸렸다.
가드에서도 악명 높은 유물이 된 궤는 에그론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궤보다 앞서 독종에 대한 소문이 에그론에 미리 퍼졌다. 궤가 그 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읍 사람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그들은 복술사를 불러 그에게서 매우 효험있는 몇 가지의 조언을 들었다. 복술사는 그들에게 새 수레를 만들어 속건제로 드릴 많은 돈과 금 덩어리를 그 안에 넣고서 송아지와 함께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송아지는 광에 가두어 두고 수레를 소에 메우고서 궤를 싣고 가게 하라고 하였다. 만일 소 두 마리가 송아지에게 가면 독종이 궤의 존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만일 소 두 마리가 이스라엘 국경을 향해 똑바로 행하면 에그론 사람들의 병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블레셋 사람들은 복술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소 두 마리가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국경을 향해 가운데로 똑바로 갔다. 이스라엘인들은 밭에서 일하다가 소 울음소리와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와 여호와의 궤를 끄는 소 두 마리가 그들 앞에서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성읍 백성들이 기이하게 여겨서 속죄소를 치우고 궤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 같은 어리석은 행위로 인해 칠십 명 가량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 충격이 다소 가라앉았을 때 성읍 백성들은 다시 궤에 대한 경의를 품게되어 궤를 다룰 줄 아는 제사장들을 불러 궤의 처소로 그것을 옮겼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은 궤를 보관하는 처소로 다윗이 처음으로 계획하였다. 그에게 성전을 짓는 일이 허락되지는 않았으나 그는 성전을 지을 셈으로 수백만 달러나 되는 금은을 모아 두었다가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었다. 솔로몬 성전을 다시 그대로 세운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화폐 주조에 쓰이는 금의 양보다 훨씬 많이 들것이라고 추산되어 왔다. 이같이 엄청난 재산을 들여 성전을 세운 것은 귀중한 궤를 위해서였다.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궤를 성전으로 메고 오는 제사장들의 행렬을 보려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빽빽한 구름처럼 성전을 가득 채웠으며 솔로몬은 봉헌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름과 그 왕국이 위대하다는 소문이 온 세계에 퍼졌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
스바 여왕은 솔로몬이 위대하고 지혜롭고 부유하다는 소문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코자 예루살렘으로 갔다. 이디오피아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발병을 고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되어 있다. 그녀는 향품과 금과 보석을 실은 약대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열왕기상 10장 10절에는 “저가 금 일백 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것처럼 많은 향품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경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이디오피아의 역사적 기록에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의 아들을 잉태한 채로 떠났다고 되어있다. 또한 성경에는 솔로몬이 그녀에게 물건을 준 외에 또 그녀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모두 주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성경은 또한 솔로몬이 다스릴 동안 언약궤가 없어졌다는 의혹을 뒷받침해 준다. 즉 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만 언급되었는데, 그것도 “언약궤” 혹은 “여호와의 궤”라는 명칭 대신 “거룩한 궤”라고 불리었다.
언약궤에 대해 이같이 단 한 번만 언급한 것은 궤를 성전 안에 다시 넣어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상이 있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궤는 계속 밖으로 내쫓겼다. 그 궤가 진짜였다면 이 같은 일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솔로몬이 다스리고 난 후 궤는 그 영광과 능력과 경의를 갑자기 잃었다. 궤에는 계속 깊은 비밀이 있었던 것 같다. 간단하게라도 궤에 관한 말이 없었고 비록 저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하게 핍박했을 때라도 그것을 전쟁터로 옮겨가지 않았다. 앗수르 인들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고 그 땅을 파괴했을 때마저도 궤를 이용해 보려고 애쓰지 않았다. 성전의 귀중품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을 때에도 궤에 관한 말이 전혀 없었다.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다시 돌아가서 가장 중요한 궤가 있는 성전을 다시 세울 것을 명령하여 느브갓네살이 성전에서 빼앗아온 온갖 보물들을 되돌려 주었을 때도 무엇보다도 가장 신성한 궤에 관한 말이 전혀 없었다. 솔로몬 이후 진짜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없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있었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지 않은 다른 궤가 그 곳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두 번째 성전 안에는 법궤가 없었다. 궤가 없다는 점에서 첫 번째 성전보다 훨씬 못미치는 성전인 셈이다. 거룩한 속죄일에 지성소에서 궤 위에 피를 뿌리기 위해서는 그 궤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대신 사용했었음에 틀림없다.(성경백과, 포셑 저)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
메네릭이 많은 유대인 일행을 데리고 이디오피아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현재 이디오피아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이디오피아에 유대인들이 살고있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초대교회 시대, 이디오피아의 한 내시가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왔다. 적어도 그는 유대교 신자였으며 또한 재정상이기도 했다. 빌립이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세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첫째 지역에서는 열 지파가 모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앗수르인의 포로가 되었다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둘째 지역은 예루살렘을 다스리고있던 솔로몬의 아들에게 충성을 다 하였다. 셋째 지역은 또 다른 왕위 계승자인 메네릭과 함께 이디오피아로 건너갔다. 이스라엘의 첫째와 둘째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긴데다 궤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은 온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거민의 수는 가장 적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궤를 간수했던 셋째 지역에는 유다 지파의 다윗 혈통을 이은 왕이 있었다. 이는 야곱의 예언을 이루는 것일 수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0:10)
우리는 이 말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재림하실 때까지 유다 지파의 한 왕이 유대인들을 계속 지배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자신이 바로 유다 지파의 한 왕임을 주장하였다.
“유다의 사자(獅子)”라는 칭호는 야곱이 임종할 때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유다는 사자(獅子) 새끼로다.”(창세기 49:9)
“팔레스타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미 홀이 유다에서 떠났던 것 같다. 헤롯은 유대인의 혈통이 아닌 에돔 자손이었으며 로마의 절대적인 정실 덕택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치리하는 동안에는 실제로 로마에 충성하는 공신(公臣)이었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이 공신에게 유대 왕이란 작위를 하사하기도 했다. 그 작위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대 이탈리아 공화국 출생인 에돔 자손의 한 협잡꾼이 약속의 땅을 지배한 셈이 되었다. 그러므로 홀(笏)이 유대를 떠났다는 것은 사실이다.”(풀핏 주석)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계를 다스리게 될 대표적 인물이 유다 지파 가운데서 나오게 된다면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그 인물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메네릭이 유대인 혼혈아였으므로 그가 대표자가 되는 것에 반감을 품었던 것같이 솔로몬의 왕위를 이은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족 여인이었다.
“만인의 왕”이란 칭호는 흔히 쓰인다. 느부갓네살과 아닥사스다 두 사람 모두 그 칭호를 사용했고 성경에서도 그 칭호로 그들을 불렀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열왕의 왕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에스겔 7:12)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다니엘 2:37)
유다 지파의 어느 왕에게든지 “유다의 사자(獅子)” 혹은 “유다를 정복하는 사자(獅子)”라는 칭호로 부를 수 있다. 계시록 5장 5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라고 부른다. 그러나 메네릭 왕조에서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다 지파의 사자” 라는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기 앞서서 이미 사용되었을 것 같다. 창세기 49장 9절에 나오는 열 마리의 사자는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 아니고 유다와 그 지파를 가리키는 것이다. 9절의 “실로” 라는 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유다 지파의 왕기(王旗)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포셑) “사자”는 “유다 지파”와 “그 지파의 왕” 들을 가리킨다.(크루든) “족장 지파 유다는 사자 새끼에서 성장하였다” (재미손, 포셑, 브라운) 사자(獅子)가 그리스도뿐만이 아니고 주로 유다 지파를 가리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의 어떤 왕에게라도 “유다의 사자” 라는 칭호로 부르는 것이 조금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또한 그 칭호를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이에게 사용해도 외람된 것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유다 지파의 기장(旗章)에서 유래된 이 칭호에는 성경이 유대 왕들에게 명백하게 부여한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셀라시에가 다윗 왕위의 후계자였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 다윗의 혈통이 오로지 “유대의 왕” 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기 때문이다. 셀라시에가 내세우는 것은 자신이 유다지파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라는 것 뿐 이었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조상인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어 이스라엘 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호세아 3장 4절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유다 지파 중에서 왕이 나올 수 있었던 혈통은 비단 하나 뿐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진 후에 이방인에게 건너갔다. 그러므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전에 먼저 이디오피아에 있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일이 필요하였다. 이 같은 이유로 빌립과 이디오피아의 한 관리가 놀랍게 만나게 되는 것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기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사도행전 8:26-27)
빌립은 이 이디오피아 사람이 이사야 예연서를 읽는 것을 보고 “그에게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자 그 이디오피아 사람은 “보라, 여기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말했다.
빌립이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하자 이디오피아 사람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들인줄 믿노라.” 라고 대답하였다. 이디오피아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사도행전 8:26-40)로 기록되어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이런 식으로 그 말씀이 이디오피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전해졌다.
이제 이디오피아에는 왕이 없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죽었고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국가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같은 정세가 얼마동안 지속될런지 알 수 없지만 이디오피아에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요소가 적지 않다.
창세기 49장 10절에 나타난 야곱이 유다에게 내린 축복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실로’가 지명이지만 10절에서는 마치 인명(人名)처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하셨다.
야곱은 단순히 메시야는 유다 지파에서 나오며 그가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은 왕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디오피아에 대한 위대한 예언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갈대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도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찌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 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버려서 산의 독수리들에게와 땅의 들 짐승들에게 끼쳐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과하하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과동하리라 하셨음이니라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사18:1-7)
슬프다. 날개치는 소리나는 땅이여(사18:1)
여기서 슬프다(woe)라는 말을 ‘호우(ho)'로 읽어야한다. “하나님께서 이디오피아인을 멸할 것이다.” 란 영역 성경의 첫 머리말은 ’슬프다(woe)'를 잘못 표현한데서 생겨난 오해인데 반해 히브리어는 ‘슬프다’(woe)가 위험이 아닌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호소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디오피아인들에 대한 적들의 멸망을 예언하는 자신의 예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간청하고 있다.“(재미슨, 포셑, 브라운)
날개친다는 말은 “돛과 같은 날개들이 갈대배에 대한 응답으로 서로 울리는 것이다.” (재미슨, 포셑, 브라운) “날개치는 소리가 나는 땅” (재미슨, 포셑, 브라운) “호오, 날개치는 소리나는 땅에 돛달린 배와 날으는 비행기들의 소유들이라니” 이같은 예언도 역시 이디오피아의 적들에 관한 것이다.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려 했다. 그는 정복자가 되길 몹시 원했으며 이디오피아는 방비가 허술한 작은 나라이므로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그는 이디오피아가 하나님의 장래 계획을 이루는 장소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일 무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면 성취될 수 없었던 예언의 말씀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디오피아의 강 건너편
이디오피아에서 발원한 강 건너편에 있는 나라에서 이 예언을 기록하여 알린다. 곧 유럽의 모든 국가가 해당될 것이다. 과거에는 그 예언이 이루어져 오지 않았다. 날개 달린 비행기를 사용해서 이디오피아를 침략할 수 있었던 나라가 단 하나도 과거에 없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계속 기대왔던 이디오피아를 뛰어난 전투력과 공군력으로써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에 대하여 이사야 예언자는 경고한다. 하나님께서 이디오피아 백성을 보다 더 낫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디오피아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에게 소중한 어떠한 것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라시에가 솔로몬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이 전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유대 왕국의 통일이 다시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세상에서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다 지파를 유일하게 대표하는 셀라시에에게는 하늘의 은총을 구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본인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탈리아와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삼일간을 금식과 기도로 보냈다.
느부갓네셀 이후로 세상을 다스린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왕들은 이디오피아를 점령하였다.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이 분열되자 겨우 두 지파만이 솔로몬의 아들에게 계속 충성을 하였다. 그 중 일부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가지고 메데릭과 함께 이디오피아로 돌아갔다.
여러 세대를 거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왕이 없었을 동안 유다 지파 중의 다윗, 솔로몬 가문의 혈통을 이은 유대왕 한 사람이 나머지 유대인들을 다스리며 다른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한 연고로 빼앗겼지만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보호를 받았다. 다윗의 혈통을 타고난 왕과 언약궤가 이디오피아에 있을 동안에는 누구도 그들을 정복할 수 없었다.
갈대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어 이르기를 너의 경청한 사자들아 가라(사18:2)
성경 주석자들이 2절로 인해 골머리를 앓아왔음은 당연한 노릇이다. 갈대 배라는 것이 몹시 비실제적인 동시에 확실히 빠른 것도 아니다. 날개 치는 소리나는 땅에서 날랜 사자들을 이디오피아로 보낸다. 갈대 배란 비행기와 같이 거친 날개 소리를 내며 날으는 가볍고도 작은 배를 표현한 것이다. 갈대 배는 북쪽에서부터 홍해를 거쳐 바다를 통해 내려온다.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에게로
‘장대한’이란 말은 이디오피아 사람의 키가 크고 당당한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준수한’이란 말은 윤기 있고 매끈한 피부를 뜻하고 있다.
시초에서 두려움이 되는 백성에게로
이디오피아는 고대로부터 타국에게 정복당해본 적이 없는 극소수의 국가들 중 그 하나이다. 많은 주목을 끌게 하는 북부 아프리카의 작은 이디오피아는 기록상으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이디오피아에 관해서는 성경 창세기 2장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 밖에도 구약의 여러 곳에서 이디오피아에 관한 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욥은 지혜를 구스(이디오피아)의 황옥에다 비유했으며 모세는 이디오피아의 신부를 취하였고 이사야는 백만 군사와 병기 삼 백대를 거느리고 지휘하는 이디오피아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디오피아는 세계 대제국들의 흥망을 지켜보아왔다. 이디오피아는 느부갓네셀이 바벨론 도시를 세울 때도 존속하였으며 또한 그리스의 발흥도 목격하였다. 또 로마인의 무리가 유럽 땅을 짓밟으며 횡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문명의 변천 과정도 계속 지켜보아왔으며 곧 영원할 줄 알았던 문명들이 이디오피아 앞에서 사라져 갔으나 오직 이디오피아만이 계속 존속해왔다.” (오하이오 조합 교회 침례교)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비록 이디오피아가 정복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여러 나라들이 개발하기 위해 지역을 분할하였으므로 프랑스, 영연방, 이탈리아, 소말리아 땅으로 더욱 알려진 곳도 있었다. 곧 강들이 흘러 나뉜 나라로 된 셈이다. 이디오피아에는 나일강에서 갈라진 중요한 강들의 수원지가 있어 실로 요지라 할 수 있다.
이디오피아의 강들을 중요시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디오피아의 강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이집트가 크게 번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하찮은 타나(Tana) 호수의 공사작업이라도 하게되면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소출을 배 이상이나 거두게 된다. 이디오피아에서 실시하는 모든 사업에 관하여 이집트의 신문에는 반드시 큰 표제로 실리게된다. 이집트는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데 있어 커다란 구실을 한다. 무솔리니가 이디오피아를 습격한 것은 곧 닥쳐올 위기와 비교해볼 때 초기 단계의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조만간 이디오피아에서 극적인 전쟁 사건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이디오피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형적인 기독교도들이다.
빌립이란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랍게 변화시켜 버린 그 관리의 신앙간증은 이디오피아의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그리 많은 성경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이디오피아어 성경 번역이 빈약한데다가 이디오피아의 역사마저도 구전되어 기록된 것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너희는 보고...들을찌니라(사18:3).
온 세상이 이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되어 텔레비젼으로 전쟁 모습을 보고 라디오로도 그 소식을 듣게된다. 여러 나라가 그 결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나 뜻밖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전쟁의 형세를 역전시키게 된 신호가 있을 때까지 여러 나라들에게 기다리라고 명한다. 바야흐로 기호를 세우고 나팔을 불 그 때 기절 초풍할 만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나팔을 불거든
달리 말하면 기호가 세워지고 나팔 소리가 들릴 때가 된다. 우리는 기호가 어떤 것인지 듣지 못했다. 이사야 11장에는 두 개의 기호가 언급되어 있다. 처음 기호(10절)는 “이새의 뿌리”인 예수로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즉, 이방인을 끌어들이는 기호이다. “내가 지상에서 끌려 올라가듯이 모든 사람을 내게로 끌어 모으리.”(예수) 히브리말의 기호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치켜들기 위해 사용했던 지팡이를 나타내기도 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4-15)
이어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다시 손을 드실 재림의 그 날에 자기 백성들이 흩어져있던 모든 열국들로부터 남은 자기 백성들을 회복하시기 위해 여호와께서 열국들을 향해 기호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즉, 그 기호를 보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와 유다의 이산한 자들이 땅 사방으로부터 모여들 것이다. 이 두 번째의 기호가 그리스도 자신일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먼저 유대인들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을 갖지 않고 본토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재림한 후에는 이스라엘 땅에 신앙이 있을 것이다.
이 기호는 많은 나라들이 보고서 곧 알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기호는 열방을 향하여 “그들에게 나의 백성들을 놓아주라.” 는 경고로써 세워진다. 언약궤는 바로 열방을 향해서 경고를 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기호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기네 땅 안에서 적들과 싸워 이기게 된 것이다.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여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이사야 11:14) 궤가 앞서 행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땅을 정복했을 때 이 같은 일이 처음으로 일어났는데 “재림 때”에도 같은 일이 다시 있을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한다.
또한 이 기호는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하나의 기호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이방인의 관계는 이 기호와 유대인의 관계와 같다. 이스라엘에 있는 다른 표상 못지 않게 궤는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있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 궤의 금은 신성을, 나무는 인성을 상징하였다. 또한 궤는 속죄소였다. 신약 성서에는 속죄소가 화목 제물로 되어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속죄소)이니...” (요한 1서 2:1-2)
궤와 지성소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실체이신 메시야께서 광야의 길을 찾아내어 사해를 지나 가나안 복지로 그가 구속하신 자들에 앞서 가신다. 궤가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듯이 메시아도 잠깐 동안 무덤에 갇히셨다가 살아나셨다. 그리고 다윗이 궤를 위해서 예비한 시온의 장막으로 궤를 메어 올렸을 때 영광의 찬송이 울렸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산 위로 오르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 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시편 24:7-9)
“이제 모든 다곤 신은 그 분 앞에 굴복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 잠시 사로잡힌 중에도 흑암의 권세가 그 분 앞에서 눌렸기 때문이었다.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축복을 베푸시는 분이다.” (성격백과, 포셑 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라지신 것과 같이 궤도 팔레스타인에서 없어졌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요한복음 14:1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그 때에 시온산에 다시 서실 것이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가 4:2)
그러나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기호가 시온산에 나타날 것이다. 즉 표상이 실제 원형보다 먼저 나타나는 셈이다. 언약궤만이 이러한 예언을 이루게 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물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궤는 그 영광과 의미를 잃을 것이다. 또한 그 후로 궤의 효력도 사라질 것이다. 싸움터에서 궤를 기억하지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시므로 더 이상 궤를 찾지도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 표상 속에 나타난 것을 그대로 이루시면 표상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찬양하지도 않을 것이며)”(예레미야 3:16)
만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 궤를 찾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면 재림하시기 전에 틀림없이 궤를 찾고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에 나타난 기호가 언약궤인 것은 분명하다.
기호가 처음에는 나팔 소리와 함께 이디오피아의 산에 나타날 것이다. 궤도 하나의 기호로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나팔 소리가 항상 궤의 뒤를 따랐다. “솔로몬 왕과 스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이디오피아 왕조의 시조인 메데릭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판과 언약궤를 모두 예루살렘에서 이디오피아로 가져왔으며 이디오피아의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이곳에 전해진 소문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침략이 임박해지자 율법판과 궤를 보호하기 위해 이것들을 이디오피아의 산성 요새로 옮겼다고들 한다.”
산 위의 기호가 나타나고 나팔이 울려퍼지면 전쟁은 침략자들에게 불리한 형세로 변할 것이다. 이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침략자들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사18:4)
이 뜻은 내가 계속 조용히 볼 것이며 처음에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침략자가 승리하게되나 여호와께서는 도무지 간섭하시지 않는다. 어느 시기까지는 침략하는 군대를 막기 위해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조치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실 것이다. 인용한 4절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침착하고도 신중한 판단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경솔하시지 않으며 오래도록 참으신다. 그분은 자기 처소에서 손수 모아들이려 하는 익은 과실들을 바라보고 온갖 이상한 변화가 주욱 있어도 쬐이는 일광이 있는 동안이었고 가을 더위에 운무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기다리신다.“(딘. 풀럼터)
풀에 쬐이는 일광갈이에서 ‘풀에’를 ‘비온후로’도 옮길 수 있다.
이 말은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비온후 장마철이 끝나고 햇빛이 다시 화창하게 비치면 날씨는 더워진다. 마치 가을 더위에 운무같이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승락으로 생각하신다. 침략하는 군대의 그 주위에서 작용하는 것들이 침략하는 군대가 불어나도록 추진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직접 대리하는 더위, 습기, 일광, 이슬이 침략자들의 계획을 무르익게 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다. 바꾸어 말하면 추수가 무르익을 때까지 군대의 규모는 커지게된다. 실제로 성경에서 추수가 상징하는 것은 군대를 갑자기 대량으로 학살한다는 것이다.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사18:5)
‘추수하기 전에’라는 말은 침략한 군대가 그들이 계획하고 있던 수확을 거두어들이기 전 쯤, 꽃이 지고 청포도가 송이송이 탐스럽게 익어갈 때, 다시 말하면 그들의 계획이 막 완료되어 병력 인원 점검을 마무리 지을 무렵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처소를 떠나 갑자기 침략자들에게 맞서 행동하신다. 침략자들이 그들이 정복한 것을 추수하는 대신에 여호와께서 침략한 군대를 거두어 들이신다.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어 퍼진 가지를 찍어버려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궤를 전쟁터로 메고 갔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셨던 것처럼 이디오피아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싸워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침략자들이 잘 짜놓은 계략을 파하시며 군대를 갑자기 전멸시켜 그 시체들을 땅에 어수선하게 흩을 것이다.
산의 독수리에게와 땅의 들짐승들에게 끼쳐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과하하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과동하리라(사18:6).
공중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이 살해된 시체를 먹으리라는 비유적 표현이 여기에 암시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솔개, 독수리, 재킬, 하이에나는 남은 해 동안 살해된 시체로 충분히 배를 불릴 수 있다. “덩굴은 모두 일시에 살해되어 솔개, 재킬, 하이에나의 먹이로 버려진 군대”를 가리킨다.
기호가 산위에 세워지고 언약궤가 다시 전쟁터로 메고 나가며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곧 왕이 기록한 사명을 띤 전쟁임을 포고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그 분이 친히 하신 언약을 돌이켜주실 것을 간구한 바로 그 때이다. 이디오피아 사람은 이스라엘인들이 궤를 메고 갔을 때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던 것과 똑같이 이디오피아인들로 승리하게되는 경험을 맛볼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면 누구나 행하여진 일을 분명히 알게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우연으로 돌린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당연히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는 새롭고도 놀라운 태도로 자기의 권능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기 손길을 감추셔서 그분의 솜씨인 줄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일하신 것을 부득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자신의 손길을 나타내시는 점을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려는 것이었다.” (이사야서 18장에 관한 캘빈의 역)
게이크는 그 귀절을 이렇게 쉽게 풀이한다. “오! 파리떼(무수히 많은 군대를 상징함)들이 윙윙거리는 구스강 건너 편의 땅이여, 그대는 가벼운 갈대 배를 신속히 물에 뛰우고 그 사자를 보내어 너희 제국과 연합할 수 있는 나라들을 모아, 모든 군대를 소집하는도다. 민첩한 자들아, 너희는 고향 구스 땅으로 도로 돌아가라. 곧 기골이 장대하고 뛰어난 백성, 유사이래 전쟁에서 간담을 서늘케 하는 백성에게로 가라. 그 백성은 강하여 모두를 굴복시키고 그 땅은 강들이 흘러 나뉘었도다. 오직 여호와께서만이 침략자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
게이크는 침략자들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이디오피아인들을 향해서 한 말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 뜻이 변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이디오피아를 한 번 침략할 것이다. 이디오피아 왕이 한 번 침략할 것이다. 이디오피아 왕이 적과 대항하려고 부대를 소집하게 되면 모두들 왕의 강력한 힘을 칭찬하게 된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경우에 있어 칭찬할 필요가 없다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마지막에는 불가사의한 일격으로 침략자들을 물리치시고 그 모든 영광을 받으려 하시기 때문이다.
그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산에 이르리라(사18:7).
이디오피아가 승리한 원인에 대하여는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 대한 은혜의 보답으로 이디오피아인들은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시온산으로 가지고 간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으로 그곳에 새 성전이 세워질 예정이다. 성전이 파괴되기 전 성전에서 끌어내어 유대인이 흩어져 있을 동안에 이디오피아인들이 간수해왔던 궤가 유대인들이 머지않아 반드시 성전을 새로 건축할 때에 시온산의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치 기경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여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36:8, 34-36)
궤와 유대인
앞서 인용한 예언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땅이 유대인에게 다시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여러 나라들이 여호와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시게 된 것을 알게되면, 바로 그 일을 하시게 된 것임을 여러 나라들이 알게 되어야 그 땅의 회복이 영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유대인의 회복과 관련해서 초자연적이고도 놀라운 증거가 나타날 것이다.
현재의 시오니스트 운동은 그 예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슬쩍 비추고 있다. 유대인의 회복은 홀연히 있을 것이다.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이사야 66:8) 시온산에 기호, 깃발, 징조 또는 상징이 세워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쉿”하는 소리를 내며 말씀하실 것이다.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아 그들의 관심을 팔레스타인에 집중시켜 특이한 식으로 그들을 본토로 끌어내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온 유대민족이 의기양양하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이것이 두 번째일 것이다. 첫번째의 회복은 이미 3000년전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 때, 궤가 앞서 행하여 요단강을 건넌 적이 있었다. 궤는 이스라엘의 땅에서 그들이 승리하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궤를 흥미의 중심이 되게 하고 분명한 승리의 원인이 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의 관심의 촛점을 궤에다 신중히 모으셨다. “성전만이 제사장 직분을 가진 깨끗한 자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제물을 바칠 수 있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유일한 장소이다. 일년에 한번씩 가장 거룩한 속죄를 위해 대제사장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전혀 헤아릴 수 없는 어둠 가운데 가장 은밀한 이곳 지성소에는 약속의 땅에서 온 백성을 인도해낸 궤가 계속 있었다.”(예수의 생애와 그 시대)
이사야서 18장의 예언은 아래와 같은 상황이 언제쯤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것이다.
1.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본토로 인정되다.(이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물을 가져간다)(이사야 18:7)
2. 유대인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바야흐로 그들의 고토로 돌아오려하고 있다.(여호와께 예물을 바치고 이를 시온산에 두게된다)(이사야 18:7)
3. 전쟁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끌 것이다.(이사야 18:3)
오늘날 이러한 상황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팔레스타인은 세계 각처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 몰려드는 본토로 쉽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궤를 받아들여서 지킬 수 있는 유대인들이 그곳에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려는 징조가 충분하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날을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이디오피아)와 엘람와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바다 건너 섬들)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에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해보시고 이스라엘의 쫒긴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이사야 11:11-12)
또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인의 회복이 이집트에서 빠져 나올 때와 약간 흡사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이사야 11:16)
팔레스타인의 회복과 같이 기적적인 일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 중 몇 가지 기적들은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던 일들과 흡사할 것이다. 이에 관해 이사야 선지자는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이사야 11:15)
시온산
이디오피아인들이 하나님께 드려 시온산으로 가지고 갈 예물이 바로 궤일 것이다. 솔로몬의 아들이 성전에서 궤를 가지고가서 유대인이 회복될 때까지 간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디오피아의 유대인들이 본토로 다시 돌아올 때 가지고 오게될 최고의 물건은 바로 궤이다. 시온산이 성전의 터는 아니나 궤가 성전을 다시 짓도록 자극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완성될 때까지 궤는 시온산에 계속 있을 것이다.
성전이 완성될 때까지는 환란과 “욥의 고난”으로 알려진 시기가 아마도 이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궤가 시온산에 계속 있을 것이다. 또한 시온산은 환난 날에 대비하여 이를 맞고 보호를 받은 유대인 십 사만 사천명의 거처가 된다.(요한 계시록 7:1-8, 14:1)
여호와의 날에 오직 시온산만이 유일하게도 안전한 곳이 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이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여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따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멸하여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다만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이사야 13:9-13)
그러나 시온산에 대해 이르기를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편 125:1)
기호(旗號)와 궤
히브리어 nes는 흠정 영역 성서에는 기호, 기, 상징, 장대로 번역되었다. nes를 영어의 의미로 살펴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한 무리나 연대를 다른 무리와 구분키 위해 임의로 사용한 표가 아니고 누구나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대상물로 일종의 주목거리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nes는 사람들의 소망과 노력을 일깨워주는 집결 지점이다. 모세는 아말렉족을 쳐부순 후에 감사의 제단을 “여호와 니시” 즉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 불렀다.
그 제단은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이 아말렉족과 모든 적들을 전멸시킬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증거이다 라고 풀이했다.(포셑) 궤가 곧 nes이고, 궤는 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적들을 쳐부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일종의 약속이다. 따라서 땅을 소유하는 현장에서는 궤를 몹시 중요시하여 사용했다. 언약궤라고 불리었던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여호와의 언약을 나타내었으니 그 언약이란 일시적인 것, 즉 땅이나 왕족에 관한 것들이었다. 십계명은 그 언약을 기초로 하였다.
그래서 궤 안에는 공식적으로 두개의 율법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은총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중단시키는 것이다. 은총의 시대가 끝난 후 적어도 7년 동안 유대인의 시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떤 종류의 성전과 거룩한 처소를 갖게되어 그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될 것이다. 또한 유대법도 그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유대법은 율법에 더한 것이 아니라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고 다니엘은 말한다.(다니엘 10장)
육십구 이레가 지날 것이다. 이방인의 교회는 육십구 이레와 칠십 이레 사이에 있을 것이다. 7년이 지나가면 그리스도께서 7년의 마지막 때에 유대인의 메시아로, 구속주로, 구세주로 나타날 것이다.
이 시기 동안에 유대인들에게는 깃발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즉, 대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관해 하나님께서 “내가 쉿 하리라.”로 말씀하시면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기호 가까이로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쉿 하는 소리는 벌집에서 벌들을 불러모을 때 쓰는 말이다. 주인의 쉿 하는 소리를 듣고 벌집에서 떼지어 모여 나오는 벌들과 같이 이스라엘인들은 기호가 시온산에 세워질 때 그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택했던 나라를 떠나 신속한 속도로 올 것이다. nes는 궤가 아니므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소산이 풍성해지기 시작하면 언약궤를 다시 찾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궤를 대신하시기 때문이다. 궤는 그 곳에 계속해서 있게 된다. 그러나 궤가 상징하는 것이 이루어져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곧 잊혀질 것이다.
기호가 반드시 궤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옳다면 궤도 하나의 기호라는 사실도 성립될 수 있다. 히브리어 nes에 대해서 포셑이 내린 정의가 궤에 해당될 수 있다. <궤는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주목거리 대상으로 사람들의 소망과 노력을 일깨워주기 위한 일종의 집결 지점이다.>
너희 하나님의 여호와의 언약을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여호수아 3:2) 그래서 기호가 유대인들보다 앞서 시온산으로 갈 때 그들은 거처에서 떠나 “그 뒤를 좇으라”는 부름을 알게된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전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수기 10:33, 35, 36)
그러므로 nes를 보고 다시 모여든 이스라엘은 “서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 아랍족을 노략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다시 모두 그 땅에 자리잡고 nes도 시온산에 쉬게 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실”것이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더라.”(사무엘상 4:22)란 말은 블레셋 사람에게 궤를 빼앗겼을 때 한 말이다. 그러나 궤가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 최고의 영광에 이르렀다. 솔로몬의 통치가 끝났을 때 영광이 떠나버렸다가 기호가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영광이 회복된다. 그때에 궤에 있었던 많은 이적들이 거듭되며 이스라엘 땅은 유대인이 지배하는 영광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궤가 움직일 때에는 나팔을 부는 소리가 이에 뒤따랐다. “제사장들은 이에 따라서 나팔을 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역대상15:2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과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여호수아 6:4)
그러므로 이사야서에는 기호가 들리고 나팔 울릴 시기에 관해 언급되어 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는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졌으며 이사야서에는 침략하던 적들이 느닷없이 전멸된다.
히브리어 nes가 항상 같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표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사야서 11장 10절에서의 기호는 그리스도이다. 반면 이사야서 11장 12절의 기호는 그리스도의 표상을 나타낸다. 민수기 21장 8절, 9절에는 기호가 ‘장대’로 옮겨 나타나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의 장대를 치켜든 것에 관해 예수는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했다. 이 말에 나타나있는 nes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상징한다. 궤에도 그와 똑같은 의미가 있어 백성들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속죄소 위에 피를 뿌렸다.
유대의 율법에서는 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두 증인을 필요로 하였다. 궤 위에는 두 증인 즉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은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언약을 증거하였다. 궤는 천국의 모형을 본떠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하늘(천국)에 두 증인을 두고 계신다.
스가랴는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써 스룹바벨이 나타나 성전의(속죄소) 기초를 놓았은즉 “그 손이 그것을 마치리라”한 것을 환상 가운데서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작하신 모든 것을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것이다.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스가랴 4:11-14)
산상에서 모세, 엘리야 두 사람의 변화된 모습이 예수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것에 관해 그들은 예수와 함께 말하였다.(누가복음 9:30-31)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가심을 온 그대로 오시리라.”고 되어있다.(사도행전 1:10-11)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당하다가 사흘만에 다시 사람들 앞에서 일어서게 될 두 증인을 이스라엘에 보낼 것이다.(요한 계시록 1장)
그리스도라는 제물이, 궤가 상징하는 것을 모두 이룬 것은 아니다. 물론 유대인이 곳곳에서 예배드린 때에 보혈은 율법과 더불어 분명한 언약의 토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후에는 유월절의 의미가 별로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지성소는 더 이상 성소가 아니었다. 성소의 휘장이 놀랍게도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져 둘이 되어 지성소가 노출되었으며 그것으로 성소가 지녔던 의미가 다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궤는 성소에 없었다.
예배를 드리는 데에 절대적으로 궤가 필요하지는 않으나 땅을 성공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고 있는 동안에는 지성소에 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실제로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틀어 볼 때에 속죄일에 장막이나 성소에 궤가 있었을 때보다도 없었을 때가 더 많았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30년간 치리하는 동안 궤는 기브온의 회막대신 궤를 위해 그가 예루살렘에 특별히 만들어놓은 장막 안에 있었다. 그 이전의 시대 즉, 사울 왕 시대에 궤는 기랏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계속 있었다. (역대상 13:6-7, 16:1)
요단강을 건넌 후로부터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이르기까지 지성소 안에 궤가 놓여있었다는 기록이 없다.(엘리 시대에는 궤가 장막 안에 있었다.) 궤가 지성소에서 쉬어야 했지만 땅이 완전히 정복된 후에야 비로소 궤는 완전히 쉴 수 있었다. 정복이 시작되면 궤가 그 거처를 떠났다가 땅을 모두 정복하고 나라가 평화로운 솔로몬이 다스리던 때에 궤는 다시 그 쉴 곳으로 들어갔다.
다윗이 처음으로 “궤를 봉안할 처소”로써 성전의 계획을 착상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땅에 전쟁이 그친 후에야 비로소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말했다.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내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라.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역대상 22:7-10)
궤를 정식으로 부르자면 “여호와의 언약궤”였다. 무엇보다도 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하신 언약과 관계가 깊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세웠으며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 자손들과 그 후 다윗에게까지도 영원한 언약으로 새롭게 하셨다. 다윗은 언약궤를 위하여 세운 장막 가운데로 궤를 메어 올리고서 악사장에게 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이는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하리라 하셨도다.”(역대상 16:14-18)
“다윗이 아삼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역대상 16:37)
그 언약이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영원히 소유하리라는 것이었다. 가나안은 약속된 언약의 땅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으셨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궤는 그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궤를 새롭게 대신할 표상, 즉 기호를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회복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궤가 상징하는 것이 잃어지기 때문에 궤 자체가 “그들이 쉴 곳을 찾기 위해 그들보다 앞서 행한다”라고 추측하는 것이 훨씬 합당하다.
궤는 움직이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두 가지 면에 대하여 모세는 궤를 만든 직후에 말하였다. 우선 궤의 움직이는 면에 대해서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민수기 10:35)라고 말했다.
이 말은 궤의 전투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실상 궤가 쉬면 땅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팔 부는 소리를 뒤따라 궤는 약속한 땅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 그 기호(궤)는 유대인이 회복하여 그 땅을 취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똑같은 일을 하게된다.
궤가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상징이었던 동시에 적에 대해서는 공포의 표시였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여호수아 5:1)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사무엘상 4:5-7)
그러므로 그 기호는 ‘열방을 위한’ 신호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사람을 노략하며......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이사야 11:12-15)
“앗수르는 칼에 엎더질 것이나......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이사야 31:8-9)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nes기호)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하셨느니라.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이사야 62:10-12)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이사야 49:22)
그 기호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될 것이다. 적 그리스도가 온 세계에 군대를 모으고 난 후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을 탈취하려는 이유는 궤가 시온산에 있기 때문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시온을 향하여 기호(기)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예레미아 4:6)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야 유대인은 비로소 팔레스타인 지방의 영구적인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기호가 있기 때문에 힘과 용기가 백배할 것이다. 결코 아랍족과 타협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몰아낼 것이다. 유대인들 개개인으로는 많은 나라에서 멸시와 핍박을 받을 수도 있으나, 기호가 시온산 위에 세워질 때에 그들이 한나라의 백성들로 존경받을 것이다. 그들이 군대의 힘으로도 열국들의 시기와 미워함을 끝까지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에스겔은 그들을 “평원의 고을들로 문이나 빗장이 없는 자들”로 나타낸다. 그들은 기호속에 상징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들을 이길 것이다.
이사야 18장을 보면 기호가 이디오피아에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위대한 승리의 신호인 것을 온 세계가 알아볼 때 기호(궤)가 시온산으로 옮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예언 속에 나타난 궤
궤 자체에 대해 언급한 예언이 있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궤를 일정한 시기까지 간수코자 하신다면, 궤가 있는 곳 나아가서는 궤의 존재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그 분의 의도와 어긋날 수 있다.
솔로몬이 궤를 그 거처에 옮기고 난 후 성전 헌당 기도 가운데에서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흩어졌다가 마지막에 돌아올 것이라는 내용과 장차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일들을 대충 말하였다. 그의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이여 일어나 들어 가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평안한 처소에 계시옵소서.”(역대하 6:41)
시편 132편 3절부터 인용해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로 되어있다. 이 말이 시온(팔레스타인)의 회복에 관한 것임은 틀림없다. 이어서 다윗은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라고 기도 드린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궤를 위한 장막을 세웠다. 궤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계속 정복을 상징하였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대인의 회복에 관하여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아모스 9:11-12)
다윗 왕이 전쟁할 때는 궤가 다윗 장막 안에 있었지만 그 후에는 솔로몬 성전으로 옮겨졌다. 아모스 선지자는 다윗 장막을 정복하고 번성했으며 안전했던 옛날과 같이 다시 세우게 되는 이유를 제시한다. 만일 궤가 없다면 다윗 장막은 전혀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윗 장막을 다시 세우는 것은 기호를 높이 드는 것과 같이 축복을 약속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시 같은 아모스 9장 7절은 약간의 흥미를 갖게 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갑돌에서 아랍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7절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 같이 이디오피아 자손들인 너희라도 내 어찌 끌어내지 않을손가? 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온 이스라엘의 변천하는 역사를 통해서 궤의 목적이 실현되고 궤가 상징하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궤를 보호하시고 간수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한가?”라고 반문한 사람도 있었다. 궤는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나 재림하실 때나 두 경우에 모두 궤의 상징이 실현된 것을 알아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궤가 성전에 없었다. 휘장이 찢어졌을 때에 지성소 안에도 궤가 없었다. 궤는 두 번째로 지은 성전 안에 없었다. 궤 대신에 세 손가락을 합친 두께의 반석이라 부르는 돌 하나만이 그 안에 있었다.”(재미슨, 포셑, 브라운)
“두터운 이중 베일이 지성소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둘째 번 성전 안에는 반석으로 부르는 돌 조각만 있었다.”(에드사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에는 궤가 표상하는 것들을 제외한 성전을 표상하고 상징하는 것들을 많이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해야 한다. 요한 계시록 11장 15절에서 19절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하늘에서 예배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이에 하늘이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여기에서의 궤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궤는 하늘에 있는 궤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야 궤가 상징하는 것이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그 때에는 언약궤를 더 이상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표상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궤 위의 속죄소가 피의 구속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 만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궤는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속죄일에 속죄소 위에 뿌려져 피를 사하시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속죄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실 것을 암시하는 하나님의 보좌이기도 했다. 이중 첫 번째 표상인 보혈이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말이라면 두 번 째 표상인 보좌와 보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들이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자연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요한계시록 1:7)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스가랴 12:1)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안식의 땅으로 자기 백성을 끌어들이는 것을 궤를 통해 세상에 나타내신 것이다. 그 약속(언약)이란 자기 백성들이 영원히 그 땅을 소유하고 왕국은 영원하리라는 것이다. 그 예언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율법
보다 깊이 고려해 볼만한 것이 한 가지 남아있다. 즉 궤 안에 들어있는 것들에 관해서다. 황당무계할 정도로 많은 재물을 들였으며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장엄한 성전은 궤를 위한 전으로써 생각하고 세운 것이었다. 궤는 하나님의 손으로 율법이 새겨진 두 개의 비석을 넣어둔 상자였다. 이 율법의 비석들은 몹시 소중한 것이었으므로 모세가 이를 깨트렸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석 둘을 새로 주셨다. 비석 둘을 안전하게 보존시키기 위해 궤 안에다 두었다. 그 비석들이 없어진 것인가? 혹은 깨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부수었던 것인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5:18)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이 진행되었던 적도, 그에 따라 복종했던 적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왕국이란 완전한 율법으로 다스리는 왕국을 말한다.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을 모세가 받아서 궤 속에 간수해 두었다가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집행하시게된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그가 많은 민족 중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미가 4:2-4)
언약궤에 대한 성경 참고 귀절
아래의 성경 구절들은 언약궤에 대해 언급해놓은 곳이다.
출애굽기 : 25:10-22, 35:12...궤를 만든 곳을 명령하다.
`` : 26:33-34...지성소에 궤를 두다
`` : 30:6... 증거궤
`` : 30:26...기를 부으심
`` : 31:1-7...궤를 만드는 사람들
`` : 37:1-9...궤를 만듦
`` : 39:35...궤를 만드는 일을 가르치다
`` :40:3, 5, 20, 21...궤가 처소에 놓이다
`` : 40:20...율법 비석을 궤안에 두다
레위기 : 16:2...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감
민수기 : 3:31...궤를 맡은 자
`` : 4:5...궤가 행진할 채비를 하다
`` : 7:89...여호와께서 궤 위에서 말씀하시다
`` : 10:33...궤가 앞서 행하다
`` : 10:35...떠나는 궤
`` : 10:36...쉬는 배
`` : 14:44...궤가 진을 떠나지 않는다
신명기: 10:1-5...여호와께서 율법을 주셔서 그들이 그것을 간수하다
`` : 10:8, 31:9, 25...레위 지파가 궤를 메다
`` : 31:26...모세가 쓴 책을 궤 곁에 두다
여호수아 : 3:3...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궤 뒤를 좇으라고 명령한다
`` : 3:6... 궤가 백성들 앞서 행하다
`` : 3장, 4장...궤가 요단강을 건너다
`` : 6:1-16...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 : 7:6...여호수아가 궤 앞에서 땅에 엎드리다
`` : 8:33...전쟁 후에 사람들이 궤 주변에 서다
사사기: 20:37...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질문을 하다
사무엘상: 3:3...장막에 있는 궤
`` : 4:3-9...블레셋인에 대항키위해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간다
`` : 4:11-22...블레셋인에게 궤를 빼앗기다
`` : 5:1-5...다곤신전에 있는 궤
`` : 5:6-12...궤가 블레셋인들을 괴롭히다
`` : 6:1-18...이스라엘로 되돌아온 언약궤
`` : 6:19...궤를 들여다보아 사람들이 죽다
`` : 6:21, 7:1, 2...아비나담의 집으로궤를 옮기다
`` : 14:18...사울이 궤를 가져오라 명하다
사무엘하: 6:2-4, 역대상:13:5-8...다윗이 귀를 메어오다
`` : 6:6-7, `` :13:9-10...웃다가 궤를 만졌으므로 죽다
`` : 6:9 , `` :13:12...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다
`` : 6:10 , `` :13:13...오벧에돔의 집으로 궤를 옮기다
`` : 6:11 , `` :13:14...오벧에돔의 집이 축복받다
`` : 6:12-16, 역대하:1:4...다윗이 귀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다
`` : 6:17 , 역대상:16:1-6...다윗 장막 안에 궤가 거하다
`` : 7:2 , `` :17:1, 역대상:28:2...다윗이 성전을 짓고자하다
`` : 11:11...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대가 장막안에 함께 거하다
`` : 15:24, 25, 29...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가다
열왕기상: 2:26...아비아달이 궤를 메었으므로 목숨을 구하다
`` : 3:15...솔로몬이 궤 앞에 서다
`` : 6:19...궤를 두기 위해 성전 안에 지성소를 예비하다
`` : 8:1, 역대하:5:2...솔로몬이 궤를 시온에서 메어올리다
`` : 8:3-8, 역대하:5:4-9...궤를 성전으로 옮기다
`` : 8:21, 역대하:6:11...솔로몬의 말
역대상: 6:31...다윗이 악사들로 칭송하는 일을 맡게된다
`` : 13:3...사울 시대에 궤가 무시당하다
`` : 16:7-37...다윗이 궤를 섬기며 노래하다
`` : 22:19...다윗이 궤에 대한 지시를 하다
`` : 28:18...다윗이 성전의 천사들을 만들 금을 주다
역대하: 6:41...솔로몬의 기도
`` : 8:11...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궤가 있는 곳에서부터 데리고가다
`` : 35:3...법궤가 다시 성전에 놓이다
시편: 132:8...주의 권능의 궤
예레미아: 3:16...그 땅에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궤를 찾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 9:4...궤 안에 있는 것들
계시록: 11:19...하늘에 있는궤
기호에 관한 참고의 귀절
아래의 성경 귀절을 가운데에서 히브리어 nes는 기호, 상징, 기로 언급된다.
이사야:5:26...열국들을 모으심
`` :11:10...이방인의 돌아옴
`` :11:12...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심
`` :13:2...아마겟돈 전쟁이
`` :18:3...산들 위에 세워지는 기호
`` :30:17-19...기호로서의 이스라엘
`` :31:P9...이스라엘의 적들이 기호를 두려워할 것이다
`` :49:22...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심
`` :62:10-12...시온의 회복
예레미아:4:6...재앙의 때를 위해 시온을 예비하다
`` :4:21...여호와께서 기호를 보시다
`` :50:2...바벨론에 대하여 기가 세워지다
`` :51:12...바벨론을 향한 전쟁
`` :51:27...바베론을 치는 열국들을 부르는 소리
시편:60:4...환란의 날에 건지시는 것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