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이 쓰는 6·25]<프롤로그> 왜 이 장면을 꼽았나
춘천전투부터 지평리전투까지
대부분 전쟁초기에 일어나
규모 떠나 흐름에 결정적 영향
결과 달랐다면 우린 다른 세상에
그러나 우리는 6·25전쟁을 몰라서는 안 된다.
6·25전쟁은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이었고 그 뒤 진행된 한국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전쟁이었다. 20개국이 넘는 나라가 가담한 국제전이었고 3년 넘게 이어졌다. 유엔군은 4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공산군의 사상자는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북한 주민은 300만 명이, 한국 주민은 50만 명이 죽었다.
6·25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의 틀 안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에 의해 구상되고 시작되었다. 많은 국제적 함의들을 갖고 있으며 이후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 뒤 냉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세계 질서는 이른바 냉전체제로 개편되었다.
6·25전쟁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제대로 알기가 무척 어렵다. 그렇게 크고 복잡한 전쟁의 모습을 일반인이 제대로 파악하기란 더 힘들다. 이를 다룬 책도 많지 않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에 쫓기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6·25전쟁사를 쓴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궁리 끝에 나온 해법은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를 중점적으로 소개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선정한 ‘5개 결정적 전투’는 규모에 따라 순위를 매긴 전투가 아니다. 해당 전투가 향후 전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엄청난 사상자를 냈어도 이후 전황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전투들도 흔하다. 그러나 큰 영향을 미쳤다면, 작은 싸움도 결정적 전투가 된다.
어떤 전투가 결정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늠해 보는 방법은 그 전투의 결말이 실재 역사와 달랐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해 보는 것이다. 결말이 달랐다면 향후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전투가 바로 결정적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19세기 영국 문필가 아이작 디즈레일리가 처음 제안했는데, 영국 역사가 조지 매콜리 트리벨리언이 ‘만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이라는 논문을 쓴 뒤로 널리 퍼졌다.
과학소설(SF) 작가들은 이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 기법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했다고 상정하고, 그런 결말에서 나온 세상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이처럼 승패가 달랐을 경우 향후 역사 자체가 달라질 만큼 중요한 사건은 ‘분기점(branching point)’으로 불린다.
6·25전쟁의 경우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저격능선과 같은 격전지들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아군과 적군 모두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러나 그런 전투들은 전황이 이미 소강상태에 있었고 작전이 ‘전선(戰線)의 정리’와 같은 제한된 목표를 지녔으므로 향후 전쟁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춘천지구전투(1950년 6월), 다부동전투(1950년 8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운산전투(1950년 11월) 및 지평리전투(1951년 2월)는 전황을 바꾼 전투로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을 빼놓으면 나머지 4개 전투는 규모면에서 그리 큰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결말이 실재 역사와 달랐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5개의 결정적 전투가 모두 전쟁 초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공군에게 밀려 서울까지 내주었던 유엔군은 다섯 번째 지평리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다시 공세를 취하면서 전황이 팽팽해졌다. 이후 전황은 시소게임처럼 되면서 결정적 전투는 나오지 않았다. 양측은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하려는 야심을 차츰 포기하게 되었고,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면 결정적 전투의 모습을 살피면 6·25전쟁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하지만 우리는 교훈보다 중요한 것을 역사에서 얻는다. 폴란드 역사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말대로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6·25전쟁은 우리 운명을 결정했고 우리 삶을 다듬어냈다. 그 비극적인 전쟁을 모르고도 태연하거나 ‘북침설’과 같은 거짓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훼손하는 일이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나는 오래전부터 시간에 쫓기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는 6·25전쟁사를 쓴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궁리 끝에 나온 해법은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를 중점적으로 소개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선정한 ‘5개 결정적 전투’는 규모에 따라 순위를 매긴 전투가 아니다. 해당 전투가 향후 전황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많은 병력이 투입되어 엄청난 사상자를 냈어도 이후 전황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전투들도 흔하다. 그러나 큰 영향을 미쳤다면, 작은 싸움도 결정적 전투가 된다.
어떤 전투가 결정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늠해 보는 방법은 그 전투의 결말이 실재 역사와 달랐다면 어땠을까를 가정해 보는 것이다. 결말이 달랐다면 향후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꾸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전투가 바로 결정적 전투라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19세기 영국 문필가 아이작 디즈레일리가 처음 제안했는데, 영국 역사가 조지 매콜리 트리벨리언이 ‘만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이라는 논문을 쓴 뒤로 널리 퍼졌다.
과학소설(SF) 작가들은 이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 기법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다거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했다고 상정하고, 그런 결말에서 나온 세상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이처럼 승패가 달랐을 경우 향후 역사 자체가 달라질 만큼 중요한 사건은 ‘분기점(branching point)’으로 불린다.
6·25전쟁의 경우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백마고지, 저격능선과 같은 격전지들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아군과 적군 모두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러나 그런 전투들은 전황이 이미 소강상태에 있었고 작전이 ‘전선(戰線)의 정리’와 같은 제한된 목표를 지녔으므로 향후 전쟁의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춘천지구전투(1950년 6월), 다부동전투(1950년 8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운산전투(1950년 11월) 및 지평리전투(1951년 2월)는 전황을 바꾼 전투로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을 빼놓으면 나머지 4개 전투는 규모면에서 그리 큰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결말이 실재 역사와 달랐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5개의 결정적 전투가 모두 전쟁 초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공군에게 밀려 서울까지 내주었던 유엔군은 다섯 번째 지평리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 삼아 다시 공세를 취하면서 전황이 팽팽해졌다. 이후 전황은 시소게임처럼 되면서 결정적 전투는 나오지 않았다. 양측은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하려는 야심을 차츰 포기하게 되었고,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면 결정적 전투의 모습을 살피면 6·25전쟁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하지만 우리는 교훈보다 중요한 것을 역사에서 얻는다. 폴란드 역사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의 말대로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6·25전쟁은 우리 운명을 결정했고 우리 삶을 다듬어냈다. 그 비극적인 전쟁을 모르고도 태연하거나 ‘북침설’과 같은 거짓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훼손하는 일이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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